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37)화 (237/348)

#237

“저 일 그만둘까 봐요.”

석주련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

전혀 생각지 못한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석주련은 별다른 동요 없이 윤태희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일견 무감해 보이는 낯이었으나, 윤태희는 방금 자신이 꺼낸 이야기 탓에 석주련이 적잖게 놀란 상태임을 알아차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죠.”

윤태희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말을 늘이는가 싶더니,

“나자 때려치울까 싶어요.”

자신이 앉은 소파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잠시 말이 없던 석주련은 어느 순간, 쓰고 있던 안경을 벗는가 싶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석주련이 서류 위에 안경을 툭 내려놓으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자 일을 그만두겠다?”

“네.”

깔끔하고 명료한 즉답에, 석주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는?”

“저번에 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귀신이고 뭐고 다 지긋지긋하다고….”

“…….”

“저도 그래요.”

소파 등받이에 목을 꺾듯이 기댄 윤태희가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이며 석주련을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 있을까 싶어서요.”

여상한 투로 대꾸한 윤태희는 힘을 빼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로 소파에 퍼질러 앉은 윤태희는, 제 배 위에 놓인 넥타이 자락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입에 담은 사안에 비해서 윤태희의 자세는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석주련이 조용히 물었다.

“글쎄요….”

소파에 구겨져 앉아 있던 윤태희가 피식 웃는가 싶더니, 이내 앞에 놓인 소파 테이블 위에 구둣발을 올렸다. 다소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석주련은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죽다 살아나면 딴사람이 된다는데, 저도 그런가 봐요.”

마치 남 얘기를 하는 것처럼 건성으로 대답한 윤태희는 다리를 펴고 한쪽 발목에 다른 쪽 발목을 겹쳐 올렸다. 윤태희는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괴더니, 농담하듯 능청스레 물었다.

“그래서, 사표 쓰면 받아 주실래요?”

장난기를 섞어서 가볍게 던진 말이었으나, 윤태희의 시선은 석주련의 반응을 낱낱이 관찰하고 있었다. 석주련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윤태희가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저 저를 떠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어려운 질문이었다. 윤태희는 지난 십 년간 나례청을 그만두겠다는 식의 말을 우스운 농담으로라도 한 적이 없었다.

“…….”

석주련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깊은 적막이 흘렀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석주련이 만년필을 손에 쥐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마음대로 해.”

숨이 막힐 정도로 길게 이어지던 정적을 깨고, 석주련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에 대답을 기다리며 실없이 넥타이 자락을 굴리고 있던 윤태희의 손끝이 멈칫했다.

“사표 내면 받아 주실 거예요?”

“그래.”

석주련은 윤태희를 붙잡지 않았다.

“…….”

윤태희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석주련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눈썹 끝을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에 석주련은 왜 웃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일 그만둔다고 하면 지구 끝까지 쫓아오시는 분 아니었어요?”

“지구 끝까지 쫓아가도 놓칠 게 뻔할 놈을 뭐하러 따라가?”

윤태희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받아쳤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절 쉽게 포기하실 줄은 몰랐는데.”

석주련은 검토를 하다 만 서류를 다시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네 인생이야.”

버석한 대꾸에 윤태희의 눈매가 미세하게 가늘어질 때였다.

“귀신이고 나례청이고 전부 잊고, 영영 무관하게 살아.”

무심하게 덧붙인 말에, 마침내 윤태희의 표정이 기묘하게 굳었다.

“…….”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석주련은 정말 진심이었다. 석주련은 윤태희가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석주련은 무감한 낯으로 다시 돋보기안경을 썼다. 결재 서류에 하다만 사인을 했다. 조용한 와중에 펜촉이 종이에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전부 잊고 영영 무관하게 살라.

석주련이 지나가듯이 흘린 그 말은 퍽 이상하게 들렸다. 얼핏 듣기에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는 듯한 말이었으나, 윤태희는 그 말이 쇠고랑처럼 마음에 걸렸다. 마치 무언가를 잊어야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동시에 그것을 잊기를 바라며 꺼낸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석주련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저에게 건넨 말이었다.

윤태희가 아는 한, 석주련은 저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석주련은 언젠가 윤태희가 후임을 찾기 위해 두 달 동안 휴가를 냈을 때도 절친한 사이인 이영신을 시켜 하루빨리 복직하라는 의사를 전달할 정도였다. 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윤태희에게 지부장이 될 것을 권유하며 축역부장으로 추천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랬던 석주련은 윤태희를 흔쾌히 놓아주려고 하고 있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희뿌연 위화감이 점점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윤태희는 걸레 빤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더러워졌다.

“…….”

윤태희는 웃음기를 거두고 석주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업무를 재개한 석주련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윤태희의 시선을 느꼈을 법한데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왜, 더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석주련이 서류를 넘기며 고저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요?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세요?”

윤태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석주련에게 질문을 그대로 되돌렸다.

“…….”

그제야 석주련이 고개를 들었다. 둘은 말없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서로의 틈을 찾으며 그 안에 숨겨진 저의를 가늠하려는 것처럼. 둘의 대화는 끊어졌다가 이어지길 반복하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 속에서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석주련이었다.

“그만두겠다는 결심이 확실하게 서면 그때 다시 얘기하는 걸로 하지.”

소파에 늘어져 있던 윤태희는 몸을 일으켰다. 석주련이 앉은 데스크 앞에 선 윤태희는 서류가 쌓인 데스크 위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데스크를 구경하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윤태희가 방금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재겸이는 며칠 더 쉬라고 했어요.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데 그날 사고는 방심한 제 탓도 크고, 일부러 다치게 하려고 한 건 아닐 테니, 너무 뭐라고 하진 마세요.”

일부러 그날 일을 언급한 윤태희는 석주련의 반응을 주시했다.

“그 아이와는 만났나?”

“네, 만났죠.”

석주련은 별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윤태희가 던진 미끼는 별다른 수확 없이 떠내려가는 듯했다. 결재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던 석주련이 어느 순간 입을 달싹였다.

“그런데, 혹시 그 아이…….”

석주련은 운을 띄워놓고 얼마간 생각에 잠겼다가,

“아니, 아니야.”

그대로 말을 회수했다.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됐으니까 가 봐.”

석주련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 차는 지하 종묘 주차장에 옮겨놨으니 가져가도록 해.”

석주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윤태희는 이로써 유효한 대화는 끝이 났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지금 석주련이 도망침으로써 심증을 얻었다.

“…….”

마침내 윤태희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부장님은 알고 계셨군요.”

주어도 목적어도 없지만, 핵심을 겨냥하는 말이었다.

“무얼 말이지?”

무엇이든.

그게 무엇이든, 지금 당장은 석주련이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했다.

노련한 석주련은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윤태희의 눈동자는 서류 위에서 움직이던 만년필이 멈칫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뭐긴요.”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윤태희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빼더니 데스크 가장자리를 짚었다. 석주련을 향해서 천천히 상체를 숙이자, 석주련이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윤태희는 데스크를 짚은 상태에서 석주련의 관자놀이 근처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제 차 번호 말이에요.”

놀라울 정도로 싱거운 대꾸였다. 이로써 방금 전 윤태희가 한 질문은 별다른 의미 없는 질문이 되었다. 그러나 석주련은 천천히 고개를 틀어 윤태희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윤태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석주련의 낯이 기이하게 굳었다.

동시에 윤태희가 굽혔던 허리를 훌쩍 일으켜 세웠다. 윤태희는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려 축역부장실을 빠져나갔다.

석주련은 방금 전, 윤태희의 눈동자에서 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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