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46)화 (246/348)

#246

김 씨는 멍하니 얼어붙은 채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하이?”

어디선가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스스스, 댓잎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길게 내려온 적색 두루마기 자락이 바람결에 휘날리고, 얼굴을 가린 검은 면사가 가볍게 나부꼈다.

“…….”

김 씨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범이라도 맞닥뜨린 것처럼, 왜인지 사지가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상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김 씨는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사고가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다. 옷차림부터 범상치 않거니와 애초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 면사 안쪽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헤어지면 못 본 걸로 하세요. 그냥 보내줄 테니.”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탓에 김 씨는 단주의 생김새를 볼 수 없었지만, 면사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있었다. 행동거지로 미루어 볼 때 이 인간은 나자가 아니었다. 많이 놀란 것으로 보아 귀재도 아닌 듯하고, 나례청과는 무관한 범인이 분명해 보였다.

단주는 범인에게 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단주가 김 씨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설 때였다.

“…으, 으아아—!”

그 순간, 김 씨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던 김 씨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냅다 비명을 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대숲을 가르고 현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공포에 질린 김 씨가 비명을 지르며 돌아오자, 휴식을 마치고 작업을 재개하려던 인부들이 놀란 눈으로 김 씨를 쳐다보았다. 심상치 않은 김 씨의 표정을 보고 최 주임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김 씨는 최 주임을 붙잡고 벌벌 떨었다.

“저, 저기…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뇨?”

최 주임이 낯을 굳힐 때였다.

“웬 두, 두루마기를 입고….”

그 순간이었다. 현장을 밝히기 위해 일렬로 세워두었던 조명이 펑, 하며 차례대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현장이 어둠에 잠겼다. 느닷없는 상황에 놀란 인부들이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최 주임이 “진정하세요!” 하며 인부들을 통솔할 때였다.

콰과과——

어디선가 날카로운 광풍이 일었다. 바람에 칼날이라도 섞여 있는지 경주 청사의 진입로를 요새처럼 감싸고 있던 대나무들이 잘려 나갔다. 회오리바람에 인부들이 나동그라졌다.

바람에 맞서며 몸을 지탱한 사람은 최 주임이 유일했다. 가드를 세우듯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최 주임이 간신히 중심을 잡을 때였다. 인부 중 한 명이 기겁하며 고함을 쳤다.

“저, 저기!”

누군가 기겁하듯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던진 순간, 최 주임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짓다 만 경주 청사 지붕 위에 낯선 무리가 보였다.

인영은 총 여섯이었다.

여섯의 무리는 옷을 맞춰 입은 것처럼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고, 면사가 달린 모자를 써서 얼굴을 가린 이들은 체격이 제각각이었다.

부정을 막고자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불침부(不侵符)를 붙여놓았기 때문에 웬만한 원귀와 잡귀는 이곳에 발도 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잡귀, 원귀 따위라면 범인인 인부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흑색의 무리를 향해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다.

상대가 영귀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최 주임의 머릿속에 스친 단어가 있었다.

“…벽사단?”

최 주임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달빛을 받은 채, 처마 위에 서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여섯의 인영은 발밑에 그림자가 없었다. 틀림없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벽사단이 분명했다.

벽사단이 어떻게, 왜 여기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때, 높은 지붕 한가운데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나타낸 이는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다른 영귀들과 달리, 유일하게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입었다. 최 주임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자가 바로 벽사단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단주는 허리가 굽은 노인이라거나 팔척장신이라는 식의 소문이 무성하였는데, 실제로 목도하는 건 처음이었다. 체격만 보았을 때는 성인 남성으로 보이는 신체였다.

단주는 발밑에 그림자가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영귀들의 뒤에 섰다. 세 걸음 정도 물러선 위치에서 걸음을 멈추자, 최 주임의 시야에서는 단주의 발밑이 보이지 않았다.

무릎을 세우고 풀썩 주저앉은 단주가 현장을 둘러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총 열네 명이네.”

단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현장에 있는 인원을 헤아렸다.

“시작할까요?”

