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네가 남겨지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재겸이 붉어진 눈시울로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나 너한테 관심 없어.”
그 순간, 윤태희의 눈가 한쪽이 짧게 경련했다.
“…….”
윤태희는 재겸이 일부러 모질게 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를 밀어내려고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지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윤태희가 물었다.
“그럼, 그때 그건 뭐였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키스를 피하지 않았던 것, 먼저 키스를 해주었던 것, 네 꿈을 꾸었다는 것, 사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를 궁금해했다는 것, 맞닿은 어깨를 피하지 않은 것, 다음에도 같이 섬에 오자고 말했던 것. 윤태희가 ‘그것’이라고 뭉뚱그려서 말한 모든 순간은 사랑의 혐의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겸은 제 마음속에 있던 울창하던 숲이 그저 신기루이기를 바랐다. 그 숲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재겸은 잿더미가 그 숲을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고 스스로를 속이기로 했다. 재겸은 쥐도 새도 모르게 제 마음을 죽였다.
“네 같잖은 사랑 놀음에 장단 좀 맞춰준 것뿐이야.”
윤태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어쩐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윤태희는 어쩌면 재겸이 저로 인해 조금 더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그게 다야?”
“그게 다야.”
내내 말이 없던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어?”
조용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재겸이 멈칫했다.
“나한테,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어?”
흔들렸다.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
그러나 재겸은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죽음보다 더 바라는 건 없어.”
재겸에게 있어 ‘내일’이란 매일 반복되는 오늘의 연속이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언제나 지겹고 고루한 것이었을 뿐, 두렵거나 무서웠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재겸은 저를 집어삼킨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재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 아니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질문에서 살짝 빗겨나간 대답이었으나, 윤태희를 상처 입히기엔 충분한 대답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태희가 마침내 붙잡고 있던 재겸의 손목을 스르르 놓았다.
“…그거 알아?”
윤태희가 눈동자를 들어 재겸을 바라보았다.
“나 비참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몰랐어.”
윤태희가 천천히 손을 들더니 재겸의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에 재겸이 멈칫하며 상체를 뒤로 물렸으나, 윤태희는 재겸의 뺨에 손을 얹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근데, 이젠 알겠어. 왜냐면 내가 지금 그래.”
재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윤태희를 바라보기만 했다.
“널 만나고 나서 비참하다는 게 뭔지 알았어.”
재겸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들키기 전에, 재겸은 등을 돌렸다. 윤태희를 이곳에 홀로 남겨둔 채 재겸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윤태희는 끝내 재겸을 붙잡지 못했다.
호수 위로 노을이 졌다. 윤태희는 멀어져가는 재겸의 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발치에 길게 그늘진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허름하게 버려진 사랑이 발치를 뒹굴고 있었다.
시들어가는 해질녘 하늘을 등에 업은 채, 윤태희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
산속 깊은 곳에 자리한 누각은 오늘따라 소란스러웠다.
오늘은 손님을 받는 날이었다. 손님을 받는 날이라는 것은 대개 단주가 오는 날이라는 뜻이다. 건넛방에는 이미 손님이 와 있었으나, 단주는 아직 오직 않은 상태였다.
패현은 단주를 기다리느라 단주가 주로 머무는 공간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책장에 쌓인 먼지를 닦으며 인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슬슬 단주가 올 시간이었다.
머지않아 문이 벌컥 열리며, 볼캡을 쓴 단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주님, 오셨습니까.”
책장 뒤에 서 있던 패현이 나와서 배알을 했다.
“안녕.”
단주를 본 패현이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단주님… 얼굴이….”
병원 신세를 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단주의 얼굴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멍이 올라온 탓에 전체적으로 얼룩덜룩한 것은 물론, 여기저기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단주가 털썩 의자에 앉았다. 그에 패현이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고 했으나 단주는 “창문 좀 열어줄래?” 하며 패현의 질문을 그대로 잘라내 버렸다.
그에 패현은 조용히 단주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오늘따라 단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기보다는, 어딘지 쓸쓸해 보이면서도 우울해 보였다.
그때, 복도를 방방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단주가 왔다는 사실을 알고 누군가가 한달음에 달려오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언니야!” 소리와 함께 문을 벌컥 열렸다.
문이 활짝 열리자, 바가지 머리를 한 작은 영귀가 헤헤 웃고 있었다. 정체는 다름 아닌 연옥이었다. 곁에는 연옥과 함께 종이접기를 하다가 끌려 나온 새로도 있었다.
“단주님 오셨슴까!”
새로가 꾸벅 인사를 할 때였다.
“…어?”
단주의 얼굴을 보자마자 연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볼캡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으나, 연옥은 단주의 아름답고 곱상한 얼굴이 곤죽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우리 연옥이 왔어?”
