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날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그렇다면, 네 손으로 날 죽여.”
적막이 내려앉은 병실에 남은 것은 시계 초침 굴러가는 소리뿐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윤태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겸은 자신의 양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윤태희가 창밖으로 천천히 시선을 던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2주는 확실히 길긴 길었어.”
윤태희가 작게 혼잣말을 내뱉자, 가만히 앉아서 시선을 내리고 있던 재겸이 눈을 들어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윤태희의 옆얼굴이 보였다. 사경을 헤매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에 측면으로 보이는 얼굴의 선이 한층 날렵해져 있었다.
“너무 오래 머리를 굴리게 놔뒀네, 내가…….”
곰곰이 말을 읊조리던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틀어 재겸을 응시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당장 죽다 살아난 환자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윤태희가 장난스레 낯을 구기며 애써 농담처럼 흘려보낼 때였다.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재겸이 고개를 푹 숙이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너랑 그 섬에 가는 게 아니었어…….”
그 섬에 가는 게 아니었다.
재겸은 윤태희가 사경을 헤매던 지난 2주 동안 그 생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거여도는 정말이지 이상하고 아름다운 섬이었다.
거여도에서 보낸 며칠은 재겸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만큼 빛나는 시간이었다. 윤태희와 함께 눈부신 바다를 바라보던 순간을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후회는 추억의 목을 조른다.
재겸은 거여도의 절벽에서 보았던 달맞이꽃밭과 저녁노을이 번지던 넓은 바다를 기억했다. 살아서 이보다 눈부신 광경을 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섬에는 세상의 악의가 숨겨져 있었다. 악의는 뱀처럼 똬리를 튼 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내 아가리를 벌리고 둘을 집어삼켰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윤태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재겸은, 얼굴에 퍼붓는 비를 맞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이렇게 악의적일 수는 없는 거라고.
재겸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신지혜가 인어에게 붙잡혀서. 인간에게 앙심을 품은 인어들이 습격해서. 결계를 쓴 땅은 사실 귀수산이었는데 그걸 미리 알아차리지 못해서. 그래서 결계가 깨져버려서. 땅이 갈라져서. 윤태희가 경고를 어기고 나를 구하려고 해서. 수액막이 부적이 깨져서. 내 안에 재앙신이 있어서. 재앙신에게 섣불리 몸을 내어줘서. 결국은 또 묘정 때문에? 아니, 메산이의 약수를 먹어버려서…….
생각이 엉망으로 뒤엉켰으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로 인해서 생겨난 일이 아니었다. 톱니바퀴처럼 모든 일이 맞물려 있었다. 하필이면 이 머나먼 외딴 섬에서 인어들의 공격을 받았고 재앙신을 깨웠으며 윤태희가 크게 다쳤다. 이 모든 것이 꼭 누가 짜 맞춘 것처럼 악의적이었다.
재겸은 결국 이 섬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윤태희가 사경을 헤맨 지난 2주간,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 틀어박힌 재겸은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하루하루를 뼈저리게 후회해야만 했다. 섬에 가지 말았어야 한다는 자책은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후회가 지닌 성질 중 하나는 곰팡이처럼 퍼져나간다는 점이다. 지나온 날들을 거슬러 올라가 찬란하고 빛나는 순간을 한순간에 퇴색시키고, 그때의 감정을 없던 것으로 만든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을 하나씩 소거하고 소거하다 보면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야 할 ‘나’가 남는다.