그러자 곁에 있던 영귀 하나가 조용히 물었다. 단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각자가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 할 시간이었다.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흑제였다.

흑제는 꿈을 조작하고, 그림자에 숨어드는 능력이 있었다. 흑제가 양팔을 뻗더니 땅바닥에 드리운 건물 그림자를 넓히기 시작했다. 검은 먹물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땅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괴이한 현상에, 인부들이 발밑을 내려다보며 공포에 질린 얼굴을 했다.

“이, 이게 무슨…….”

두 번째로, 가장 우람한 체격을 가진 형운이 손뼉을 쳤다.

흑제가 능력을 펼치길 기다린 형운이 손뼉을 치자, 검게 물든 땅속에서 꾸물거리며 형체가 솟아올랐다. 단주의 주문을 받아 어젯밤부터 미리 만들어 둔 술지게미 병정들이었다. 현장의 인원과 똑같은 수만큼 생겨난 병정들이 그대로 사람 한 명씩을 맡았다. 뒤에서 목을 콱 틀어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을 했다. 놀란 최 주임이 컥, 숨을 뱉으며 발버둥을 쳤다.

세 번째로, 단주가 곁에 있던 작은 체구의 영귀를 향해서 허리를 숙였다.

“그럼, 이번엔 연옥이가 해 볼까?”

단주가 연옥에게 무어라 작게 속삭였으나, 최 주임의 귀까지 닿을 리는 만무했다. 단주는 연옥을 살짝 당겨 안으며 연옥의 귓가에 “연습한 대로 하면 돼.” 하고 다정하게 소곤거렸다.

“응!”

연옥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등에 지고 있던 거문고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술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자세를 잡았다. 연옥이 거문고 연주에 돌입하려고 하자, 단주는 무심한 낯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영귀들 또한 다가올 무언가를 예상한 것처럼 귀를 틀어막았다.

띠링, 띵…….

연주가 시작되었다.

연옥의 손끝에서 구슬프면서도 을씨년스러운 운율이 흘러나왔다. 연주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부들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지옥도가 펼쳐진 탓이었다. 소중한 이를 잃던 순간 등, 각자가 가진 고통스러운 기억이 영상처럼 재생되었다.

인부들이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코와 눈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으나, 병정들이 뒤에서 몸을 끌어안고 있는 탓에 움직임이 봉쇄된 상태였다.

생 고문이 따로 없었다.

최 주임의 관자놀이에도 불뚝 힘줄이 솟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범인들과는 달리 조금은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주가 끝나고 난 후에는 최 주임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모두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술지게미 병정들이 땅 위로 흩어졌다.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겠군요.”

최 주임이 침착하기 위해 애쓰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유일하게 의식을 붙든 최 주임이 힘겹게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서 부적을….’

그때였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움직이지 마라.”

어깨가 굳었다.

“목이 달아날 것이다.”

최 주임은 스르륵 눈동자를 움직여 곁눈질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게, 소리 없이 다가와 목을 겨누고 있는 칼날이 보였다. 패현은 최 주임의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었다.

“저들은 일개 범인이니 손대지 마십시오.”

패현이 피식 웃었다.

“다른 이를 살필 여유까지 있다니 훌륭하기 짝이 없군.”

패현이 칼등으로 최 주임의 목 뒤를 후려쳤다. 최 주임이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질 때였다. 단주가 지붕 위에서 풀썩 뛰어 내려왔다. 그러자 패현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단주에게 건넸다. 단주는 상체를 살짝 숙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그대로 땅에 푹 박아 넣었다.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안심해.”

단주는 쓰러진 최 주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대신 부탁이 있는데.”

칼자루에 손을 얹고 몸을 지탱하던 단주가 쪼그려 앉았다.

“나례청장에게 가서 말 좀 전해 주겠어?”

단주가 청장을 언급하자, 피를 쿨럭이던 최 주임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단주는 뒷짐을 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최 주임은 의연하려고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최 주임의 귓가에 입술을 가깝게 붙인 단주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쟁을 시작하자고 말이야.”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