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사냥 오랜만이네.”
윤태희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태희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절벽 위였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는 볼품없는 나무 활을 든 채, 매서운 해풍 속에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어린 짐승처럼 야성적인 기세를 두른 소년을 목도하는 순간, 윤태희는 가슴 속 깊이 차오르는 압도감을 느꼈다.
섬광을 담은 눈동자,
“씨발, 빗맞았어.”
앳된 저격수가 쯧, 혀를 차며 낮게 욕을 지껄였다. 센 바람을 뚫고 먼 거리에서 정확히 표적을 명중했음에도 소년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년이 쏜 화살에 맞은 건 인어였으나, 심장을 관통당한 듯한 전율에 휩싸인 쪽은 외려 윤태희였다.
“다음은 이마 정중앙이야.”
소년은 번득이는 눈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저절로 응고되며 화살의 형태를 이루었다. 쏜살같이 날아든 화살에 맞은 낯선 인어는 어느샌가 감춘 뒤였다. 남은 자리에는 인어의 푸른색 피가 바닷물에 섞여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
활시위를 당기던 재겸은 다시 바람에 몸을 싣고 기척을 감추었다.
재겸의 모습이 사라지자, 윤태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결계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손바닥을 댄 채 재겸의 기척을 좇던 윤태희가 전전긍긍한 기색으로 결계를 손끝으로 긁듯이 매만졌다. 틀림없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건만, 단단한 벽이 만져졌다.
연안에서 공격을 지휘하던 인어가 사라지자, 남겨진 인어들이 우왕좌왕했다.
“보았나? 방금 활을 쏘았어.”
오각형의 형태로 대열을 이룬 인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잠시 독경이 멎자, 수룡의 형태가 한 차례 흔들렸다. 인어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저건 보통 활이 아니야.”
“어째서 인간의 손에 저런 물건이 있지?”
“정녕 인간이 맞는가.”
독경을 멈췄던 인어들이 황망한 눈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지닐 물건이 아니다.”
인어들이 다시 경을 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경문이었다. 해신의 영전에 제물을 바치겠노라 맹세하며 그 힘을 빌리는 주술이었다. 경문이 바뀌자 수룡의 눈이 황금색으로 번득이기 시작했다. 인어들은 마치 꼭두각시처럼 수룡을 다루고 있었다.
“잡아들여라.”
그 순간, 어디선가 또다시 화살이 튀어나왔다. 표적이 되었던 인어가 재빨리 몸을 휙 피했다. 아주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소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썅, 화살 아깝게.”
이번엔 제대로 빗나갔다. 재겸은 혀를 찼다. 그러나 아예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각형의 형태로 포진을 이루고 있던 인어가 화살을 피하기 위해 꼭짓점 자리를 이탈한 순간이었다. 수룡의 기세와 움직임이 주춤하는 것을 재겸은 놓치지 않았다.
수룡을 부리는 주술의 조건은 저 포진을 지키는 것이 틀림없었다.
“너무 뻔하잖어.”
소년의 입꼬리가 비뚤어졌다. 이번에는 포진을 한번 흔든 걸로 되었다. 인어들은 여전히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저 독경이 끝나지 않는 한 수룡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몸을 뒤척이던 수룡이 난데없이 윤태희를 향해 돌진했다.
재겸이 곧바로 입매를 굳혔다. 윤태희를 방어함과 동시에 적수를 상대해야 했으므로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윤태희가 있는 절벽 방향으로 수룡이 아가리를 벌렸다.
재겸이 매섭게 낯을 굳히며 활대를 손에 쥐었다.
“이 씨발 새끼들이 누굴 손 대.”
재겸은 활을 쏘는 대신 활대를 휘둘렀다. 야구 배트를 휘두르듯이 활대를 허공에 휘둘렀다. 무형의 귀기가 휘어진 활대 모양 그대로 거대한 부메랑처럼 떨어져 나갔다.
콰과광——!
거대한 귀기와 충돌한 수룡이 방향을 틀며 애먼 절벽을 물어뜯었다. 물어뜯긴 절벽 한 쪽이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렸다. 결계를 위협하기에 충분한 파괴력이었다.
재겸은 주먹을 꽉 쥐며 인어들을 노려보았다.
“결계를 박살 내려거든 나부터 상대해.”
재겸은 형형한 눈으로 활대를 내밀었다. 팔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뺨에 와닿는 바람은 차가웠다. 불현듯, 재겸은 피가 끓는 듯한 열기에 휩싸였다.
전의(戰意). 파괴(破壞). 멸망(滅亡), 환락(歡樂)…….
가슴을 빠듯하게 차오르는 열기는 바로 고양감이었다. 평온하기만 하던 일상이었다. 이렇게 격동하는 싸움은 아주 오랜만이었으며, 재겸을 조금씩 흥분시키고 있었다.
