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36)화 (236/348)

#236

윤태희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 야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병실 안은 쥐죽은 듯 적막했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흩어져 있던 바닥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주삿바늘을 마구잡이로 잡아 빼는 바람에 피가 새던 손목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재겸이 병실을 떠나고, 어느덧 밤이 깊었다.

병실에 간호사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혈압을 검사하러 왔던 간호사는 난장판이 된 병실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고, ’무슨 일이에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에 재겸은 일언반구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윤태희의 멱살을 풀더니,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갔다.

2주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날 선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모질게 몰아붙였다. 그게 끝이었다. 재겸이 떠난 뒤, 병실에 홀로 남은 윤태희가 한 일이라고는 지금처럼 이렇게 멍하니 앉아서 창밖을 바라본 것뿐이었다. 윤태희는 몇 시간 째 미동조차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사이, 날이 저물고 곳곳에 어둠이 깔렸다. 재겸이 다녀갔다는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윤태희는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재겸의 번호를 누르고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자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낮에는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으나, 지금은 제대로 신호가 가고 있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지루할 정도로 신호가 길게 이어졌으나 재겸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낮에는 전원이 꺼져 있었으므로 전화를 받지 못했던 것이라면, 지금은 명백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

윤태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병상에 몸을 기댔다.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윤태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밤이었으나 윤태희는 지금 이 순간 지독하게 외로웠다.

***

“수석님!”

다음 날 아침, 조용하던 병실이 수선스러웠다. 석주련으로부터 윤태희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팀원들이 죽을 사 들고 병문안을 온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팀원들은 하나같이 침중한 얼굴이었다. 윤태희가 없었던 지난 2주 동안 사무실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무사히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무거운 기류 속에서, 윤태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다행인데. 왜 다들 죽상이에요?”

고준형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고, 강이빈과 표지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팀원들은 윤태희가 깨어났음에 안도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는 못했다. 팀원들은 석주련이 꾸며낸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있었다. 재겸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윤태희가 다쳤다는 내용이었다. 팀에서 일어난 사고였기에 팀원들도 심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수석님도 곧 오시겠다고 했어요.”

“영신이?”

“네.”

“지금 당장 퇴원할 거니까 오지 말라고 해요.”

윤태희가 눈썹을 삐죽이며 장난기 섞인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팀원들 사이에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잔뜩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졌다. 팀원들은 윤 수석이 없는 동안 나례청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건넸고,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았다.

“재겸이랑은 연락되세요? 계속 휴대폰이 꺼져 있던데….”

그리고 모두가 피하던 화제를 꺼낸 것은 강이빈이었다. 윤태희가 병원에 실려 온 그날 이후로 재겸은 나례청에 출근하지 않았고,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현재 제일 힘든 사람은 재겸일 것이다. 마음고생이 심하리라는 것쯤은 불보듯 훤했다. 그날 당일에는 팀원들 역시 경황이 없었던 데다 당혹스러운 상태였기에 미처 재겸을 챙기지 못했다. 그에 하루가 지나서야 뒤늦게 재겸에게 연락을 시도해 보았으나, 재겸은 팀원들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뭐…….”

잠시 말을 흐리던 윤태희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많이 놀랐을 거예요. 당분간 쉬게 내버려 둬요.”

“그래도 어떻게든 연락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강이빈이 주저하는 기색으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수석님 깨어난 거 알면 기운도 차릴 거고, 기뻐할 거예요.”

이어진 말에, 윤태희의 입꼬리가 소리 없이 휘어졌다.

“글쎄, 별로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들릴 듯 말 듯 한 중얼거림에, 강이빈이 “네?” 하고 되물었다.

“아니에요.”

윤태희는 피식 웃으며 “재겸이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할게요.” 하고 대꾸했다.

