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이곳에 들어온 이상 네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야. 하나는 나랑 이곳에서 영영 사는 거, 다른 하나는 나를 데리고 ‘함께’ 이곳에서 나가는 거.”
소년이 얼굴을 찌그러트리며 미소를 지었다. 웃을 때 콧잔등을 찡그리는 특유의 표정은 영락없이 재겸과 판박이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재겸이 설핏 눈가를 구기며 되물었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공간 속에서 재겸은 소년의 말이 영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나 혼자서는 여기서 못 나간다는 거야?”
“응. 너 혼자서는 이곳에서 못 나가.”
“왜?”
“이곳은 묘정이 날 가두기 위해서 만든 곳이니까.”
소년이 대문에 쳐진 금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여기에 들어왔으니까 나가려면 저 줄을 끊어야 하잖어. 그럼 나도 이제 자유의 몸이 되는 거니까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묘정은 널 왜 가둔 거야?”
새끼줄을 꼬아 만든 금줄이야 뚝 끊어내면 그만이었다.
“묘정이 날 이곳에 가뒀어.”
“어째서?”
“몰라, 씨발.”
소년이 발치에 구르는 돌멩이를 확 걷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처음엔 엄청 화가 났어. 매일 묘정을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는 상상을 했지. 근데 이젠 세월이 흘러서 언젠가부터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어.”
소년이 음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처음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소년은 긴 세월 동안 줄곧 화가 난 상태로 지냈었다. 어쩌다가 기회라도 생기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구 날뛰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너 보니까 좋다.”
이제껏 묘정이 내게만 원수인 줄 알았다. 그런데 또 다른 저에게도 원수였구나.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재겸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두.”
이것은 어쩌면 본연의 나일지도 모르겠다고, 재겸은 생각했다. 소년은 마치 저의 오랜 친구 같기도 했고, 피를 나눈 형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있잖어. 그래서, 넌 누구야?”
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재겸이 물었다.
“글쎄, 그건 네가 직접 알아내야지.”
소년이 천덕꾸러기처럼 키득대며 답했다.
“내가 직접?”
“그래.”
재겸과 소년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두말없이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세상 그 누구보다 친한 친구처럼, 형제처럼, 뭉클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 깊이 충만함이 차올랐다. 따스하면서도 그리운 기분이었다.
“근데 너는 왜 내 모습을 하고 있어?”
“그야, 네 안에서 오랫동안 너와 함께 살았으니까.”
“그럼 넌 나랑 지금껏 쭉 같이 살고 있었던 거야?”
“그래.”
재겸은 소년을 꽉 부둥켜 안은 채 조용히 물었다.
“그럼 넌 여기서 혼자 여태 뭘하고 살았어?”
“나? 그냥 손가락이나 빨면서 바깥 구경 했지.”
“바깥 구경?”
재겸은 이곳에서 뭐 볼 게 있느냐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산자락밖에 안 보인다. 호젓하고도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여기서 뭐가 보인다는 거야? 산밖에 안 보이는데.”
“마음먹기 나름이지. 여기서도 보려고 하면 다 본다.”
허풍처럼 들리는 말에 재겸이 피식 웃었다.
“너는 무슨 눈에 발이라도 달렸냐?”
“맞아, 비슷해.”
소년이 지지 않고 재겸의 농담을 받아쳤다.
“아, 말 나온 김에 너도 한 번 볼래? 일루 와봐.”
소년이 눈을 반짝이더니, 마당 한 구석으로 갑자기 손짓을 했다. 소년이 가리킨 곳에는 크고 작은 장독대 여러개가 도란도란 모여 있었다. 소년이 그 중 하나를 골라 뚜껑을 열었다. 독 안에는 검은 물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장독대는 왜? 간장이라도 담갔냐?”
장독대 안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재겸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뭐래, 이 등신아.”
소년이 얼굴을 찡그리며 캬하학,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지 말구 자세히 봐봐.”
대체 뭐길래? 재겸이 입술 거스러미를 만지작거리다가, 흥미가 동한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머지않아 재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어?”
장독대 안에 차 있던 검은 물을 들여다볼 때였다. 검은색 액체 한가운데로 투명한 빛이 번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영상이 펼쳐졌다. 과거와 현재, 산자와 망자, 총천연색의 풍경과 세상만사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어, 이거! 그, 설마….”
마침내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한 표정으로, 재겸이 눈을 크게 뜨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
“그래, 화경(化境)이다.”
소년은 화경을 통해 이곳에서 생과 사를 포함한 만물의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신기한 눈으로 화경을 내려다보던 재겸에게 소년이 말했다.
“뭐. 너 같은 인간들이야 그렇겠지만 우리는 원래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 일어나는 일이건 다 알 수 있어. 하나하나 들여다보지 못할 뿐이지.”
재겸은 문득 고개를 숙여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자리를 서성였는지, 자신이 밟고 선 흙바닥만 눈에 띄게 닳아 있었다.
“…….”
이 자리는 소년의 그리움이 묻어 있는 자리였다.
“야.”
“응?”
“…….”