후회란 그런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결국 그 가운데서 무엇 하나 돌이킬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그리고 재겸은 이런 상황에서 너무나 손쉽게 ‘죽음을 떠올리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섬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는 곧 자신의 생(生)을 후회하는 일이 되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윤태희가 저를 좋아해서, 저주를 풀기 위해 일어난 일이었다. 재겸이 ‘죽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동안 재겸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한편으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불로불사의 저주를 끊어낼 수 있다면, 그래서 윤태희가 말한 대로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늙어 죽을 수 있다면,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재겸이 상상한 미래는 막연히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재겸은 처음으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느꼈다. 재겸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가 평범한 세계에서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불로불사인 재겸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길을 걷다가 꺾은 나뭇가지를 강철로 제련한 검처럼 만들 수 있고, 비마를 불러내 하늘을 날 수 있다. 그 어떤 상처라도 메산이의 도움을 받으면 씻은 듯이 낫는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재겸의 세계에서는 충분히 가능했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재겸에겐 확실히 위기감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계기는 죽어가는 윤태희를 마주했을 때였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윤태희를 앞에 두고 재겸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재겸은 그제야 자신이 지나치게 안일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통렬한 깨달음이었다.
머나먼 외딴 섬, 재겸에게는 죽어가는 윤태희를 살려낼 방법이 없었다.
퍼붓는 빗속에서 재겸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인지 깨달았다. 재겸은 윤태희의 목패를 되찾아 윤태희에게 이름을 돌려줄 수는 있을지언정 윤태희를 살려낼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재겸은 생각했다.
이대로 윤태희가 죽는다면?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둔했던 정신에 찬물을 끼얹은 느낌이었다.
마음이 빈곤한 사람은 무언가를 손에 쥐게 되면 그것을 잃었을 때를 생각한다. 재겸이 바로 그러했다. 만남부터 이별을 떠올리고, 헤어질 날을 미리 생각하며 이별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영원을 사는 재겸에게는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재겸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빈곤한 사람이었다.
빈곤한 마음이라는 것은 밑이 깨진 항아리와도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종국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재겸은 마음이 아주 가난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내어줄 마음이 없었다.
재겸은 언제나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살아온 세월 동안 크고 작은 이별이 있었고, 언제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입장이었던 재겸은 습관적으로 혼자만 남아 있는 삶을 상상했다.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재겸은 아무도 모르게 이별을 겁냈다. 메산이와 정주에게 완전히 마음을 연 것도 얼마 전의 일이었다.
이별의 공포를 회피하다가 결국은 정면으로 마주한 끝에야 재겸은 비로소 다가오지 않은 이별에 의연해질 수 있었다. 훗날 떠나보내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아파하지 않고 웃으며 환송하겠다고. 그러나 윤태희와의 이별은 달랐다.
재겸은 윤태희가 없는 삶을 상상하는 데 실패했다. 윤태희가 떠나고 저 혼자 남겨진다는 상상을 한 순간, 암흑이었다. 재겸은 어린아이처럼 겁에 질렸다.
언젠가 만약 모든 일이 잘 풀려서 불사의 저주를 끊어 낼 방법을 찾아낸다면, 어쩌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저주를 벗고 남들처럼 죽을 수 있는 몸이 된다면, 그 후로는 더 이상 지금처럼 윤태희를 지킬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언제 또 이번처럼 습격받거나 위험에 처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언젠가는 윤태희가 또다시 위험에 처할 날이 올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잠잠하긴 했으나 재앙신의 봉인을 풀었으니 언제 또다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재앙신에게 씌어 또다시 윤태희를 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두려웠다.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남겨지기 전에, 먼저 떠나는 것.
황무지나 다름없던 재겸의 삶에 어느 날인가 가녀린 새싹 하나가 피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볕이 들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금방 시들 줄 알았던 새싹은 어느덧 울창한 숲이 되어 있었다. 그 숲에서는 향기가 났다. 폐허와도 같던 이 허름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일구어낸 것은 무엇인가.
재겸은 윤태희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윤태희와 함께 밥을 먹고, 윤태희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농담을 주고받던 그 사소한 순간이 모여서 울창한 숲이 생겼음을 알고 있었다.
재겸은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그 숲을 사랑했다. 사랑하기에 전부 태우기로 했다.
그렇게 재겸은 스스로의 마음을 전부 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