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윤태희는 눈을 크게 뜬 채 재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재겸의 왼쪽 가슴을 꿰뚫고 있는, 비수와도 같은 칼날을 바라보았다.
“씨… 발, 너… 내가 부적… 뱉, 지, 말랬… 지….”
윤태희를 향해 날아든 칼날을 대신 받아낸 재겸이 울컥, 피를 뱉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어닥쳤다. 재겸이 뱉은 피가 튀면서 윤태희의 눈가에 혈흔을 남겼다. 크게 뜨여 있던 윤태희의 동공에서 이윽고, 빛이 사라졌다.
“…….”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재겸을 망연히 응시했다.
“재겸아.”
대지의 힘을 빌렸던 결계는 깨졌고, 귀수산은 저 멀리 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으며, 재겸은 심장을 꿰뚫린 채 피를 토하고 있었다. 윤태희는 멍하니 입술만 달싹였다.
뭐지, 뭐지? 뭐지…….
심장이 꿰뚫리는 순간, 일그러진 표정을 한 재겸이 윤태희의 눈앞에 있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가슴을 꿰뚫은 칼날 끝을 바라보았다. 비수처럼 박혀 있던 서슬 퍼런 칼날에 갑자기 이목구비가 생겨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날치의 외양으로 변했다. 재겸의 심장을 뚫고 나온 날치가 기괴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리며 윤태희를 보고 있었다.
재겸이 피를 쿨럭, 쿨럭 토하며 가슴을 뚫고 나온 것을 잡아뺐다. 그러자 날치가 금세 바닷물이 되어 흩어졌다. 몇 차례 재겸과 윤태희를 위협한 바 있는 은빛 날치는 애초에 실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룡과 마찬가지로 바닷물로 만들어낸 인어의 주술이었다.
부적을 뱉어낸 윤태희에게 날아든, 물에서 비롯된 ‘수액(水厄)’이었다.
“씨… 발, 아… 흑!”
재겸이 가슴 부근을 감싸쥐고 털썩 무릎을 꿇더니, 악을 쓰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고통에 찬 절규가 윤태희의 귓가에 생생히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정신을 반쯤 놓은 재겸에게서 붉은 귀기가 폭발하듯 일시에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재겸아!”
윤태희가 넋이 나간 얼굴로 재겸을 끌어 안았다. 붉은 귀기는 폭주의 전조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폭발하듯 솟구쳐 오르던 붉은 귀기가 재겸의 몸 속으로 휘리릭 들어갔다.
……어?
재겸이 그대로 윤태희의 품 안에 풀썩 쓰러졌다.
“재겸….”
윤태희가 멍한 표정으로 재겸을 내려다보았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겸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윤태희는 피에 물든 손으로 재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이 재겸의 목을 감싸쥐었다. 맥박은 끊어져 있었다.
“재겸아….”
심장을 도려낸 것처럼, 선득하고 아찔한 감각이었다.
“뭐야…….”
재겸은 눈을 크게 뜬 채로 숨이 멎어 있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코끝에 손가락을 갖다대 보았다. 숨을 쉬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었다. 분명히 죽지 않는 몸이라고 했었다.
“…죽었어?”
윤태희는 잠든 어린 아이를 깨우듯이, 재겸의 뺨에 볼을 맞댄 채 조용히 속삭였다.
“재겸아.”
“…….”
“나 좀 봐.”
“…….”
숨 죽인 채 재겸을 끌어 안고 있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동공은 크게 확장되어 있었으나, 초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죽었어?”
“…….”
“죽었어?”
“…….”
“안 죽는다고 했잖아.”
“…….”
“죽었어…?”
윤태희가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윤태희는 몹시 위태로워 보였고, 한눈에 봐도 제정신 같지 않았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윤태희가 재겸의 피로 물든 손을 들었다. 성의 없이 눈가를 비비적거리다가 킁, 코를 훔쳤다. 아주 섬뜩하고, 광기 어린 모습이었다.
몸을 일으킨 윤태희가 갑자기 절벽을 짚으며 우웩, 토를 했다.
***
재겸은 환한 빛이 들어오는 방 안에서 번쩍 눈을 떴다.
“엉?”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윤태희와 함께 있었고, 인어들을 상대하고 있던 재겸은, 지금 시공간을 초월한 것처럼 엉뚱한 장소에 와 있었다.
재겸은 눈을 뜨자마자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뭐, 뭐야?”
이곳은 오래 전, 묘정과 함께 살았던 초가집이었다. 재겸은 당황한 얼굴로 제 몸을 내려다 보았다. 분명 심장이 꿰뚫렸었는데. 재겸은 평소와 다름없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았다. 이제까지 꿈을 꿨던 걸까? 어안이 벙벙한 낯으로 방 안을 둘러보던 재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꿈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이 생생했다.
재겸은 일단 창호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왜, 왜 안 열리지?”
아니, 열어젖히려고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바깥에서 누가 문을 잠궈놓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창호지 문을 덜걱덜걱 잡아당기면 재겸이 마침내 미간을 구겨트렸다.
“뭐야, 시발. 이거 왜 안 열려!”
재겸은 문에 대고 발길질을 해댔다. 창호지로 덧댄 격자무늬 나무 문살을 발로 꽝꽝 걷어찼더니 우지끈, 바깥으로 발이 튀어나갔다. 문을 부순 재겸이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썅, 하여튼 성질머리 하고는.”