단주가 연옥을 훌쩍 품에 안아 올리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연옥이 한쪽 팔로 자연스럽게 단주의 목을 감고, 다른 쪽 손으로는 단주의 볼캡을 무례하게 훌러덩 벗어젖혔다.
“단주님 언니야. 얼굴이 왜 이래!”
연옥이 눈물을 글썽이며 단주의 뺨을 잡아 쥐었다.
“아퍼?”
연옥이 물었다.
“응. 아퍼.”
“누구한테 맞아서 이르케 된 거지?”
“응. 맞아서 이르케 된 거야.”
연옥은 코를 찔찔 흘리며 말했다.
“누구야…?”
단주를 몹시 따르는 연옥은 화가 났다. 가끔 다쳐서 오는 날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엉망이 된 얼굴로 나타난 것은 처음이라, 연옥이는 울며불며 난리를 피웠다.
“누가 그랬는지 말해죠. 연옥이가 혼내줄 거야.”
연옥은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떼를 썼다.
“말해죠! 누가 그랬어!”
패현이 새로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새로가 “여, 연옥이이… 이리 오십쇼.” 하고 연옥이를 데리고 나갔다. 연옥이가 징징 떼를 쓰며 악을 쓰는 소리가 복도에서 들렸다.
허어엉… 말해죠… 연옥이가 직접 응징하게 해죠—…….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단주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단주의 얼굴에 머물고 있던 웃음기는 금방 사라졌다. 단주는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단주님, 건넛방에서 의뢰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단주를 향해, 패현이 조용히 말했다.
“돌려 보네. 오늘은 손님 받으러 온 거 아니라서.”
애초에 단주는 도저히 손님을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허나…….”
패현이 난색을 보였다.
“허나, 오늘 찾아온 자는 두 달 전부터 오기로 되어 있던 자이고, 열흘 전에도 왔다가 단주님을 뵙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던 자인데, 이번에도 헛걸음을 하게 된다면….”
패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주는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사기로 된 찻잔이 벽에 부딪히며 콰장창,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찻잔은 박살이 났다.
“닥치던가, 나가 줄래.”
단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둘 다 해주면 더 좋고.”
패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심기를 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단주의 심기를 살피던 패현이 침중한 기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죄송합니다. 다음번 방문을 기약하는 것으로 하고, 적당히 상대한 뒤에 돌려보내겠습니다.” 패현은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가 방을 빠져나갔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가뿐히 쓸어넘기던 단주는 이를 데없이 무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을 내다보던 단주가 담배를 꺼내물었다.
단주는 한쪽에 놓인 성냥을 켜 불을 붙였다. 불탄 성냥개비는 대충 휙,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단주는 턱을 괸 무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흑제야.”
이름을 부르자마자 흑제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200여 년 전 묘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정보를 알아 와.”
“네. 알겠습니다.”
단주는 역시 흑제의 과묵함이 좋았다. 반쯤 태운 담배를 꺼트린 단주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자 사진 한 장이 액정 화면을 가득 채웠다.
거여도에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재겸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다.
액정 속 재겸은 곁에 선 윤태희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눈동자에 오롯이 자신이 가득 담기던 그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인데도 아주 오래전의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
윤태희는 재겸이 어째서 죽음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마음이 꺾여서 전부 놔버리고 싶어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을 뿐이다.
성취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재겸을 끌어당겼으나 한 번 희망이 꺾인 재겸으로서는 다시 처음부터 해결책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 요원하게만 보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윤태희는 새로운 돌파구가 생겨난다면 재겸이 다시 손을 잡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굳건히 돌아선 재겸의 마음을 다시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길이 생겨났음에도, 재겸의 결심을 돌리지 못했다.
이로써 윤태희에게는 아무런 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윤태희가 천천히 메시지를 입력했다.
[그래]
[네가 이겼어]
수신인은 재겸이었다.
이젠 인정해야 했다. 윤태희에게는 더 이상 재겸을 막아설 방법이 없었다. 휴대폰으로 재겸과 찍은 사진을 바라보던 윤태희는 그대로 상체를 스르륵 무너트리듯 엎드렸다.
“흑제야.”
탁자 위에 누워 사진을 들여다보던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계획을 변경할 거야.”
곁을 지키고 있던 흑제가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윤태희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탁자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
뺨에 팔을 대고 누워 있던 윤태희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나례청장이 가지고 있다는 그 탈 말이야. 원래 방상시가 쓰던 탈이었다며. 그럼 만약에, 우리가 나서기 전에 먼저 방상시가 선수를 쳐서 탈을 가지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우리 계획에 문제가 생기게 되잖아.”
재겸아.
나 너무 불행해. 널 좋아해서 불행해.
그러니까
“벽사단을 움직여 방상시의 탈을 선취한다.”
우리 같이 불행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