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혹시 다른 방법은 없어?”
재겸의 질문에, 소년이 잠시 눈을 굴렸다.
“뭐,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뭔데?”
“나한테 네 몸을 주는 거.”
재겸이 멈칫하며 소년을 응시했다.
“몸을 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재겸의 되물음에, 소년이 대답했다.
“내가 잠깐 너의 몸주(身主)가 될게.”
몸주. 재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럼 상처가 금방 나을 거야.”
몸주가 되어 낫게 해주겠다는 소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몸주란 흔히 인간의 몸에 들어앉은 신명(神明)을 가리키는데, 몸주는 그릇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마련이었다. 그 예로 오랫동안 병을 앓던 인간이 내림을 받으면 갑자기 병이 낫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바로 몸주가 지닌 원력(原力) 덕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강신(降神)한 인간의 몸은 서슬 퍼런 작두를 밟아도 다치지 않으며, 칼로 찔러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 이것은 신성의 영역이기에, 인간의 껍데기일지라도 그 안에는 신(神)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떠냐? 도와줘, 말아?”
소년이 올곧은 눈으로 재겸을 바라보며 물었다. 확실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재겸은 쉽사리 선택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은, 몸을 내준다는 것에 위기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눈앞의 소년은 악신(惡神)이었다.
“이유가 뭐야?”
재겸은 시큰둥한 태도를 가장하여 소년을 떠보았다.
“응? 뭐가?”
“왜 나를 도와주려는 거냐고.”
“도와주고 싶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왜 도와주고 싶은데?”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소년이 멀뚱한 눈을 했다.
“그야 나는 네 편이니까.”
단순하고도 명쾌한 대답에, 재겸의 표정이 살짝 기묘해졌다. 혹시나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소년의 낯을 꼼꼼히 뜯어 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정말로 진심인 듯했다.
소년은 자신의 그릇인 재겸에게 강한 호감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까 전에도 말했잖아. 네가 이곳에 들어온 이상, 네가 할 수 있는 건 여기서 나랑 영영 살거나 나랑 함께 나가는 거, 둘 중 하나야. 너랑 나는 떨어질 수 없어. 너는 너고 나는 나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야. 그러니까 도와준다고.”
소년이 심드렁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구 네가 봉인을 풀어줬잖어.”
재겸의 안에 봉인 당한 소년은 오랫동안 깊은 심연 속에 갇혀 있었다. 이곳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움직일 수 있도록 허락된 영역이라고는 이 작은 초가집과 마당이 전부였다. 그러나 재겸이 금줄을 끊고 봉인을 깨트림으로써 소년은 오랜 족쇄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원력을 행사하는 것은 봉인이 풀리지 않았을 때는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가능했다.
“도와줄 수 있으니 도와주는 거야. 싫음 말어.”
소년의 제안은 불순한 의도 없이 아이처럼 순수했다.
“네 몸을 낫게 해준 다음에 나는 뒤로 빠질게.”
잠시 갈등하던 재겸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소년이 혹여 꾀를 쓰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으나, 그건 아니라는 확신이 섰다. 사실은, 소년이 그러하듯이 재겸도 어쩔 수 없이 제 분신과 같은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소년이 재앙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내심 두려우면서도 경계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장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 없고, 윤태희는 바깥에 홀로 남겨진 위험한 상황이었다.
한시가 급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께름칙해 하는 기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며, 재겸이 물었다.
“조건이 있어야 해.”
“조건이라니?”
“몸의 주도권은 마음대로 넘겨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소년의 봉인이 풀리면서 현재 재겸의 몸 안에는 재겸과 소년, 두 개의 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 주도권을 가진 쪽은 재겸이었다. 그것은 재겸의 의식이 우위에 있음을 의미했다. 소년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힘이 많이 억눌려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몸의 주도권을 넘기려면 의식의 우위를 정해야 했는데, 소년은 현재 재겸보다 힘이 약한 데다가 재겸의 의식에 짓눌려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일종의 조건을 내걸어서 재겸에게 몸의 주도권을 건네받는, 거래를 이행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돼?”
“몸의 주도권을 넘겨준다는 조건을 걸고, 내기를 해야 해.”
“내기?”
“응. 이기는 쪽이 몸의 주도권을 가지는 거야.”
“그럼 내가 일부러 져 줘야 하는 거냐?”
“그렇지.”
“알겠어. 빨리 시작해.”
재겸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정말로 재겸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용할 수 있다면 최대한 이용하는 편이 좋았다. “으음, 내기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소년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을 했다. 그에 잠시 고민하던 재겸이 채근하듯 입을 열었다.
“야, 시간 없어. 팔씨름 어때?”
“오, 그래. 그거 좋겠다.”
