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재겸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윤태희는 건조하게 부르튼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전화번호 목록을 뒤졌다. 왠지 마음이 초조해졌다. 언젠가 저장해 둔 정주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태희 씨?
통화 연결음이 두어 번 울리더니 금세 목소리가 들렸다. 다소 경황없는 듯한 음성에서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정주는 윤태희가 크게 다쳐 입원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네, 저예요.”
- 깨, 깨어나신 거예요?
그렇게 묻는 정주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재겸을 통해서 윤태희가 크게 다쳐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주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변장을 하고, 메산이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윤태희가 입원한 곳은 일반 병실과는 다른 곳이었기에 외부인의 면회가 제한되어 있었고, 나자로 보이는 듯한 이들이 자주 드나드는 것처럼 보였다. 자칫하다간 정주도 메산이도 정체를 들킬 우려가 있는 상황이었다. 정주는 하는 수 없이 병원 앞에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윤태희는 간단히 안부를 전했다. 상처는 많이 회복된 상태이며, 조만간 퇴원 예정이라는 소식이었다. 정주는 지금 병원에 들러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메산이에게 치유를 받게 해 주려는 생각에서였다. 윤태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정중한 말로 거절했다.
“계속 여기서 상태 지켜보고 있어서, 갑자기 확 나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정주는 힘없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 저기, 근데 태희 씨….
“네?”
-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셔서 아직 정신없으실 텐데,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네, 말씀하세요.”
- 섬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휴대폰을 쥐고 있던 윤태희의 손이 작게 멈칫했다. 정주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윤태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정주가 주저하며 말을 덧붙였다.
- 재겸이 말로는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가슴이 저릿했다.
“옆에 있으면 전화 바꿔 줄 수 있어요?”
- 아, 잠시만요.
잠시 목소리가 멀어졌다. 멀리서 작게 대화를 나누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 저기, 태희 씨. 재겸이가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는데……
그런데, 기다림 끝에 돌아온 것은 정주의 음성이었다.
재겸은 전화를 받는 대신 정주를 통해 용건을 전달했다. 그에 윤태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곁에 정주가 있는 상태에서는 섬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기도 했고, 윤태희 역시 직접 재겸과 만나서 얼굴을 보고 싶었다.
“네, 그럼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윤태희는 통화를 종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들어 와서 진통제를 놔 주고 갔다. 재겸을 기다리는 동안 윤태희는 약 기운에 취해 잠시 선잠에 빠졌다.
문 너머로 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윤태희가 입원한 병원은 재겸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병원이었다. 병상에 누워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윤태희는 문 너머의 기척을 느끼고 곧바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병실에 들어온 재겸은 문을 닫은 뒤, 윤태희를 향해 마주 보고 섰다. 평범하게 후드 티에 면바지를 입은 재겸은 손에 종이로 된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2주 만에 재회한 둘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입을 여나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혹은 서로의 존재가 믿기지 않는 것처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안녕.”
긴 침묵을 끊어 낸 것은 윤태희였다. 병상에 앉아 있던 윤태희는 읊조리는 듯한 말투로 조용히 인사를 건네자, 재겸은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2주 만에 만난 재겸은 생각 외로 꽤 침착해 보였으나, 한눈에 보기에도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기운도 다소 가라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꼭 시들어 있는 것 같았다.
“…….”
“…….”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어디서부터,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있었던 일은 서로에게 있어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둘의 대화는 잠시 빙빙 돌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정주가 차로 데려다줬어.”
“정주 씨도 같이 온 거야?”
“응.”
두 사람은 아무 일 없이 어제 헤어진 사람들처럼 말을 주고받았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충전하기 귀찮아서 냅뒀어.”
“그랬구나.”
대화가 끊겼다. 그때까지 문간에 서 있던 재겸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병실을 둘러 보았다. 병실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재겸은 한 번도 윤태희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가까이 와서 앉아도 되는데.”
재겸이 입을 다물고 서 있으니, 윤태희가 조용히 웃었다. 그에 재겸은 침대 근처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윤태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나례청에 출근 안 했다면서.”
