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전쟁을 시작하자고 말이야.”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아주 음산했다.
……전쟁?
최 주임의 눈이 서서히 커질 때였다.
최 주임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있던 단주가 몸을 훌쩍 일으켰다. 그러자 흙바닥에 턱을 뭉갠 채 멍하니 굳어 있던 최 주임이 저도 모르게 천천히 눈을 들었다. 최 주임의 시선이 단주의 발치에 닿았다.
흑제의 능력으로 땅 전체가 어둠에 물든 탓에 최 주임은 단주가 그림자를 달고 있는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최 주임은 눈앞의 남자가 인간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적색 두루마기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살갗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사특했기 때문이었다.
단주는 밤하늘을 등에 업은 채, 엎어져 있는 최 주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탓에 단주의 눈을 볼 수 없었지만, 최 주임은 단주가 제 눈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는, 압제자의 시선이었다. 악신을 대면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라고, 최 주임은 생각했다.
“우리는 벽사단이다.”
그때, 패현이 단주 대신에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곳 말고도 다른 곳에도 터를 잡고 있다지?”
최 주임의 낯이 굳었다. 믿을 수 없었다. 벽사단의 영귀는 경주와 공주, 두 곳에 지부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훤히 알고 있는 듯했다.
“오는 칠석날, 그곳을 부술 것이다.”
최 주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음에는 공주 지부를 습격하겠노라고 친절히 예고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친다. 지부 건설 현장을 습격한 것은 양동 작전의 포석을 깔기 위함이었다. 선전포고이자 본보기였다. 범을 불러내려면 그만한 큰 잔치를 벌여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사실, 오늘 지부를 습격하는 일은 윤태희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애초에 윤태희가 구상했던 계획은 나례청에 선전포고하는 일도 없이, 곧장 본청에 쳐들어가서 단 하루 사이에 모든 일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상시의 탈을 빼돌리기로 결심하면서 윤태희는 자신이 10년 동안 쌓아온 계획의 궤도를 틀었다.
예정에도 없던 지부를 습격한 이유는, 잠잠하던 벽사단이 하루아침에 튀어나와 방상시의 탈을 빼돌리는 상황이 부자연스럽다는 판단에서였다. 재겸은 감이 좋은 편이었다. 벽사단이 뜬금없이 방상시의 탈을 가져간다면 벽사단과 윤태희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으리라 의심할 가능성이 있었다.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탈을 가져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미리 심어놓고, 별개로 벽사단의 존재를 아예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편이 나으리라고, 윤태희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단주는 완벽하게 ‘방상시’로 위장할 생각이었다.
“우리의 주인인 방상시께서 복위하실 것이다.”
패현의 말에 최 주임의 시선이 단주에게로 향할 때였다.
단주는 땅에 박아넣은 검을 빼 들었다. 그대로 팔을 뻗어 검 끝으로 짓다 만 건물을 겨누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윽고 단주의 몸을 둘러싸고 무형의 귀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두루마기 자락이 펄럭이고, 주변에 깔린 돌조각과 흙이 가느다랗게 진동하며 떨리기 시작했다.
“…….”
건물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던 단주는 문득, 제 마음에 희미한 망설임이 남아 있음을 알았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계획이 틀어진 만큼 이전과는 달리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는 종일 누각에 틀어박혀 홀로 장기를 두었다. 잠도 자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 초와 한을 번갈아 잡고, 아군이 되었다가 적군이 되기를 반복하며 수십 판이 넘도록 저 자신과 장기를 두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망설임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 길은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었다. 나례청장에게 복수를 하는 것, 그리고 방상시의 탈을 되찾는 것, 이제는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단주는 귀기를 실은 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검에서 떨어져 나간 귀기가 벼락처럼 번쩍이는 섬광을 일으키며 건물에 집어삼켰다. 실로 어마어마한 귀기였다.
콰과광——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건물이 한순간에 붕괴하며 무너져 내렸다.