소년이 반색하며 손뼉을 쳤다. 팔씨름이라면 일부러 져주는 것도 쉬울 테고, 무엇보다 빠르게 승부를 낼 수 있었다. 재겸과 소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맞잡았다.
“일부러 져야 한다는 거지?”
소년의 손을 잡고, 자세를 정비하던 재겸이 확인차 재차 물었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겸과 소년은 서로의 손을 꽉 붙든 채 얼마간 눈을 맞췄다.
소년이 눈짓으로 시작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재겸은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소년의 힘에 재겸의 팔이 넘어갔다. 손등이 툭, 땅에 가볍게 부딪혔다.
“이겼다.”
어디까지나 짜고 치는 상황일 뿐인데, 소년은 왜인지 들뜬 낯을 하고 있었다. 소년에게는 확실히 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왜 저렇게 기뻐하지? 감정이 솔직하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런 소년을 바라보는 재겸의 낯이 점차 기이해질 때였다. 소년이 말했다.
“네가 졌다고 소리 내서 말해봐.”
재겸은 일단 소년이 시키는 대로 했다.
“나는 너한테 졌어.”
그 순간, 소년이 갑자기 잡은 손에 으스러지게 악력을 주었다. 뼈가 부서질 것처럼 강한 힘이었다. 힘이 강해졌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재겸의 표정이 서서히 굳을 때였다.
“오냐, 내 너를 지켜주리라.”
소년이 맞잡은 재겸의 손을 확 당기더니, 낮게 말했다.
“이 세상에 흉화를 내려주마.”
그 이후로는 암흑이었다.
***
윤태희가 목도한 것은, 붉은 폭풍 속에서 활대를 들고 서 있는 재겸이었다.
“빠져 죽으러 가냐?”
재겸을 발견한 윤태희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두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은 광경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체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재겸은 어느새 제 발로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재겸의 두 눈은 흰자위뿐이었다. 번뜩이는 흰자위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광경은 몹시 섬뜩하고 기괴했다. 인간이라기보다 귀신에 가까워 보였다.
“너, 어떻게…….”
윤태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재겸의 몸 주위로 붉은색 귀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피가 엉겨 붙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나부끼며 부스스 솟아올랐다. 비수에 꿰뚫렸던 심장이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활을 꺼내느라 칼로 찢었던 팔의 상처 또한 마찬가지였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었던 상처가 메워지며 새 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주 기괴하면서도, 역겨운 광경이었다.
“저, 저게 무슨….”
그것은 인간이 아닌 인어들의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인어들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수룡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물리력이 통하지 않아야 했다. 공격을 당했어도 잠시 물로 변했다가 재생하여 원래대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붉은 귀기를 두른 화살에 이마 정중앙을 관통당한 수룡은, 한순간에 기화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룡을 불러낸 인어들의 주술 그 자체를 파훼한 것이었다.
붉은 귀기는 재겸의 몸에서 끝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욱한 귀기가 안개처럼 사방에 퍼져 나갔다. 살갗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사악하고,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그때였다. 재겸은 활대를 내팽개치며 윤태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하더니,
“너는 허튼짓 말고,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
그대로 윤태희의 곁을 지나치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뭐?”
윤태희는 눈을 크게 뜬 채 곁을 지나치는 재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대체 무얼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숨이 끊어졌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어 있던 재겸은 멀쩡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헛것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넋을 빼놓고 멍하니 서 있던 윤태희가 재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너 대체….”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이며, 곁을 지나친 재겸을 붙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재겸아.”
그런데, 어디에도 재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순식간에 어디론가 모습을 감춘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재겸아—!”
당황한 윤태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재겸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어디로 간 거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당황한 윤태희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온 사방에 해무처럼 짙게 낀 붉은 귀기로 인해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마침내 간신히 재겸의 기척을 잡아냈을 때, 윤태희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사라졌던 재겸은 놀랍게도 저 멀리 바다 위에, 해수면을 밟고 서 있었다. 그런데 재겸의 손에는 무언가 매달려 있다. 재겸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인어였다.
“저게 무슨…….”
윤태희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재겸이 한 손으로 인어의 목을 우악스레 움켜쥐고 있었다. 사냥당한 물고기처럼 하체를 버둥거리던 인어가 고통에 신음하며 재겸의 손목을 움켜쥐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커, 헉…….”
재겸의 손아귀에 잡힌 인어의 살갗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에 인어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축 늘어트렸다. 인어는 바싹 말린 미라처럼 변해 있었다. 검게 말라비틀어진 인어의 모습은 흉측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재겸은 손에 쥐고 있던 인어를 거리낌 없이 휙 내던졌다. 말라비틀어진 인어는 그대로 바닷속에 풍덩 빠졌다. 흡사 꺾은 나뭇가지를 내버리는 듯한 태연한 손길이었다.
그 순간, 윤태희는 알아차렸다.
‘저것’은 재겸이 아니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