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무릎을 굽히고 앉은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대지에 깃든 광명이 곧 나의 영토이니, 영벽(靈壁)으로 사수하라.”
재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태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재겸이 결계를 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재겸이 만든 결계는 현대의 귀재들이 결계를 치는 방법과는 사뭇 달랐다. 종이에 부적을 써서 결계를 치는 것이 보통이나, 재겸이 쓰는 결계는 자연의 힘을 빌려 쓴 것이었다.
이는 아주 오래전, 선대 나자들 가운데서도 소수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방식이었으나 언젠가부터 그 전래가 끊겨 사장되었다고 들었다. 윤태희 역시 고서(古書)를 통해 접한 게 전부였다. 말로만 듣던 저 결계를, 실제로 누군가가 구현해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불현듯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기류가 바뀐 것이 피부에 와닿았다.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태희는 문득 전율을 느꼈다.
그때였다. 결계를 친 재겸이 별안간 땅에 귀를 붙였다.
크르릉….
방금 전, 땅속에서 이상한 진동이 느껴진 것 같았다. 희미한 기척이 느낀 재겸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재겸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윤태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야, 방금 뭐였어?”
윤태희가 눈매를 구기며 고개를 기울였다. 윤태희는 입에 부적을 문 상태라 말을 못 하는 상황이었다. 윤태희가 입에 문 부적을 빼려고 하자, 재겸이 곧바로 제지했다.
“뱉지 마. 부적 뱉으면 전부 깨져.”
재겸이 쓴 부재는 수액(水厄)(물에서 비롯된 재앙)을 소멸하는 부적으로,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윤태희를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윤태희는 수영을 못한다고 했다. 만에 하나 바닷속으로 끌려 들어가더라도 저 부적을 입에 물렸으니 목숨 보전할 수는 있을 거다.
“그냥 말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
“전부 내가 해. 넌 움직이지 마.”
까칠하게 경고를 끝마친 재겸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한번 놓친 기척을 다시 잡진 못했다. 뭐지, 기분 탓인가? 재겸의 눈을 두어번 깜빡일 때였다.
그때였다.
신지혜의 모친인 척 흉내를 냈던 낯선 인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재겸이 손목을 부러트린 직후,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췄던 인어는 어느새 회복하여 멀쩡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우지끈, 나뭇가지처럼 속수무책으로 꺾여서 기괴한 각도로 구부러져 있던 손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했다.
“너희 인간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인어는 엄청난 재생력을 지니고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듯했다.
어느 순간, 인어가 다시 한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바다 위로 은빛 날치 떼가 푸드덕거리며 튀어 올랐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수백 수천의 날치들이 빠른 속도로 휘몰아치며 두 사람을 향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허리를 굽히고 앉아 있던 재겸이 윤태희를 등지고 섰다.
결계가 버틸 수 있을까,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마침내 날치 떼와 충돌하던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일순간 빛의 장막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날치들이 허공 중에 푹, 푹, 박혀 들더니 일시에 팟, 튕겨 나갔다.
낯선 인어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매달았다.
“이 무슨 해괴한 술수인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두 사람을 막아서고 있었다. 마치 진공 상태에 들어온 것처럼 허공 위에 잠시 떠 있던 날치 떼들이 이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대지의 힘을 빌려 만들어낸 투명한 결계는 날치 떼와 충돌하는 데미지를 전부 흡수하고, 무화시켰다.
재겸이 엄지에 묻은 피를 쪽, 빨았다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상대해야 할 인어는 총 여섯.
그중 다섯은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으므로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낯선 인어가 연안 가까이에서 수문장처럼 바다를 지킨 채 수룡의 공격을 돕고, 인어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아예 육지로 올라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인어들은 육지로 올라올 수 없고, 이쪽은 바다로 가선 안 된다.
고로 근접전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부적을 써야 하나. 재겸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머릿속으로 원거리에서 공격할 만한 부적 술식 몇 가지를 떠올려 보았으나,
“아니야.”
그냥 공격한다면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인어의 신체는 상처를 바로 치유할 테니까. 몇 가지 수를 떠올리던 재겸의 눈동자가 싸하게 식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판단을 마친 재겸은 수첩에서 종이 한 장을 더 떼어냈다. 바람에 나풀거리던 평범한 종이가 한순간에 딱딱해졌다. 귀기를 실은 덕분이었다.
재겸은 망설임 없이 날카로운 종이를 손목 근처로 가져갔다. 재겸을 바라보고 있던 윤태희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손부터 움직였다.
윤태희가 재겸의 행동을 제지하듯이, 손목을 확 붙들었다.
“안. 돼.”
부적을 물고 있던 윤태희가 눈매에 힘을 주며 어눌하게 말했다.
“야, 내가 뭐랬어?”
“…뭐?”
재겸이 윤태희의 손을 물리치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가갈 수 없으면….”
