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17)화 (217/348)

#217

신지혜가 돌아왔다.

섬에 들어온 지 이틀째가 되는 밤이었다. ‘신지혜’라는 이름 석 자를 본 순간,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그대로 숨을 멈췄다. 마치 무거운 선고라도 받은 듯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재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윤태희와 재겸의 시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재겸 역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런 말 없이도 두 사람은 서로가 어떤 감정 속에 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우웅, 낮게 깔린 휴대폰의 진동이 묘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휴대폰 줘 볼래?”

잠시 침묵하던 윤태희가 마침내 손을 뻗었다.

재겸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을 건네받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전화가 끊어졌다. 윤태희는 곧바로 다시 신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기나긴 신호음만 울려 퍼질 뿐, 아무리 기다려도 신지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곁에 있던 재겸이 설핏 낯을 굳히며 물었다.

“전화 안 받아?”

“응.”

윤태희는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이번엔 기나긴 신호음 대신에, 전화를 연결할 수 없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뭐지? 윤태희가 눈을 좁혀 뜨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

문득, 윤태희는 희미한 두통을 느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위기감이 엄습했다. 윤태희는 손바닥으로 한쪽 눈가를 틀어쥐었다. 기분 탓일까? 눈 한쪽이 욱신욱신했다.

재겸이 낯을 덜컥 굳혔다.

“왜 그래? 어디 아퍼?”

윤태희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어쨌든 확실한 것은 신지혜가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윤태희는 손목에 찬 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아니, 시계 너머로 방금 전까지 저에게 말을 걸었던 시시를 노려보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연락을 받았음에도 윤태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시시와 나눴던 대화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야 시시가 깨어났는가. 지난 세월 쭉 잠들어 있던 시시가 건넨 말은 지금 당장 도망치라는 경고였다.

도망쳐라? 대체 무엇으로부터?

시시는 재겸이 온 것을 알고 귀신같이 기척을 숨긴 상태였다.

“일단 내려가 보자.”

그때,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서 있던 재겸이 입을 열었다.

“비가 오고 있으니까 어쩌면 휴대폰이 망가졌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며, 재겸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어두운 바다가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처마 끝에 맺힐 새도 없이 물줄기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래.”

마침내 윤태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시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은 끈끈이처럼 발목을 옥죄어 왔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달아날 곳은 없었다. 아니, 달아나서는 안 됐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봐야 했다. 재겸의 불로불사가 인어와 관련된 것인지 파헤쳐야만 했다.

지금 윤태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가자.”

재겸과 윤태희는 한쪽에 놓인 우산을 집어 들었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은 어느새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각자 하나씩 우산을 쓰고 대문 근처로 몇 걸음 향했을 때였다.

“아, 잠깐만.”

재겸이 무언가 뒤늦게 떠오른 듯한 기색으로 돌연 발을 멈췄다. 재겸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다시 되돌아 나왔다. 재겸이 나와서 신발을 꿰어신자 윤태희가 물었다.

“왜?”

재겸이 별거 아니라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렇게 두 사람은 안온한 황토집을 나섰다.

대문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한결 거셌다. 섬 날씨가 궂은 탓에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재겸과 윤태희는 골목을 빠져 나와 부둣가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샌가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긴장감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신지혜와 헤어졌던 장소에 도착하자 빗줄기는 한결 잦아든 상태였다.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는 차츰 멎고 있었으나 바람이 강해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신지혜.”

윤태희가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살펴보아도 이렇다 할 인영은 눈에 띄지 않았다. 불빛 한 점 없어 시야가 어두웠다. 신지혜와 헤어진 장소는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의 구석이었다. 울퉁불퉁한 바위,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 깎아지른 절벽이 전부였다.

크고 작은 바위틈으로 파도가 몰아쳤다가 물러나길 반복했다. 거센 바람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우산대가 부러질 것 같았다. 누군가의 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거기 있어.”

윤태희는 우산을 들고 절벽 근처로 향했다. 신지혜의 캐리어를 보관해둔 위치를 확인했다. 캐리어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이번에는 바다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휴대폰으로 조명을 켠 뒤, 땅바닥을 살펴볼 때였다. 바위틈 사이로 떨어져 있는 다른 휴대폰이 눈에 띄었다.

신지혜의 휴대폰이었다.

