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윤태희의 병문안을 다녀온 이후로 재겸은 어느 정도 일상을 회복했다.
윤태희가 사경을 헤매던 지난 2주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지냈던 재겸은 윤태희가 입원한 병원에 다녀온 그 이튿날부터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고, 잠에서 깨어나면 세수를 했으며, 거실에 나와서 TV를 보기도 했다. 여전히 출근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가끔 마당을 산책하기도 했다.
그렇게 재겸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랬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또, 웃는 일이 없었다. 예전에도 잘 웃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예 웃음이 없는 편은 아니었던 재겸은 그날 이후 웃음을 완전히 잃었다.
그에 정주와 메산이는 점점 형용할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학교에 다니기 전,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되돌아간 듯했다. 그때의 재겸은 모든 일에 무관심했으며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정주와 메산이에게 있어 오히려 익숙한 쪽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고 나례청에 출근하며 제법 힘있게 일상을 살았던 재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정주와 메산이도 덩달아 기운을 잃었다.
지금의 재겸은 마치 살아 있지만 동시에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재겸아, 전화 오는데.”
그 사이, 재겸의 휴대폰으로 몇 번이고 전화가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정주는 재겸에게 휴대폰을 건넸으나 재겸은 발신인이 누군지 확인만 하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발신인은 나례청 사람들일 때도 있었고, 윤태희일 때도 있었다.
“태희 씨잖아, 전화 안 받아도 돼?”
재겸에게 휴대폰을 건네다 발신인을 훔쳐본 정주가 말했다.
“응. 내버려 둬.”
재겸은 윤태희의 이름이 떠 있는 액정을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병문안을 다녀온 이후로 윤태희를 대하는 재겸의 태도는 눈에 띄게 차가워져 있었다.
“…….”
정주는 그저 이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재겸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고, 나례청에는 왜 출근하지 않는지, 어째서 윤태희의 연락을 피하는 것인지 재겸은 정주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태희 씨랑 싸웠어?”
“아니, 안 싸웠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싸웠다면 싸운 거였다. 하지만 재겸은 자신과 윤태희 사이에 있었던 일을 그저 ‘싸웠다’라는 말로 치부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재겸은 자신과 윤태희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문 부수고 들어가서 전부 다 말할까?]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도착한 문자가 있었다.
재겸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윤태희는 어떻게 해야 재겸을 불러낼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재겸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대문을 열었다.
“안녕.”
차에 타고 있던 윤태희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타.”
윤태희의 태연한 권유에, 재겸은 입을 다물었다.
“…….”
재겸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꾹 억누르며 차분히 물었다.
“왜?”
“할 말 있으니까.”
재겸이 곧바로 받아쳤다.
“약속은?”
당장 불쾌한 본론을 끄집어내자, 이번엔 윤태희가 입을 다물었다. 윤태희가 싸늘한 눈으로 재겸을 응시했다. 윤태희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재겸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얘기 아니면 나는 너랑 할 말 없어.”
“그 얘기 아니더라도 나는 너랑 할 말 있으니까 그냥 좀, 타요.”
윤태희가 이골이 난 표정으로 앞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말해.”
흔들림 없는 태도에,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재겸을 바라보고 있던 윤태희가 갑자기 두 눈을 꾹 감았다.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다 누가 들으면?”
윤태희의 말에 재겸은 무심한 표정으로 좌우를 살펴보았다. 주변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확인을 끝낸 재겸이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어차피 지금 아무도 없잖아.”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 속에서 재겸과 윤태희는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삐딱한 시선으로 재겸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
윤태희는 얼마간 말이 없었다. 그저 핸들을 손에 쥔 채 무표정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렇게 잠시 앞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갑자기 클랙슨을 눌렀다.
빠아앙—…
난데없는 클랙슨 소리에 재겸의 어깨가 흠칫했다.
“뭐 하는 거야.”
클랙슨 소리가 길게 이어지며 텅 빈 골목을 가득 메웠다. 순간 당황했던 재겸이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았다가, 이내 윤태희를 향해서 험악하게 뇌까렸다.
“너 미쳤어?”
“아니, 아직.”
여전히 정면을 바라본 상태에서, 윤태희가 무감한 낯으로 태연히 대꾸했다.
“그만해.”
이곳은 골목 주택가였다. 클랙슨을 누른 상태로 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여기저기서 드르륵, 창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생떼를 부리는 건 반칙이었다. 윤태희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막무가내로 구는 행동에 뭐라 더 쏘아붙일 겨를이 없었다.
결국, 재겸은 윤태희의 차에 올라탔다. 와중에 재겸이 탄 자리는 조수석이 아니라 뒷좌석이었다. 보란 듯이 거리를 두는 행동에 윤태희는 기분이 잡쳤다. 뒷좌석에 탄 재겸이 화풀이를 하듯이 차 문을 쾅, 닫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어디 가, 당장 차 세워.”