단주는 품에서 부적 한 장을 꺼냈다. 손바닥에 부적을 올리자, 부적에 후루룩 불이 붙었다. 단주는 불이 붙은 부적을 그대로 건물 잔해 틈으로 휙 던져 넣었다. 부적에서 시작된 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큰 불길로 번지기 시작했다. 건물은 순식간에 큰 화염에 휩싸였다.
단주 윤태희는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
벽사단의 출현은 나례청을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연락을 받은 나자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광경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올해 말에 완공을 앞두고 있던 경주 청사는 완전히 전소되어 잿더미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곧장 근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공사 책임자인 최 주임은 크게 다쳐서 중상을 입고 정화부의 치료를 받았다.귀신들의 집단에게 습격당한 사건은 나례청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본청은 벽사단의 행적을 뒤쫓기 위해 인부들과 최 주임의 증언을 토대로 벽사단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핵심적인 단서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최 주임은 자세하게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단주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현장을 떠나기 전, 단주가 흑제를 시켜 기억을 뒤섞으라 명령한 덕분이었다. 인부들 또한 서로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혼선을 빚었다.
경주 지부 현장에 벽사단이 나타나 공격했다는 소식이 일파만파로 퍼지며 나례청 분위기는 아주 흉흉했다. 각 부서의 부장들이 모여 긴급회의를 열었고, 대기 중이던 나자들에게는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현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서신 한 장이 발견되었다. 잿더미 속에서 발견된 서신은 대회의실에 있다고 했다.
재겸과 윤태희는 표지호에게서 내용을 전달받으며 서신이 공개되어 있다는 대회의실로 이동하는 중이었다.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를 받으며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동행한 재겸은 힐끗, 윤태희를 곁눈질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으나 다소 심사가 복잡해 보였다.재겸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마에게서 벽사단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바로 어제 일이다. 벽사단에 가서 봉인을 의뢰하라는 제안을 들은 지 하루 만에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벽사단에 대해서 관심 한 톨 가지고 있지 않았던 재겸에겐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석주련이 복도 맞은편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부장들끼리 모여 회의를 하던 도중에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석주련의 안색은 한눈에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석주련은 모퉁이를 돌던 재겸과 윤태희를 발견하지 못하고 한발 앞서 대회의실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대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장내는 아주 수선스러웠다.회의실 벽면 한쪽에 서신이 붙어 있었다. 그 앞에서 나자들이 심각한 얼굴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제1팀 팀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석주련의 등장으로 서신 앞에 모여 있던 나자들이 우르르 몸을 물리며 자리를 비켰다.
서신에는 빽빽한 한문이 적혀 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여 감히 태만하지 말 것이며, 하늘의 변이를 공경하여 감히 방자하지 말라. 하늘은 언제나 너와 함께 왕래하고, 하늘은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였으니, 하늘이 그대들에게 귀한 재주를 내렸다면, 그 까닭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조율하고 만물의 조화와 화목을 위해 힘쓰라는 하늘의 뜻이리라.
세상이 무도(無道)에 이르면 하늘은 재해를 내어 견고(譴告)하고, 그런데도 자성할 줄 모른다면 괴이를 내어 경고한다고 하였다. 허나 애석하게도 천견(天譴)을 읽지 못하는 허주 따위가 세상을 호령하고 있으니, 이는 닭이 봉황을 흉내 내는 꼴이다.
삶과 죽음은 본디 한 몸이요, 귀신은 이승이 벗어낸 허물이니, 산 자가 죽어서 되는 것이 귀신이다. 따라서 귀신이 이 땅을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것은 이승의 업보이다. 이들이 이승을 떠나지 못한 까닭은 한을 품었기 때문이요, 한을 품은 까닭은 벌 받아야 할 이가 호사를 누리고, 죄를 지은 이가 수치를 모르는 탓이니, 이는 그대들의 죄이다.
서신에 담긴 한문을 읽던 석주련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낯빛은 어느새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석주련은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아아, 기어이…….
석주련이 휘청이며 벽을 짚었다. 급격한 현기증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에 곁에서 보좌하고 있던 한주영이 황급히 석주련을 부축했으나,
“부장님! 괜찮으십니까?”
석주련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