다 짓밟고, 망가트리고, 부서트리고 싶다.
어느 순간부터 재겸은 알 수 없는 파괴욕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하지만 재겸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재겸은 다시 한 번 활시위를 턱 끝까지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재겸의 입가에는 어느샌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광기 어린 눈으로 다시 화살을 쏘았다.
뜨거운 피에서 생겨난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아아악—!”
소리 없이 창공을 가르며 날아든 화살이 인어의 이마를 명중했다. 화살에 맞은 인어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입에서 푸른색 피가 쏟아져 나오더니, 몸의 비늘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큼직한 인영이 바닷속으로 펄떡이며 가라앉았다.
“두 마리.”
재겸이 싸늘하게 웃음을 흘렸다. 파스스, 물보라가 치며 수룡의 형태가 확연히 무너졌다. 예상대로였다. 포진이 무너지고 인어 하나를 쓰러트리자 수룡의 힘도 약해졌다.
이제 남은 건…….
“다음, 세 마리.”
전력을 둘이나 잃은 인어들은 황급히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일단 물, 물러서자! 어서!”
그에 재겸은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상황을 종결지어야 했다. 이미 피를 충분히 많이 흘린 상태였다.
놓치면 안 돼.
재겸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다녔다. 앳된 사수는 절벽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기척을 놓쳐선 안 된다. 기척을 좇던 재겸이 마침내 바다 어딘가를 저격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그때였다. 발밑이 거세게 진동하더니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절벽에 서 있던 재겸이 주춤하며 중심을 잡았으나, 딛고 있던 땅이 융기하듯 위로 번쩍 솟아올랐다. 발밑이 흔들리더니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거인이 지각을 반으로 쪼갠 것 같았다.
“뭐야.”
땅속에서 시작된 무겁고, 둔중한 목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대체 누가 이 몸을 긁어대는가.”
재겸이 멈칫하며 발밑을 내려다볼 때였다.
“아휴, 가렵다. 가려워.”
절벽이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연안 어딘가에서 암초 같은 것이 번쩍 위로 솟아올랐다. 바다의 밀물, 썰물이 마구 뒤섞였다. 바닷속에서 솟아오른 것은 거대한 민머리의 형상이었다. 재겸과 마찬가지로, 결계 속에 갇혀 있던 윤태희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귀수산?”
귀수산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몸집을 불린 큰 거북이로, 이를 영물로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귀물(鬼物)로 보는 이도 있을 만큼 기이한 존재였다. 인간에게 도움을 줄 때도 있었으나 곧잘 해악을 입힐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귀수산이 바다를 떠돌아다니다가 섬 하나가 그대로 침몰하기도 하고, 배를 난파시키기도 했다. 귀수산의 등은 매우 넓었다. 귀수산을 보는 것은 재겸도 처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바위와 흙이 퇴적된 등딱지 위에는 거대한 절벽이 생겨 있었다. 재겸은 그제야 아까 전, 자신이 느꼈던 땅속의 기척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재겸과 윤태희가 밟고 선 이 땅은 자연의 대지가 아니라, 귀수산의 등딱지 위였다.
긴 세월 이곳에 웅크리고 있던 귀수산이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지각이 이동하듯이 섬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귀수산이 몸을 일으키자 지축이 뒤흔들리며 땅이 진동했다.
“가려워. 가려워. 가려워. 가려워…….”
귀수산이 바닷속으로 헤엄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커헉, 큭… 쿨럭….”
결계가 한순간에 깨졌다. 그와 동시에 절벽에 서 있던 재겸의 오금이 꺾였다. 쓰러질 뻔했던 재겸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작게 신음하며 입가를 닦았다. 입가에는 어느샌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계가 깨지며 그 반동으로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아, 흑… 씨… 발….”
쪼개져 나간 섬, 아니, 귀수산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높이였다. 놀란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던 윤태희가 눈을 크게 떴다. 땅이 갈라지며 재겸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결계가 깨지며 자유의 몸이 된 윤태희가 추락하는 재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선오야, 저 아이를 구하지 마라!’
그때였다.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 아이를 구하면, 네가 죽는다!’
그러나 윤태희는 재겸을 향해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재겸아!”
윤태희의 입에 물려 있던 부적이 떨어져 나갔다.
마침내 윤태희와 재겸의 손끝이 닿는 순간이었다. 그때, 재겸이 윤태희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강한 힘에 이끌려 옆으로 내던져진 윤태희가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재겸과 눈이 마주쳤다. 윤태희는 눈을 크게 뜬 채 재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재겸의 왼쪽 가슴을 꿰뚫고 있는, 비수와도 같은 칼날을 바라보았다.
“씨… 발, 너… 내가 부적… 뱉, 지, 말랬…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