잠시 말을 고르던 재겸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재겸의 말에,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이, 장난스레 미소를 짓는다. 올곧고 깊은 눈동자가 재겸을 담고 있었다.
“넌… 신(神)이구나.”
마침내 진지해진 소년의 눈동자가 재겸을 꿰뚫어 보았다.
“그렇지?”
“…….”
소년의 앳된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용케 아는구나.”
마침내 소년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재겸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제 안에 또다른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에 소년은 재겸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내 안에 신이 있을 줄은 몰랐어.”
소년이 푸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당연히 놀랄 일이지.”
소년이 푸시시 미소를 지었다.
“왜? 너희 인간들은 누구나 각자 자기 안에 신을 모시며 살아가잖아.”
소년이 어깨를 슥 들어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자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서 있던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소년의 말을 부정했다.
“왜냐면 나한텐 신(神) 필요 없으니까.”
소년이 멈칫하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
시선을 느낀 재겸이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왜 그렇게 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더니 그 스승에 그 제자네.”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둘이 똑같단 소리야. 하여튼, 미우나 고우나 그 자식이 난 놈인 건 맞아. 보란 듯이 본향의 뒤통수를 쳤으니까. 한낱 인간 주제에 말이지.”
재겸은 소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너처럼 신이 필요 없는 인간도 있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네 세계의 신은 너겠구나.”
“뭐?”
재겸과 눈이 마주치자, 소년이 씩 미소를 지었다.
“야, 진짜루 나랑 여기서 안 살래?”
“왜 자꾸 같이 살자는 거야?”
“그야 네가 좋으니까.”
소년의 순수한 말에, 재겸이 장난스레 대꾸했다.
“그럼 네가 따라 나오던가.”
“진짜로? 그래도 되냐?”
“안될 이유야 없지. 네 갈 길은 네가 정하는 거야.”
재겸은 터벅터벅 대문 앞으로 향했다. 뻥 뚫린 대문에는 새끼줄을 꼬아 만든 금줄이 쳐져 있었고, 한지를 잘라 오려 만든 종이 그물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재겸은 양손으로 줄을 붙잡고 손에 힘을 실었다.
“진짜 끊으려고? 쉽지 않을텐데.”
재겸은 대답없이 손에 힘을 주었다. 양쪽으로 줄을 비틀자, 금줄은 너무나도 손쉽게 끊어졌다. 게다가 소년이 줄곧 겁을 줬던 것이 무색하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장난하냐? 별 거 아니잖아.”
재겸이 설핏 눈가를 찡그리며 소년을 돌아보았다.
“…….”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재겸을 바라보다가,
“난 역시 네가 좋다.”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뿌듯하고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재겸이 금줄과 종이 그물을 둘둘 말아 옆으로 확 치울 때였다.
“이건 뭐지.”
대문 앞에 드리워진 금줄을 걷어내는 와중에, 중앙에 매어져 있는 위목(성현이나 혼령의 이름을 쓴 종이)이 재겸의 눈에 띄었다. 종이에는 빼곡한 한자가 쓰여 있었다. 필시 묘정의 필체였다. 묘정의 글씨임을 알아본 재겸은 저도 모르게 글자를 읽었다.
‘…철망경으로 하여금 금쇄의 진을 펼침이다. 이는 호명자가 가로되 악신을 잡아 가두는 팔진이라, 여덟 개의 문을 닫음으로 죄진 자를 속신(束身)케하리니 그 문 중의 하나는 경문이요, 또 하나는 수문이요, 하나는….’
중얼중얼 글을 읽던 재겸이 다음 장으로 종이를 넘겼다.
“이어 명명자가 가로되, 죄진 자의 성명을 붙여 족쇄를 채우니….”
한문을 읽어 나가던 재겸이 어느 순간 숨을 멈췄다.
‘이어 명명자가 가로되, 죄진 자의 성명을 붙여 족쇄를 채우니 그 이름을 이루는 모든 획이 곧 자물쇠요, 철망이로다. 죄진 자를 압송하여 이곳에 그 진명을 속박함이다.’
그 성명으로….
다음 문장을 읽는 순간, 재겸의 시야가 핑글 돌았다.
“…….”
재겸이 입을 감싸 쥐었다. 땅이 진동하며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 전체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재겸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너, 이름이 뭐야?”
“응?”
소년이 멀뚱한 얼굴로 재겸을 응시했다.
“내 이름은 갑자기 왜?”
“말해봐, 네 이름….”
문득 미간 중앙에서 골이 깨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이 차고 어지러웠다. 재겸이 이마를 감싸 쥐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답해! 이름이 뭐야?….”
재겸이 피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
소년은 잠시 말이 없다가, 한참 만에 씩 미소를 지었다.
“나?”
이어 명명자가 가로되, 죄진 자의 성명을 붙여 족쇄를 채우니 그 이름을 이루는 모든 획이 곧 자물쇠요, 철망이로다. 죄진 자를 압송하여 이곳에 그 진명을 속박함이다.
그 성명으로 재앙에 형구를 채웠으니, 재앙 재災, 칼 겸鉗이라.
“나, 재겸이.”
이것이 재앙신의 진명(眞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