재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
그런 재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윤태희는 어느 순간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재겸의 얼굴을 빼꼼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윤태희가 눈가를 슬쩍 구겼다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나 걱정했어?”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농담처럼 흘린 말이었다.
“……”
그러나 재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을 제대로 받아칠 수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응.’ 하고 자각 없이 대답을 꺼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목이 콱 막힌 것처럼, 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
윤태희가 손을 뻗어 재겸의 뺨을 감싸 쥐려고 할 때였다. 윤태희의 손이 닿기 전에, 재겸은 고개를 뒤로 슬쩍 뺐다. 재겸이 손길을 피하자, 윤태희의 손끝이 짧게 멈칫했다.
“…….”
윤태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허공에 머무르던 손끝이 잠시 까딱, 흔들렸다. 윤태희는 손을 거둬들였다. 미지근한 태도. 묘하게 달아나는 시선.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화났어?”
윤태희의 물음에, 재겸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 재겸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윤태희는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재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걸 귀신같이 눈치챈 듯했다.
“아니.”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짤막하게 대꾸하며 손에 든 종이봉투를 윤태희에게 내밀었다. 윤태희는 봉투를 받아 들고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안에는 커다란 보온병이 들어 있었다.
내용물을 들여다보던 윤태희가 “이게 뭐야?” 하며 고개를 들었다.
“메산이가 약 지어 줬어.”
“약?”
“응. 내상을 빨리 낫게 해 주는 약이랬어.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다 아물어도, 내상이 남아서 한동안 거동이 불편할 거야. 약 먹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래.”
재겸이 보온병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한 번에 다 마시면 전부 나을 거야. 적당히 티 나지 않게 나으려면 컵에 따라서 하루 세 번, 이틀 동안 마셔. 그리고 메산이가 퇴원하면 한번 들르래. 직접 치유해 주겠대.”
재겸의 설명이 끝나자, 윤태희가 조용히 물었다.
“나 뭐 잘못했니?”
지금까지의 대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영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눈을 들어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아니.”
재겸의 대답에, 윤태희가 곧바로 물었다.
“근데 왜 화가 났지?”
“화 안 났어.”
“아니, 너 지금 화내고 있는데.”
단언하듯 입을 연 윤태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왜? 나 죽을까 봐 화났어?”
재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
그 말을 들으니 신기하게도, 재겸은 정말 자신이 화가 났다는 걸 알았다.
“내가 네 말을 어기고 부적을 뱉어서, 그래서 그거 때문에….”
“그래, 화났어.”
윤태희의 말을 잘라낸 재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너한테 화난 게 아니라 나한테 화가 난 거야.”
“뭐?”
“너는 잘못한 거 없어. 전부 내 탓이니까.”
“재겸아.”
윤태희가 재겸의 손목을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다친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그냥 사고였어.”
“…….”
“네 안에 뭐가 있는 건진 모르겠는데, 거기에 씌어서….”
“그래, 맞아.”
그때, 재겸이 고개를 숙이며 윤태희의 말을 잘랐다.
“나는 뭐에 씌었던 거야…….”
조용한 중얼거림에, 윤태희가 작게 멈칫할 때였다.
“근데 그것도 결국은 내 잘못이지. 휩쓸린 건 나니까.”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설핏 눈가를 구기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너는 그런 일을 겪고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드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재겸이 윤태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도 눈이 있으니 알 거 아냐. 지금 네 꼴을 봐.”
재겸이 높낮이 없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영생환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내 저주는 인어랑 연관도 없었어. 그런데 넌 그 먼 섬에서까지 가서 죽을 뻔했어. 그런데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안 들어?”
뼈아픈 말이었으나, 윤태희는 미동조차 없이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내가 꼭 찾아낼게.”
윤태희의 말에, 재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내 먼 곳에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윤태희를 돌아보았다. 한층 날렵해 보이고 예민해 보이는 인상, 조금 마른 듯한 얼굴이 보였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윤태희에게 붙잡힌 손목을 비틀며, 재겸이 말했다.
“원래 약속한 대로 두 달 뒤에 죽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