재겸의 입꼬리가 짓궂게 비뚤어졌다.
“쏘면 그만인 거야.”
윤태희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다가갈 수 없으면, 쏘면 그만이야.’
재겸은 지금 활을 꺼내려고 하고 있었다.
윤태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언젠가 산속에서 보았던 그 기이한 활, 그것은 아무리 봐도 인간이 다뤄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스승에게 선물로 받았다고 했었다.
‘차라리 내가 지금 영귀들을 다 불러내서….’
윤태희는 생각했다. 그냥 여기서 모든 걸 다 밝히고, 영귀들을 전부 불러내 이곳을 맡기는 것이다. 평소의 윤태희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법한,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냉철한 이성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 가. 할. 게.”
재겸이 또렷한 눈으로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아니, 약속했잖아.”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킨다. 그러니까,
“넌 안전해.”
네모난 종이가 칼날처럼 재겸의 손목을 파고들었다. 생살을 찢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재겸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안쪽 팔을 따라 깊숙이, 직선으로 베어 그었다.
씨발, 뒈지게 아퍼.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통증이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깊은 자상에서 붉은색 선혈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재겸은 이를 악물고 팔 안을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이 정도는 메산이의 약수로 치유할 수 있다. 다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는 안 됐다. 피를 일정 이상 쏟으면 폭주로 이어질 테고 그렇게 되면 며칠이고 의식 없이 지내야 한다.
관건은 빠른 시간 안에 이 상황을 종결짓는 것.
마침내 팔 속에서 피에 젖은 비루한 나무 활대가 튀어나왔다. 재겸은 활대를 위아래로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윤태희가 묘한 탄성이 느껴지는 활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윤태희.”
재겸이 결계 앞에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자 살자 썼으니까 깨트리지 마. 그 반동으로 내가 다쳐.”
짧은 한마디를 남겨놓고, 재겸이 예고 없이 사라졌다.
“재, 겸….”
재겸이 맨몸으로 튀어나가자 윤태희의 낯이 덜컥 굳었다. 윤태희는 경고를 무시하고 재겸을 곧장 따라나섰다. 그런데, 발을 내딛자마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이거 설마….
재겸의 말을, 윤태희는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재겸은 처음부터 결계 속에 윤태희를 가둘 생각이었음을.
피로 쓴 결계, 피로 쓴 부적, 윤태희의 이마에 점 찍은 핏자국, 이것들은 전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강력한 주력이 담겨 있으므로 하나가 깨지면 전부 어그러질 것이다.
재겸아! 윤태희는 몸에 귀기를 싣고 결계에 쾅, 몸을 부딪쳤다. 그러나 괴물과도 같은 결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윤태희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겸아!
윤태희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재겸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재겸은 이미 바람에 몸을 싣고 기척을 숨긴 뒤였다. 부적을 뱉거나 결계를 깰 수도 없었다. 그 반동으로 재겸이 다칠 것이다. 나를, 나를 가뒀다고? 윤태희는 난생 처음 커다란 혼란에 사로잡혔다.
어디, 어디야….
윤태희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단 귀감을 활짝 열고 재겸의 기척을 좇을 때였다. 깎아지른 절벽 어디선가, 창공을 가르는 것이 있었다.
끼에에에엑ㅡ
피융,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이 그대로 수룡의 왼쪽 눈을 명중했다. 수룡이 좌우로 몸을 크게 휘며 울부짖었다. 윤태희가 눈을 크게 뜨고, 절벽 어디론가 시선을 던졌다.
“어. 디….”
저 멀리 절벽 꼭대기에서, 소년의 턱 끝까지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씨팔 안 통하네.”
눈 한쪽을 감고 있던 재겸이 인상을 썼다.
“이건… 어째서….”
수룡의 울부짖음에 놀랐는지, 낯선 인어가 눈을 치뜨고 수룡을 쳐다보았다.
“누가 감히 영물을 대적하는가?”
물리적인 귀기만으로는 타격을 줄 수 없으니, 이 활이라면 통할까 싶어서였다. 재겸의 판단은 반쯤 맞고 반은 틀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수룡은 잠시 형상이 흔들리는 듯했으나 이내 인어들의 독경에 힘을 되찾고 축 늘어졌던 몸을 비틀비틀 일으켜 세웠다.
“경, 경문을 바꿔라, 해신의 이름을 빌려서…!”
수룡의 변화에 당황한 인어가 다섯의 인어에게 고함을 지를 때였다.
“윽!”
불시에 날아든 낯선 인어가 어깨를 감싸 쥐며 바닷속으로 첨벙, 쓰러졌다.
“한 마리.”
첫발로 시험해본 것일 뿐이지, 재겸이 노린 것은 애초에 수룡이 아니었다.
“사냥 오랜만이네.”
소년이 번득이는 눈으로 활시위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