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이어 명명자가 가로되, 죄진 자의 성명을 붙여 족쇄를 채우니 그 획은 자물쇠요, 철망이로다. 죄진 자를 압송하여 이곳에 그 진명을 속박함이다….
“대답해! 이름이 뭐야?”
…그 성명으로 재앙에 형구를 채웠으니 재앙 재災, 칼 겸鉗이라. 이것이 재앙신의 진명(眞名)이다….
“나 재겸이.”
재겸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뭐?”
재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위목에 적힌 글씨를 바라보았다.
재앙신의 진명.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아까 전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이 있었고, 눈알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덕분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금줄을 끊고 위목에 적힌 글씨를 읽고 나서 갑작스럽게 생긴 변화였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툭 깨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왜 내 이름을…….”
재겸은 끙끙거리며 제 이마를 거칠게 잡아 쥐었다.
누가 헤집어 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정말로 눈앞에 있는 존재가 재앙신이라면. 그렇다면 어째서 제 몸 안에 재앙신이 있는 것이며, 어째서 재앙신의 성명과 자신의 이름이 똑같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자신이 남다른 그릇이라는 사실 정도는 어렸을 때부터 어렵지 않게 깨닫고 있었다.
가끔은 기백 하나로 귀신을 압도할 때도 있었고, 묘정을 제외하고 이제껏 저를 능가하는 상대를 본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자신이 남들보다 강해서, 타고난 자질 덕분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설마하니 제 안에 또 다른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의문이 떠오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들이 있었다.
어렸을 때 명확한 이유도 모른 채 곧잘 아팠던 것, 정신적으로 수세에 몰리거나 감정이 격앙될 때면 귀기를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가끔 이성을 잃고 날뛰는 바람에 묘정을 다치게 만들었던 것, 그렇게 날뛰고 난 이후에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던 것…….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넘겼던 일들이었다.
묘정은 그 일련의 일을 두고 ‘허깨비’에 씌어서 생긴 일이라고 했다. 잡귀가 주변을 맴돌며 농간을 부리는 것이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하기에 그때는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제 안에 있던 존재는 재앙신. 말 그대로 신(神)격이었다. 따라서 그저 허깨비라고 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마침내, 재겸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재앙신을 바라보았다.
“…….”
얼굴, 말투, 사소한 행동거지마저 저를 쏙 빼닮은 소년이 왜 그리 보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부딪쳐 왔다. 피를 나눈 형제이거나 어쩌면 본연의 ‘나’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날 때부터 함께 한 사이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면서도 애틋한 마음이 들었었다.
“너 진짜로, 재앙신이야?”
잠시 침묵하던 재겸은 눈가에 맺혀있던 피를 닦아내며 물었다.
“응.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이 나를 그렇게 불렀으니까.”
소년이 무심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재앙신이 됐어.”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원래부터 존재한 게 아니라, 꼭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알쏭달쏭한 이야기에 재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정말로 그렇게 되잖어.”
이 당연한 걸 왜 이해하지 못하냐는 듯, 소년의 반응은 멀뚱하기 짝이 없었다. 재겸은 그런 소년의 낯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근데 왜, 나는 여태까지 내 안에 이 녀석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묘정이 한 짓이야?”
뜬금없는 물음에, 소년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응? 뭐가?”
그에 재겸이 간신히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너를 잡아서 내 안에 집어넣은 인간이 묘정이냐고.”
“아니, 나를 맨 처음 ‘집어넣은’ 건 묘정이 한 짓이 아니야.”
“…뭐?”
“네가 묘정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네 안에 있었어.”
후아암, 하품을 하던 소년이 웅얼웅얼 부연했다.
“묘정은 네 안에 있는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봉인을 해 둔 거고.”
봉인을 한 사람은 묘정이 맞지만, 애초에 집어넣은 사람은 묘정이 아니다? 재겸이 멈칫하며 말을 곱씹을 때였다. 소년이 치가 떨린다는 기색으로 묘정을 힐난했다.
“어쩌다 한 번씩 나올 때마다 어찌나 개지랄했는지 몰라.”
소년의 말을 듣는 순간, 강물이 범람하듯 과거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문득, 불분명하게 흩어져 있던 모든 조각이 하나로 짜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의 기억이 없었다. 유년의 기억이 없는 건 재겸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서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인간은 너를 무서워해.’
‘넌 우리 편이야.’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이제는 흐릿해진 과거의 단편이 떠올랐다. 춥고 지쳐 있었던 어느 겨울밤, 묘정을 만나기 전이었다. 언젠가 저를 쫓아다니던 귀신들의 음성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너는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겹겹이 쌓여있던 기억들이 베일을 벗는다.
재겸이 가지고 있는 생애 최초의 기억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여기저기 길을 헤매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떠돌이 들개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밥을 구걸하던 시절 묘정을 만났고, 그 이전의 기억은 꼭 누가 도려낸 것처럼 부재했다. 재겸은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지만, 아무리 기억해 보려고 해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재겸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묘정은… 처음부터 너를 알고 있었던 거야….”
재겸이 멍하니 중얼거린 말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묘정은 처음부터, 제 안에 있는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겸아, 기운을 숨기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다정하였던 묘정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무서운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그건 바로 무의식적으로 귀기를 흘렸을 때였다.
묘정을 만나고 제일 먼저 배운 것은 귀기를 다스리는 법이었다. 묘정으로부터 귀기를 다스리는 법을 익히기 전에는 귀기가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나오곤 했다.
그때는 그저 성가신 체질을 타고났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자니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새삼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귀재라면 귀기를 바깥으로 꺼내는 훈련을 하는데, 자신의 경우에는 정반대였다. 멋대로 흘러나오는 귀기를 ‘집어넣는’ 법부터 배웠으니까.
재겸은 진정하기 위해 애쓰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붉은색 귀기도….”
“당연히 내 힘이지.”
소년의 즉답에, 재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평소 일반적인 경우에는 사용하는 귀기는 붉은색이 아니었다. 단,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극한의 상황에 몰렸을 때, 혹은 극도로 강렬한 감정에 휩싸였을 때 귀기가 폭발하듯이 흘러넘치곤 했는데, 그것이 바로 ‘폭주’였다.
폭주가 일어나면 귀기는 붉은색을 띠었다.
귀기가 폭주하는 이유에 대해선 딱히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묘정도 별말을 하지 않았고, 그건 그저 자신이 남보다 강한 귀기를 타고나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묘정은 처음부터 재앙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의문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묘정은 제게 그 사실을 숨긴 것이며,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는가…….
그 답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재겸의 유년은 언제나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유년의 여백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묘정뿐이었다. 복잡한 실타래가 한데 뒤엉킨 느낌이었다. 그걸 풀 수 있는 실마리는 묘정에게 있었지만, 묘정은 더 이상 이 땅에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일은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순순히 받아들이고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버거운 이야기였다.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우선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묘정이 제게 재앙신을 넣은 것이 아니라면 제일 처음 저에게 재앙신을 넣은 이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제일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럼, 전부 너 때문이었던 거야?”
“뭐가?”
“내가 이렇게 된 거…….”
재겸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 삼키기 위해 애썼으나,
“내가 죽지도 늙지도 않는 거, 너 때문이냐?”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