소설리스트

혼불 (214)화 (214/348)

#214

윤태희는 해바라기 반창고를 붙여줬던 그때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재겸의 무릎 위에 반창고를 붙였다. 그런 다음, 반창고가 잘 달라붙도록 상처 주변을 꼼꼼히 매만져 주었다.

윤태희와 첫 만남을 회상하던 재겸의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재겸은 제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윤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무릎을 매만지는 길고 곧은 손가락에 시선을 주었다가, 어느 순간 슬그머니 다리를 옆으로 접었다.

“됐어, 이제.”

재겸이 양반다리를 하며 말했다. 그에 윤태희는 순순히 손을 떼고 물러나더니, 연고와 반창고를 꺼냈던 약 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꺼낸 물건들을 다시 원래대로 제자리에 두었다. 재겸은 약통을 정리하는 윤태희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었다.

“야, 근데 그때 그 시꺼먼 벌레는 뭐였어?”

“응?”

앞뒤 맥락 없이 날아든 질문이었지만, 눈치가 빠른 윤태희는 이내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도서실에서 처음 만났던 날, 자벌레와 관련된 질문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제구에서 나온 거야. 그 공간에 들어온 사람이 귀재인지 아닌지 판독하는 제구.”

윤태희가 약 상자를 정리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제구를 사용해 만들어낸 까만 자벌레는 귀기를 지닌 사람에게 반응하며, 귀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걸로 누가 귀재인지 알아내려고 한 거야?”

“응.”

윤태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윤태희는 후임으로 삼을 귀재를 찾으러 잠입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재겸은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윤태희는 알고 보니 나자였고, 저에게 다정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간의 호의와 친절은 거짓이었고, 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재겸은 머리털이 쭈뼛 솟을 정도로 화가 났다. 바보같이 그 호의에 혹했다는 것이 분하기만 했었다. 그때 재겸에겐 윤태희와 묘정이 겹쳐 보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일이 아무렇지 않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이제는 묘정과 윤태희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 귀재 몇 명이나 있었는데?”

“너 포함 세 명.”

그중 한 명이 조영우였구나. 생각해보니 조영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걔는 잘 지내고 있을까? 잠시 잊고 지냈던 조영우를 떠올린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때 내가 끝까지 네 제안을 거절했으면 나 대신 조영우를 데려갈 생각이었어?”

“음, 그랬을 수도 있고. 안 그랬을 수도 있고.”

모호한 대답에, 재겸의 눈꼬리가 슬쩍 올라갈 때였다.

“하지만 계속 두고두고 평생 후회했겠지.”

“뭘?”

약 상자를 정리하던 윤태희가 조용히 대꾸했다.

“너를 붙잡지 못했다는 거.”

뾰족하던 재겸의 눈꼬리가 스르르 풀렸다.

“…….”

문득, 언젠가의 쓸쓸하던 목소리가 재겸의 귓가를 맴돌았다.

‘왜 나는, 자꾸 널 실패하지?’

너를 놓쳤으면 평생 후회했을 거라는 말, 재겸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근데 귀재가 겨우 세 명밖에 없었어?”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한참 만에 다른 화제를 꺼냈다.

“더 있을 것 같긴 했는데, 세 명 밖에 못 찾았어.”

윤태희의 대답에, 재겸이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대륭 고등학교는 꽤 큰 편이었기 때문에 학생 수가 몇백 명은 되었다. 그중에 귀재가 세 명밖에 없진 않았을 것이다.

“왜 세 명 밖에 못 찾았는데?”

“글쎄….”

윤태희가 턱을 매만지며 태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떤 깜찍한 친구가 벌레를 싸그리 죽여버리기라도 했나?”

저를 겨냥하는 말임을 알아차린 재겸은 순간 뜨끔했다.

“…….”

내가 그랬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덜컥 당황한 재겸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애써 무덤덤한 낯으로 바닥 장판에 검게 그을린 자국을 손끝으로 긁적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어떻게 알았어?”

흘리듯 던진 질문에 윤태희가 눈썹 한쪽을 슥 들어 올렸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이번에는 반창고를 만지작거리는 척하며, 재겸이 대충 말을 흐렸다.

“어? 어, 그건 뭐….”

책을 찢어서 부적을 썼다고 솔직하게 얘기하자니 윤태희 집에 빽빽하게 꽂혀있던 책들이 생각났다. 섬에도 책을 들고 왔으니 윤태희는 책을 아주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사서였을 때도 항상 책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이실직고하기에는 마음이 찔렸다.

“…….”

잠시 침묵하던 재겸은 딴청을 피우다가 슬그머니 화제를 바꿨다.

“야. 그, 근데.”

“응.”

“그럼 너는 그때부터 내가 귀재라는 사실을 알았던 거야?”

“응.”

