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그럼, 너 때문이었던 거야?”
“뭐가?”
“내가 죽지도, 늙지도 않는 이유 말이야.”
재겸은 소년의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
그런데, 이제까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을 꺼내놓던 소년이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사실대로 말해주는 편이 좋을까. 어느 쪽이 더 이로울지 생각하던 소년은 얼마간 미묘한 시선으로 재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장독대 근처로 가더니 보란 듯이 딴청을 피웠다.
“어? 얘 왜 이러냐?”
뒷짐을 지고 화경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던 소년이 화제를 돌렸다.
“바다에 빠져 죽으려나 본데.”
화경 속에서 보인 것은 너울대는 파도와 바닷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윤태희의 뒷모습이었다. 윤태희는 얼핏 보기에도 아주 위태로워 보였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뭐?”
화경을 빌려 바깥 상황을 파악한 재겸이 숨을 들이켰다. 심연 깊은 곳까지 내려와 현실과 분리되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인어들을 상대로, 윤태희를 혼자 남겨두고 왔다는 것을.
심연에 들어오고 나서 소년과 제법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체감상 꽤나 시간이 흐른 듯했으나, 현실의 시간으로 따지면 실제로는 아주 짧은 찰나일 뿐이었다.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윤태희에게 수액막이 부적을 써주었다가, 대신 수액을 받아내는 바람에 가슴을 꿰뚫렸다. 그에 재겸은 저도 모르게 제 심장 부근을 손으로 더듬거리다,
“가, 가야 해.”
이내 낯을 굳히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재앙신에 관하여 궁금한 것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당장 윤태희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다른 일은 나중으로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윤태희에게 가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저기로 가려면 어디로 나가야 해?”
“지금 당장은 못 돌아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난데없는 이야기에 재겸이 멈칫할 때였다.
“넌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할 테니까.”
장독대를 들여다보던 소년이 심드렁하게 말을 덧붙였다.
“이번엔 너무 심하게 다쳤어.”
현재 재겸은 폭주가 끝나고 의식이 잃었을 때보다 더 위중한 상태였다. 지난 경험을 미루어 볼 때 폭주가 끝나고 정신을 잃었을 경우, 짧으면 며칠에서 길면 몇 주가 넘도록 의식 없이 지내야 했다. 이렇듯 폭주의 여파로 의식 없이 사경을 헤맬 때는 메산이의 치유마저도 듣지 않는다. 스스로 눈을 뜰 때까지 몇 날 며칠이 걸릴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재겸의 현재 상태는 재앙신을 담는 ‘그릇’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러한 심층의 차원까지 내려와 이렇게 소년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에 없이 생명력이 바닥난 상태라는 뜻이다.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
한시가 급했다. 화경에 비친 광경을 보아하니 윤태희 혼자 인어를 상대로 대치 중인 상황이었다. 저러다 윤태희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생길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게다가 만에 하나 몇 달이 넘도록 깨어나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전부 어그러지고 말 것이었다.
“별수 없어. 저절로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려야지.”
“혹시 다른 방법은 없어?”
재겸의 질문에, 소년이 잠시 눈을 굴렸다.
“뭐,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뭔데?”
소년은 불현듯 입을 다물더니 재겸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한테 네 몸을 주는 거.”
***
윤태희는 절벽을 붙잡고 한바탕 토악질을 했다.
속에 든 것을 전부 게워냈음에도 자꾸만 구역질이 났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왜인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위액까지 쏟아내고 나서야 토악질이 멈췄다.
귀가 찢어질 듯한 이명이 울리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
멍하니 눈을 뜬 채 모든 활동을 멈춘 재겸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재겸아.”
비가 퍼붓는 소리, 파도치는 소리를 제외하면 온 사방이 고요했다. 윤태희는 재겸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댔다. 그렇게 몇 번이고 재겸을 불렀으나, 재겸은 미동조차 없었다.
“…….”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섞인 을씨년스러운 바람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태희는 명쾌한 답을 찾은 사람처럼 작게 실소를 흘렸다.
“넌 안 죽어, 아니 못 죽어.”
윤태희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현실을 부정했다. 이런 건 바란 적이 없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재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내가 살릴게.”
강한 악력에 뼈대가 불거져 나온 손은 희게 질려 있었다.
“안되면 죽을게.”
윤태희가 재겸의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중얼거렸다.
