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석주련이 눈을 뜬 것은 익숙한 방 안에서였다.
가물거리는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석주련은 이곳이 자신의 침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키자 이마에 올려져 있던 물수건이 툭 떨어졌다.
석주련은 축축한 물수건을 손에 쥐었다.
“…….”
물수건에는 미약하게 냉기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 곁에서 병구완을 해 준 흔적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제 이마를 짚어보았다. 손바닥에 따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머리가 멍했다.
제 이마를 짚어보던 석주련은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문을 열었더니 부엌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제일 먼저 눈에 띈 모습은 흰 셔츠가 타이트하게 달라붙어 있는 너른 등이었다. 개수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윤태희였다.
“일어나셨어요?”
기척을 느낀 윤태희가 고개를 틀고 석주련에게 인사를 했다. 윤태희는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석주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출근 전과 비교했을 때 집 안 풍경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석주련은 고개를 돌려 집 안을 둘러보았다. 다소 산만하던 집 안은 깔끔히 치워져 있었고, 거실 한구석에 놓인 건조대에는 그동안 쌓아 두었던 빨래가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혼자 사는 석주련은 젊었을 때부터 집안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씻고 잘 때를 제외하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석주련에게 집이란 그저 잠자러 오는 곳일 뿐이었다. 때문에 청소, 빨래와 같은 집안일은 주 2회 찾아오는 가사 도우미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가사 도우미가 방문하는 날이 아니었다. 빨래와 청소는 윤태희가 한 일이 틀림 없었다. 넥타이 없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푼 윤태희는 평소보다 훨씬 느슨해 보였다. 석주련은 윤태희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의문이었다.
“좀 더 주무시지, 왜 나오셨어요.”
석주련이 설핏 눈가를 좁히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당시 같은 장소에 있었던 윤태희는 석주련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자마자 그 즉시 석주련을 업고 정화부로 향했다. 석주련이 쓰러진 원인은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살 기운까지 겹치는 바람에, 며칠 간은 집에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과로래요. 며칠 푹 쉬면 나을 거예요.”
정화부의 처치가 끝난 이후 윤태희는 잠에 빠진 석주련을 자택으로 데려왔다. 올 때는 한주영도 동행했으나 이내 돌려보내고 윤태희 혼자 남아서 석주련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남의 집 와서 시키지도 않은 집안일은 뭐 하러 해?”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그냥 했어요.”
“이럴 시간 있으면 가서 네 집 살림이나 신경 써.”
“너무 매몰차게 그러지 마세요.”
손에 묻은 물기를 배에 대충 문질러 닦으며, 윤태희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한때 이 집 식구였는데.”
현재 석주련이 사는 이 집은 윤태희가 10대이던 시절에 잠깐 들어와서 몇 년 동안 얹혀살았던 그때 그 집이었다. 따라서 이 집은 윤태희에게도 꽤 익숙한 공간이었다.
10년 전,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윤태희는 조금 야위어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미성숙한 티가 남아 있던 소년이었다. 그때 윤태희에게는 정제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랬던 윤태희는 어느새 장성하여 완전한 성인 남성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이만 됐으니 돌아가.”
“식사하시는 거 보고 갈게요.”
윤태희가 가스레인지에 올려둔 냄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죽 끓이고 있는데 생각보다 꽤 먹을 만해요.”
“알아서 먹을 테니, 너는 가서 네 일이나 봐.”
실랑이할 기운도 없었다. 어지러워서 더는 서 있기가 힘들었다. 석주련은 그대로 등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으려는데, 윤태희가 뒤따라 들어왔다.
윤태희는 허락도 없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침대가 한쪽으로 기우뚱,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칠 기력조차 없어서, 석주련이 그대로 눈을 감을 때였다.
큼직한 손바닥이 석주련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아직 열이 있네요.”
손바닥으로 석주련의 열을 확인한 윤태희가 침대 머리맡에 떨어져 있는 물수건을 챙겨 들었다. 협탁에 올려둔 대야 속에 수건을 집어넣었다. 미리 받아둔 시원한 얼음물에 수건을 흠뻑 적셨다가 비틀어 짰다. 윤태희는 차가워진 물수건을 석주련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죽 거의 다 됐으니 잠깐 쉬고 계세요.”