다행히 윤태희는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가 귀재라는 걸 알았구나. 어쩐지, 자꾸 친구가 되자느니 낯간지럽게 군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너는 진짜 약았어.”

재겸의 핀잔에, 약 상자를 정리하던 윤태희가 태연히 대꾸했다.

“약았지. 너 도서실에서 교내 봉사한 것도 학생부장 선생님한테 부탁한 거고.”

“뭐?”

재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불필요할 정도로 주변을 맴돈다는 것은 그때도 체감하고 있었지만, 교내 봉사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책 읽고 감상문 쓰라고 한 것도 다 수작질이었냐?”

“그럼요, 전부 다 수작질이었지. 요.”

윤태희가 장난스레 말꼬리를 늘이며 대답했다.

“너는 천하의 막돼먹은 놈이야.”

재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윤태희는 욕을 먹어놓고도 조용히 웃기만 했다. 책 읽고 감상문 쓰느라 머리에서 쥐가 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도 다 윤태희의 계략이었던 거다. 치밀한 성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후임을 구하러 그 작은 소도시까지 와서 사서로 잠입하고, 그렇게 하나하나 신경을 썼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숨 막혀서 그렇게는 못 살 것 같았다.

재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도 참 피곤하게 살았구나.”

“그런가?”

윤태희가 푸스스 웃으며 덧붙였다.

“근데 나는 그때가 좋았는데.”

“뭐가?”

“그냥, 사서로 있었던 그 시간들 전부 다.”

후임을 찾을 목적으로 고등학교 사서 선생으로 위장한 것이었지만, 윤태희는 그 일이 꽤 마음에 들었다. 서가를 정리하고, 라벨을 붙이고, 오늘의 추천 도서를 고르고, 조용히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면 창 너머로 하루가 저물어가던 풍경과 그 시간들이 좋았었다.

“평범하게 살았다면 아마 사서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

“그래?”

“응.”

약 상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윤태희가 “아, 맞다. 그리고….”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윤태희가 소리 없이 미소를 짓더니, 콧잔등을 찡그렸다.

“어떤 깜찍한 친구가 몰래 날 훔쳐보는 것도 좋았고.”

모니터를 보는 척하며 눈동자를 굴리면, 비스듬한 각도에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마다 소년은 지루한 얼굴로 뺨 한쪽을 책상에 댄 채 페이지를 훌렁훌렁 넘기고 있거나, 가끔은 아예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웬일로 책을 직각으로 세우고 독서에 열중할 때도 있었는데, 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저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서로가 서로를 훔쳐보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

불시에 정곡을 찔린 재겸의 눈썹이 꿈틀했다.

“내가 언제. 안 훔쳐봤어.”

“거짓말.”

“나는 책만 들여다봤어. 책 읽기 바빴어.”

시치미를 떼는 재겸의 귀 끝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래요? 그렇게 열심히 읽었을 줄은 몰랐는데.”

윤태희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 읽은 책 제목 정도는 충분히 기억하시겠네요?”

살짝 허풍을 보탰다가, 재겸은 금세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

재겸은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지지 않고 역공에 나섰다.

“그, 그러는 너야말로 맨날 나 훔쳐봤잖아.”

까칠하게 쏘아붙이자, 윤태희가 피식 웃었다.

“책만 들여봤는데 내가 훔쳐본 건 어떻게 알았어?”

예리한 지적이었으나, 재겸은 윤태희에게 말리지 않고 벌컥 화를 냈다.

“야, 그게 벌써 몇 달 전인데 그때 읽은 책을 어떻게 기억하냐?”

“왜? 나는 그때 네가 읽은 책이 뭔지 다 기억나는데.”

웃음기 어린 다정한 목소리에, 재겸이 고개를 들 때였다.

“나는 전부 기억해.”

그렇게 말하며, 윤태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가 그날그날 무슨 책을 읽었는지, 전부 다….”

약 상자 정리를 끝마친 윤태희는 TV 선반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쪼그리고 앉더니 선반을 열고 약 상자를 원위치에 놓았다. 그러자 흰 티셔츠 너머로 오밀조밀한 등 근육의 윤곽이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불툭 튀어나온 날개뼈, 탄탄하게 벌어진 어깨. 너른 등….

그 순간, 재겸은 왜인지 형용할 수 없는 충동 같은 것을 느꼈다.

갑자기 윤태희를 때리고 싶었다. 구부정한 등을 내보이며 앉아 있는 윤태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저 넓고 탄탄한 가슴팍을 잡히는 대로 마구 쥐어뜯고 싶었다. 툭 불거진 날갯죽지며, 팔이며, 저 너른 등을 손톱으로 마구 할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는….

“…야.”

재겸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있잖어.”

“응.”

윤태희의 등을 바라보던 재겸이 조그맣게 말했다.

“키쓰해 볼래….”

그 순간, 윤태희의 어깨가 멈칫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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