재겸아, 너는 아무 데도 못 가…….
윤태희는 한눈에 보기에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윤태희는 피투성이가 된 재겸을 으스러져라 끌어 안았다.
그 사이, 바닷속으로 몸을 숨긴 인어들은 거리를 두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인어들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윤태희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인어들은 물밑에서 시선을 교환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 개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죽지 않는 몸이라고 했던 소년은 가슴에 비수를 맞은 이후로 그대로 기척이 뚝 끊긴 상태였다. 연안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 몸을 숨긴 인어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주고받았다.
‘평범한 인간은 아닌 듯한데, 아무래도 숨이 끊어진 모양이군.’
‘하지만 분명 죽지도 늙지도 않는 몸이라고 했을 텐데….’
‘아무리 살펴도 숨이 붙어 있는 건 한 명뿐이지 않나.’
신지혜에게서 받아낸 정보에 의하면, 앳된 외양을 지닌 인간은 불로불사의 신체를 지녔다고 했다. 그런데 보란 듯이 숨이 끊겼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당장 확실한 것은, 남은 인간은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이다.
‘허면, 이제 어떡할 것인가?’
인어들이 한 차례 시선을 주고받았다.
‘나머지 한 놈도 숨통을 끊어야겠지.’
인어들은 애당초 재겸과 윤태희를 살려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둘을 죽일 생각이었다. 인어들은 인간 세상과 완전한 단절을 위해서 오래전부터 그 족적을 지워왔으나 둘은 오랜 세월에 간신히 묻어두었던, 민간에서 사장되다시피 했던 인어의 실체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인간들이었다. 게다가 인어들의 근거지까지 접근했으니 이대로 살려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모든 위험 요소는 없애는 것이 옳았다. 인어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과거의 비극이 언제 또다시 반복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가장 성가신 인간을 해치웠으니, 나머지 한 명은 손쉬우리라는 것이 인어들의 판단이었다. 희생을 감수하는 한이 있어도 기회를 놓쳐선 안 됐다.
마침내 숨죽이고 있던 인어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겸을 품에 끌어안은 채 그대로 눈을 감고 있는 윤태희는 일견 무방비해 보였다. 수면 위로 떠오른 은빛 날치 떼가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이내 하늘로 솟구친 은빛 날치 떼는 윤태희를 사방으로 포위했다. 마침내 윤태희를 향해 돌격하는 순간이었다.
재겸을 품에 안고 있던 윤태희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등 뒤로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상태였으나, 열어둔 감각을 통해서 머리보다 몸이 앞서 나간,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칼날처럼 사방을 파고들던 날치 떼는 귀기로 일으킨 돌풍에 의해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재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윤태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머나먼 바다를 바라보던 윤태희의 시선이 어디론가 옮겨 갔다. 멀지 않은 곳,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날치가 보였다. 날치가 뻐끔거리며 입을 벌렸다.
“그래, 너네가 죽였지.”
윤태희는 재겸의 심장을 꿰뚫고 나왔던 비수를 알아보았다.
“패현.”
윤태희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근처에서 굴러다니던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그것은 집을 나설 때 재겸과 함께 쓰고 왔던 우산이었다. 윤태희는 정반대로 뒤집혀 엉망이 된 우산을 성의 없이 발로 콱 짓밟더니, 이내 우산대를 우지끈 꺾어서 손에 쥐었다.
“검신(劍神)은 피를 받아 마셔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디선가 검은 연기가 솟아나더니 그대로 우산대 속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조악하기 짝이 없는 앙상한 우산대는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검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패현을 불러놓고도 조악한 우산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그 어떤 의욕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의는 없었다. 다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광기가 실려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눈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저, 저 바다에 있는 인어들을 전부 도륙을 내겠다는 광기 어린 욕구뿐이었다. 윤태희는 몸을 돌려 어둡고 사나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바닷속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인어들이 불러낸 수룡이었다.
수룡을 보고도 윤태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땅에 닿은 우산대를 질질 끌며, 수룡이 있는 바다를 정면에 두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윤태희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무언가가 섬광처럼 지나갔다.
“빠져 죽으러 가냐?”
윤태희가 저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췄을 때였다. 수룡의 이마 정중앙에 박힌 화살을 발견한 순간, 윤태희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삐걱거리듯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윤태희가 목도한 것은, 붉은 폭풍 속에 서 있는 재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