2주 만에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윤태희는 어쩌면 재겸이 마음 한구석을 보여 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자신이 깨어난 것에 반가워하든, 안도하든, 아니면 걱정을 했든… 적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재겸은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았다. 재겸이 떠나고 남은 것은 피범벅이 된 손목과 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뿐이었다.

“수석님, 입맛 없으실 텐데 밖에서 죽 사 왔어요.”

그때, 표지호가 포장해온 죽을 건넸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근무 시간에 잠시 들른 것이기 때문에, 팀원들은 다시 본청으로 복귀해야 했다.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팀원들은 자리를 떴다. 그렇게 병실에 혼자 남은 윤태희는 종이봉투에서 죽을 꺼냈다. 일회용 포장 용기에 담긴 죽은 아직 식지 않아서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죽이 담긴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

새삼, 생각할수록 윤태희는 그저 이 상황이 우습기만 했다.

나례청을 무너트리기 위해 살아온 윤태희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낸 것은 그 복수의 대상인 나례청이며, 윤태희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 또한 나례청 사람들이라는 게 역설적이었다. 지금 당장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사람은 정작 이곳에 없고, 영영 이 곁을 떠나겠다고 한다.

윤태희를 절망하게 만든 건 돌파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끝을 이야기하는 소년을 어떻게 막아서야 하는지, 이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황이 훨씬 더 안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윤태희가 걷는 이 길은 악화일로(惡化一路)였다.

윤태희는 팀원들이 사다 준 죽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수저를 내려놓았다.

다시 생각해야 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이렇게 감정에 매몰되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윤태희는 눈을 감았다.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차근차근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윤태희는 이를 데 없이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윤태희는 팀원들이 포장해 온 죽을 입에 대지도 않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쏟아부었다.

***

축역부장실, 석주련은 서류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퇴근하고 병원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본청으로 출근했던 석주련은 약속과 달리 그날 저녁에 윤태희를 만나러 가지 못했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2주 동안 석주련은 의식이 없는 윤태희를 들여다보느라 평소보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일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이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콧대에 안경을 걸치고 서류를 검토하던 석주련이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허락도 없이 발을 들였다.

“너….”

불청객을 확인한 석주련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병원에 있어야 할 윤태희가 검은색 슈트를 입고 서 있었다. 윤태희는 평소 몸에 딱 맞게 슈트를 입는 편이었으나, 병원에 있는 동안 살짝 야윈 탓인지 묘하게 각이 느슨해 보였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윤태희가 태평하게 받아쳤다.

“왜긴요, 퇴원했죠.”

“갑자기 무슨 퇴원이야?”

예정보다 훨씬 이른 퇴원에, 석주련의 눈매가 매서워질 때였다.

“퇴원해도 된대서 퇴원한 거니까 그렇게 살 떨리게 쳐다보지 마세요.”

수술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기 때문에 윤태희는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상태였다. 정화부의 약수로 치유력을 증폭시킨 덕분에 다쳤던 상처는 거지는 아물어 있었다. 단,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귀기로 생긴 내상이 크다는 점이었다. 확실히 귀기로 인한 내상은 잘 낫지 않으므로 조금 더 안정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어차피 윤태희에게는 메산이가 준 약수가 있었다.

“언제 퇴원한 거야?”

석주련의 물음에,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던 윤태희가 손목을 들어 올렸다. 손목시계를 쩔그럭대며 시간을 확인한 윤태희는 “두 시간 됐네요.” 하고 태연자약한 얼굴로 대답했다.

“최소 일주일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

“그 안정을 꼭 병원에서만 취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천연덕스러운 대꾸와 함께 윤태희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퇴원했으면 집에나 갈 것이지, 여긴 왜 왔어?”

“부장님 보고 싶어서 왔죠.”

시시껄렁한 말이 이어지자 결국 석주련이 낯을 굳혔다.

“윤태희.”

낮게 쏘아붙이는 말에, 윤태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부장님.”

무감한 얼굴로 석주련을 빤히 들여다보던 윤태희가 말했다.

“저 일 그만둘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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