어디를 간다는 얘기는 없었다. 갑자기 차가 움직이자 재겸이 백미러에 비치는 윤태희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태희는 묵묵부답이었다.
“윤태희. 차 세우라고 했어.”
“…….”
“문 열기 전에 차 세우라고.”
그 말과 동시에 뒷좌석 문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운전 중이던 윤태희가 컨트롤러로 뒷좌석 문을 잠근 것이었다. 재겸이 한발 늦게 뒷좌석 문고리에 손을 갖다 댔으나, 잠금장치가 걸린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
재겸은 점점 화가 났다.
“차 세우라고, 이 씨발새끼야.”
재겸은 백미러로 윤태희를 노려볼 때였다. 윤태희가 손을 뻗더니 갑자기 음악을 틀었다. 볼륨을 얼마나 크게 틀었는지 발밑이 쿵쿵 울릴 정도였다.
“…….”
이로써 머리끝까지 화가 난 재겸은 눈을 꾹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완벽한 무시였다.
윤태희와 처음 손을 잡았던 그 목적과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앞으로 윤태희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윤태희가 약속을 지키겠다고 직접 확답을 주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이대로 윤태희가 영영 약속을 지키겠다는 믿음을 주지 않는다면, 재겸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재겸의 결심은 한순간에 우스워지고 말았다.
제멋대로 구는 윤태희 때문이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한때 윤태희를 상대할 때면 이렇게 지는 기분이 들곤 했었다. 결국, 재겸은 차가 멈출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한참이 지나서야 차가 멈췄다. 차를 세운 윤태희가 시동을 끄자, 시끄럽던 음악도 꺼졌다.
차 안을 꽝꽝 울리던 음악이 꺼지자 적막이 찾아왔다.
윤태희는 안전벨트를 풀더니, 일언반구 없이 차에서 훌쩍 내렸다. 그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밖을 보았다. 차창을 내다보았더니 잔잔한 호수와 저녁 해가 보였다. 윤태희가 데려온 이곳은 서울 외곽에 있는 인적 드문 둔치였다.
재겸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아까와는 달리 손쉽게 문이 열렸다. 윤태희를 뒤따라 차에서 내린 재겸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넓은 공터처럼 펼쳐진 장소에는 벤치와 자판기뿐이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구석이라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재겸의 집까지는 차가 없으면 돌아갈 수 없는 거리였다. 자리를 피할 수 없도록 일부러 이런 곳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에 재겸의 눈동자가 점점 싸늘해졌다.
윤태희는 차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재겸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윤태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윤태희가 몸을 틀어 재겸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담배를 꺼내서 입에 한 대 꺼내 물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윤태희가 입에 문 담배를 까딱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은 고개를 숙이며 옅게 숨을 내쉬었다.
“윤태희.”
고개를 숙인 채 두 눈을 감고 있던 재겸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 이딴 식으로 제멋대로 구는 거 오늘이 마지막이야.”
윤태희는 재겸의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라이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 번만 더 정주랑 메산이 걸고넘어지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둬.”
재겸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뱉었다. 뒤이어 흘러나온 말에,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윤태희가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멈칫하는가 싶더니 피식 웃었다.
“재겸아.”
윤태희가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그대로 손에 쥐고 꺾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벌벌 떨지 마. 그럼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윤태희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누구한테 말끝마다 죽여달란 소리나 듣는데, 내가 그러면 왜 안 돼?”
싸늘한 비아냥이었다. 그에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재겸은 무표정한 얼굴로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먼 곳으로 한 번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퍼억—
윤태희에게 주먹을 날렸다. 불시에 얻어맞은 윤태희의 상체가 거세게 휘청였다. 윤태희가 옆으로 밀려나듯 두어 발자국 움직였다.
“…….”
손에 쥐고 있던 라이터가 튕겨 나가며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먹의 반동으로 비틀거리던 윤태희가 작게 기침을 뱉었다. 윤태희는 고개가 측면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천천히 손을 들더니, 손바닥으로 제 하관을 틀어쥐었다. 입안이 터져서 피가 줄줄 샜다.
방금 전, 재겸의 주먹에는 귀기가 실려 있었다.
재겸은 윤태희가 사서 선생이었던 때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일부러 귀기를 실어서 윤태희를 때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윤태희는 재겸이 지금까지 자신을 봐주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윤태희는 지금 이 순간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었다.
“……그래.”
손바닥을 펼쳐 자신의 피를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피식 웃었다.
“역시 우린 이런 게 어울려, 그치?”
윤태희는 입에 고인 피를 퉤, 하고 짧게 뱉는가 싶더니,
“근데, 재겸아.”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훔치며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렇게 정 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굴지 마. 기분 개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