마당으로 나오자마자 웬 뒷모습이 보였다. 재겸이 멈칫할 때였다. 문간에 서서 마당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구경하고 있던 누군가가 고개를 돌리더니 재겸을 바라보았다.
“어?”
눈이 마주치자, 상대가 씩 웃었다.
“너… 너… 너 뭐, 뭐야?”
재겸은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재겸이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재겸 저 자신이었다. 그때, 재겸과 똑같이 생긴 소년이 하품을 했다. 생김새와 목소리는 분명 저였다. 다만 둘의 차이가 있다면, 소년은 옛날 복식을 입고 있었으며 조금 더 해맑아 보였다.
“네 그 불같은 성질머리 때문에 자꾸 잠에서 깨잖어.”
턱이 빠져라 하품을 하던 소년이 짜증을 내며 재겸을 노려보았다. 어딘지 애정과 친근함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타자화된 자신을 마주한 순간, 재겸은 할말을 잃고 말았다.
“너 뭐야? 너 혹시 나야?”
“아니, 나는 나고 너는 너지.”
소년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재겸을 쳐다보았다.
“여, 여긴 어디야?”
“어디긴, 내 집이지.”
“네 집?”
“그래.”
재겸이 황당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 여긴 예전에 묘정과 내가 살던 집인데….”
“그래, 그러니 내 집이라고.”
소년이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묘정은 어디 갔어?”
재겸의 물음에, 소년이 와그작 인상을 썼다.
“그 개쌍놈의 인간을 왜 나한테 물어?”
갑자기 소년이 분에 겨운 얼굴을 하더니, 담장에 콱콱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썅, 개새끼! 개새끼! 씨발! 지까짓게 감히 나를!”
재겸의 낯이 오묘하게 굳었다.
“…….”
재겸은 난생 처음 ‘내가 저랬나?’ 하고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저렇게 어리고 사나운 개새끼 같고, 지랄 맞게 패악을 떨어대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왠지 수치심이 들었다.
그만큼 두 소년은 끔찍하게 닮아 있었다. 쌍둥이 형제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어? 대가리를 빠개가지고 그냥 아주 난도질을….”
소년은 묘정을 향해 악담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옆에 놓여있던 싸리빗자루며 키며 마늘 말려놓은 것을 되는대로 걷어차며 박살내기 시작했다.
저대로 내버려두면 이 집을 다 뿌수게 생겼다.
“그만해, 미친놈아.”
보다 못한 재겸이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감히 누구한테 미친놈이라는 거야?”
그때, 소년이 난데없이 재겸의 머리끄덩이를 확 잡아당겼다.
“아니 이 씨발놈이 지금.”
내 머리채를 잡어? 재겸이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소년도 지지 않고 주먹질을 시작했다. 두 명의 재겸은 우당탕 몸을 뒤섞으며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썅, 안 놔?”
“너나 놔!”
“너부터 놔!”
“이 씹새끼야!”
“뭐? 씹새끼?”
두 사람은 엎치락 뒤치락 몸싸움을 벌였다. 우당탕탕, 마당을 굴러다니며 마치 장난을 치는 새끼 고양이들처럼 주먹질을 해대다가 종국에는 둘이 캬하학, 웃음을 터뜨렸다. 몇 대나 얻어맞았음에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것은 재겸도,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야, 있잖어.”
소년이 싱글벙글 웃으며 양팔에 가둔 재겸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나랑 살자.”
재겸도 큭큭 웃으며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안 돼.”
“왜?”
“윤태희한테 갈 거야.”
재겸의 말에 소년이 갑자기 싸늘한 얼굴을 했다.
“야, 넌 그 새끼가 그렇게 좋냐?”
소년의 놀림에, 재겸의 귀끝이 살짝 붉어졌다.
“걔한테는 내가 없으면 안 돼.”
“너한테는 걔가 없으면 안되는 거겠지.”
“네가 뭘 알아.”
“그러지 말구 그냥 여기서 나랑 같이 살자.”
“왜?”
“그럼 내가 전부 다 잊게 해줄게.”
“싫어.”
재겸의 위에 올라타 있던 소년이 손을 탁탁 털었다.
“맘대로 해라. 너 혼자서는 거기로 못 돌아가.”
“왜?”
“왜긴, 여긴 한 번 들어오면 못 나가니까.”
“그런 게 어딨냐?”
재겸이 콧방귀를 뀌자, 소년이 대문 근처를 가리켰다.
“저거 봐. 저거 때문에 못 나가.”
자세히 보니, 대문에는 새끼줄을 꼬아만든 금(禁)줄이 쳐져 있었다.
“저거 누가 해놓은 건데?”
“누구긴, 씨팔. 묘정 그 개쌍놈의 인간이지.”
소년이 또다시 묘정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에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묘정은 한번도 저런 걸 해놓은 적이 없는데. 소년이 다시 열이 뻗쳤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뭘 못 나가. 저런 건 그냥 끊어버리면 그만이지.”
재겸이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소년이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묘한 눈으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저걸 끊겠다고?” 재겸이 무심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쉽진 않을 걸.”
소년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네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야.”
“뭔데?”
“하나는 나랑 이곳에서 영영 사는 거.”
뭐? 알 수 없는 말에 재겸이 낯을 찌푸릴 때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년이 얼굴을 찌그러트리며 미소를 지었다.
“나를 데리고 ‘함께’ 이곳에서 나가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