윤태희는 허리를 굽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물에 젖어 방전된 상태였다. 한데 이상한 점은, 기이한 모양으로 구겨져 있다는 거다. 액정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꼭 누군가가 고의로 망가트린 듯한 모양새였다

“…….”

뭐지,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낯을 굳혔다.

박살 난 신지혜의 휴대폰과 어디론가 사라진 신지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얘들아, 여기야.”

그때였다. 바다 저 멀리,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겸과 윤태희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 파도가 몰아치는 수면 위로 인영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바닷속에서 상체를 내밀고 있는 정체는 신지혜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윤태희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우산을 고쳐 쓰며 물었다.

“연락이 안 되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신지혜는 윤태희의 손에 들린 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아, 그거? 빗속이라 손이 미끄러워서, 물에 빠트렸어.”

신지혜가 물에 젖은 긴 머리를 쓸어올리며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근데 떨어트린 것치고 휴대폰이 심하게 망가졌는데.”

윤태희는 한껏 신경이 곤두선 낯을 하고 있었다. 윤태희가 날카로운 눈으로 신지혜를 응시할 때였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재겸이 윤태희에게 다가오더니 등을 툭, 쳤다.

마치 ‘왜 그렇게 날이 섰어? 힘 풀어.’라고 말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

그에 윤태희의 안광이 살짝 흐려졌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잠시 침묵하던 윤태희가 손끝으로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아냐, 고생은 무슨.”

“무슨 일 없었어?”

윤태희의 질문에, 신지혜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별일 없었지.”

이틀 만에 재회한 셋은 안부를 나누었다. 그때, 검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재겸이 눈에 힘을 주었다. 방금 어두컴컴한 물속에서 반딧불이처럼 녹색 빛이 반짝이며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다시 눈에 힘을 줘 보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방금 뭐였지? 잘못 봤나?

재겸이 다시 한번 바다를 훑어보려 할 때였다.

그때,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는?”

신지혜의 어깨가 얕게 튀었다.

“어? 아, 우… 우리 엄마는,”

신지혜는 어딘가 불편한 듯한 기색이었다. 재겸과 윤태희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신지혜가 머뭇거리며 말을 흐릴 때였다. 신지혜의 등 뒤에서 머리 하나가 솟아올랐다.

피부가 몹시 창백하고, 새파란 입술을 가진 인어였다.

“저분이야?”

“으, 응.”

신지혜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태희는 신지혜의 모친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러나 신지혜의 모친은 말없이 재겸과 윤태희를 뚫어지게 쳐다볼 따름이었다.

그때, 모친이 신지혜를 향해 뭐라 소곤거렸다. 신지혜가 경직된 표정으로 입가를 끌어올렸다. 모친은 뭍을 향하여 미끄러지듯 다가오더니, 바위에 선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저는 윤태희라고 합니다.”

우산을 쓰고 있던 윤태희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바라본 신지혜의 모친은 아주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다만 신지혜와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장성한 딸을 둔 나이치고는 훨씬 젊어 보였다.

“그래, 이야기는 들었어. 지혜가 신세를 지고 있다고.”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신지혜의 모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지혜의 모친은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바닷속에 하체를 숨긴 두 인어 사이에는 모녀지간치고 묘한 거리감 같은 것이 있었다.

윤태희는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힐끗, 신지혜에게 눈길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역시나 신지혜는 시선을 피했다. 방금 눈동자가 짧게 흔들린 것을, 윤태희는 놓치지 않았다.

그때, 신지혜의 모친이 입을 열었다.

“불로불사의 몸을 가졌다는 건 어느 쪽이니?”

그에 재겸은 대답 대신 바다를 향해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윤태희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재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재겸은 괜찮다는 듯이 윤태희의 팔을 치웠다.

재겸은 신지혜의 모친에게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짧게 설명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야.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늙지도 죽지도 않게 됐지. 그러다 너희 인어들하고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신지혜의 모친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생환을 취하면 불로불사가 된다는 게 사실이야?”

“영생환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단다.”

알쏭달쏭한 대답이었다. 윤태희가 눈을 가늘게 좁혀 뜰 때였다. 살짝 초조해진 재겸은 손에 쥔 우산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또다시 바다를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가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신지혜의 모친은 저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재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걸렸다.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이 세상에 진정한 영생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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