윤태희가 침실에서 나가자, 석주련은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떴다.
“…….”
석주련과 윤태희가 함께 살았던 세월은 3년 남짓이었다. 윤태희는 ‘이 집 식구’였다는 말을 썼지만, 돌이켜 보면 ‘식구’라는 말을 쓸 정도로 정감 있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제 이름은 윤태희예요. 부모는 없고 나이는 몰라요. 목줄을 채우고 절 사냥개로 쓰세요. 필요가 없으면 그대로 버리면 돼요.’
석주련은 열여섯의 윤태희를 기억했다.
줄곧 길에서 살았다는 윤태희는 마치 수도승처럼 고요하고 정적인 생활을 했다. 스스로 제 몫의 밥을 지어 먹었고, 본인이 입은 옷은 언제나 직접 세탁했다. 가사는 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윤태희는 ‘제가 하는 게 편해서요.’라는 말로 언제나 칼같이 제 몫을 했다.
매일 식탁에 돈을 올려 놓고 나갔으나 윤태희는 그 돈을 쓰지 않았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사지 않았다. 어떤 빚도 지지 않겠다는, 이상한 결의 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였으나 그때는 사춘기 소년의 치기 어린 자존심이거나 부채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하나같이 이상한 일이었다.
문득 석주련은 함께 살았던 삼 년 동안 윤태희가 잠들어 있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석주련이 집에 있을 때면 윤태희도 항상 깨어 있었다. 석주련이 귀가하는 시간은 새벽일 때도 있었고 대낮일 때도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늘 불규칙했는데도, 윤태희는 잠을 자다가도 문소리를 듣고, 현관에 나와 ‘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
깊이 잠들면 누가 드나드는 것쯤이야 모를 법도 하건만, 당시의 윤태희는 항상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그랬던 윤태희였으나, 언젠가부터는 가면을 쓰고 느슨하게 굴었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윤태희는 이 집에서 한 번도 빈틈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 소파에서 잠시 잠이 들었던 일이 있었다. 잠결에 눈을 떴을 때 석주련은 어둠 속에 서서 무감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윤태희를 보았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켰음에도, 윤태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히 말을 건넸다. 그리고 석주련은 왜인지, 아주 오래전에 저 눈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 속에 잔상처럼 떠오른 낯익음은 금세 휘발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윤태희는 이 집을 떠났다. 열여섯 살에 처음 이 집에 온 윤태희는 그 이듬해 입청하여 수석의 직함을 달던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집을 구해서 제 발로 나갔다.
입청하고 나서부터 매달 돈을 차곡차곡 모았던 윤태희는 이제까지 먹고 재워준 값이라며 석주련에게 돈 봉투를 내밀었다. 별다른 내색을 비추지 않고 그간 신세 진 것을 하루아침에 갚은 윤태희는 그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집에서 떠났다. 살가운 사이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돈이 든 봉투를 받았을 때, 석주련은 처음으로 윤태희의 무정함을 느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윤태희가 다 끓인 죽을 쟁반에 받쳐 내 왔다.
“식기 전에 드세요.”
석주련은 한 차례 고개를 저으며 먹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입맛이 없어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자 윤태희가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리며 뻔뻔하게 말했다.
“수저로 떠서 먹여 드려요?”
석주련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
저도 모르게 피식거리며 웃던 석주련은 작게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결국, 수저를 들고 몇 술 뜨는 시늉을 했다. 조용한 와중에 수저와 그릇이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윤태희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석주련이 죽을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화가 없음에도 둘은 딱히 어색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오래 알고 지낸 관계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안정감 같은 것이 있었다. 비록 살갑고 편안한 사이는 아닐지언정 서로의 침묵에 익숙하고,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불편해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죽을 몇 술 뜨던 석주련이 상을 물렸다.
“더 드세요.”
석주련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몸을 뉘었다.
“쉬고 싶으니 귀찮게 굴지 말고 돌아가.”
윤태희가 침실에서 나가자, 석주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석주련은 윤태희와 자신이 어딘지 닮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윤태희는 석주련이 내민 손을 붙잡지 않았다는 것이다. 석주련은 나례청장이 내민 손을 잡았으나 윤태희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석주련은 윤태희가 왜 그랬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석주련은 윤태희가 벽사단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