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49)화 (249/348)

#249

그날 석주련은 커다란 탈력감에 휩싸여 있었다.

윤태희가 예움아트센터에 발목이 묶였던 날의 일이다. 임무 수행차 강이빈의 대타로 예움아트센터에 잠입했던 윤태희는 함정에 빠졌다. 정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나례청장이 암행부 최원영 부장을 시켜 축역부 나자를 제물로 가져오라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석주련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처음엔 최 부장이 농간을 부린 것이라 생각했다. 청장이 직접 명령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석주련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청장의 뜻이라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차를 몰고 있었다. 석주련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윤태희가 있는 현장으로 향했다. 제물이 될 위기에 처한 먹잇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윤태희였다.

저답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동시에, 이것이 자신을 거둬준 청장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몰랐다면 어쩔 수 없었지만, 알게 된 이상에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날 석주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례청장의 뜻에 반기를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차를 몰아 혈혈단신으로 현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은륜지에 의해 반파된 센터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기척을 따라 내부로 들어서던 찰나, 석주련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재겸의 몸 주위를 둘러싼 붉은색 귀기였다. 석주련은 윤태희가 데려온 신입이 그동안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저 아이는 평범한 귀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석주련은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사실, 석주련의 마음속에는 은연중에 재겸을 향한 희미한 의구심이 있었다.

윤 수석은 팀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언제나 맡은 바를 완벽하게 해냈으며, 나자로서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인간 윤태희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윤태희는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기본적으로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윤태희가 두 달씩이나 휴가를 내고 직접 후임을 찾아서 데려왔다는 것은 꽤 기이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후임을 눈에 띄게 감싸고 도는 데다가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아낀다는 점 역시 그랬다. 그것이 윤태희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석주련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석주련은 꽤 오래전부터 재겸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훌륭한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입청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했으니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저 붉은 귀기는 그저 ‘재능’이라 치부할 수는 없는 영역이었다.

‘저 귀기는… 대체 정체가 뭐지?’

이제까지 수많은 귀재를 봐왔던 석주련조차 붉은 귀기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석주련은 큰 혼란을 느꼈다. 저 붉은 귀기가 무엇인지 그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다만 확실하게 깨달은 사실은 윤태희가 재겸의 정체를 포함한 이 모든 것을 작정하고 숨겨왔다는 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이 있었다.

굳이 정체를 숨겨서까지 나례청에 데려온 이유는 무엇인가.

석주련이 낯을 굳히며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패현.”

윤태희의 부름에, 검은 연기처럼 솟아난 형체가 무릎을 꿇었다.

“검신(劍神)은 피를 받아 마셔라.”

석주련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윤태희의 부름을 받고 나타난 귀신은 그대로 검이 되었다. 윤태희가 불러낸 귀신은 영귀가 틀림없었다. 저도 모르게 등을 돌렸다. 그대로 도망치듯 현장을 빠져나온 석주련은 멍하니 굳어 있었다.

나례청의 나자가 귀신을 다룬다. 그것도 잡귀나 원귀도 아닌, 영귀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분명 영귀를 부리고 있었다. 그걸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게다가 윤태희를 대하는 영귀의 태도는 명백하게 윗사람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후임의 정체를 숨기고 나례청에 데려왔으며, 뒤에서는 남몰래 영귀와 내통한다.’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조각들이 맞물리며,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벽사단.’

벽사단은 얼마 전부터 나례청의 근간을 뒤흔들기 위해 노골적으로 도발해 오고 있었다. 확대해석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으나, 오랜 세월 단련된 직감이 날카롭게 말하고 있었다.

설마, 전부 그 아이가 꾸며낸 일이라면…….

‘그렇다면 어째서?’

그날부터 석주련은 가슴에 무거운 바위를 매단 사람처럼 살았다.

석주련이 목도한 그날의 광경은 하나부터 열까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후임과 영귀를 부리던 윤태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숨기고 있는 ‘윤 수석’. 그리하여 너는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가.

모든 의문이 가리키는 방향에 있는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너는 역모를 꾸미고 있구나.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석주련이 스르륵 눈을 뜰 때였다.

“주무세요?”

그때, 닫혔던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윤태희가 돌아왔다. 그에 천장을 올려다보던 석주련은 아무런 대꾸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윤태희 손에는 마른 수건이 들려 있었다. 그대로 집에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물수건을 갈아주고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모양이었다.

잠시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석주련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에 윤태희는 별말 없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더니, 찬물을 받아둔 대야에 깨끗한 수건을 넣고 물을 적셨다.

“태희야.”

어느 순간, 석주련이 희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네.”

줄곧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석주련이 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윤태희는 딱히 놀란 기색 없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석주련은 운을 띄워 놓고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언제부터, 왜, 어디까지 꾸미고 있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젠가 윤태희의 눈에서 보았던 그 서슬 퍼런 칼날의 끝이 나례청 내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석주련은 묻고 싶었다.

정말로 벽사단을 일으켜 역모를 꾀할 생각이냐고. 그러나 석주련은 윤태희에게 그 어떤 것도 물을 수 없었다. 나자 윤태희가 벽사단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석주련, 저 자신뿐이었다. 여기서 윤태희가 숨기고 있는 것을 들춰낸다면 심증은 확증이 될 것이고, 그때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석주련은 윤태희를 막아설 수밖에 없었다.

불러놓고도 얼마간 말이 없던 석주련이 한참 만에야 입술을 달싹였다.

“그만둬.”

힘없이 흘러나온 목소리에, 물수건을 쥐고 있던 윤태희의 손이 멈칫했다.

“…….”

그만둬. 아무런 맥락 없이 날아든 말이었다. 얼마 전 나자를 그만두겠다는 말에 대한 뒤늦은 대답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겨냥하고 있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으로 이해할지는 윤태희의 몫이었다. 윤태희는 말없이 대야에 담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뭐, 봐서요.”

윤태희는 ‘뭐를요?’ 와 같은 대답은 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을 깨고, 태연하게 대꾸한 윤태희는 물수건을 비틀어 짰다. 적당한 물기를 머금은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주었다. 석주련은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윤태희는 석주련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보았다.

“…….”

사실 윤태희는 알고 있었다.

이 집 부엌 찬장에는 수많은 빈 약통들이 굴러다닌다. 석주련의 오랜 고질병 때문이었다. 석주련은 아주 오래 전부터 원인 모를 두통을 앓고 있어서, 항상 깊게 잠들지 못했다. 윤태희는 석주련을 괴롭히는 그 희미한 둔통이 사실은 ‘죄책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석주련은 그늘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윤태희는 석주련의 어깨에 켜켜이 쌓인 무거운 죄의식을 보았다. 윤태희 역시 동류이기에 알 수 있었다.

“다른 생각 하지 마시고, 오늘은 그냥 편히 주무세요.”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윤태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등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으려고 팔을 뻗는데 문득 길고 곧은 손끝이 까딱, 움직였다. 문득 지금 여기서 당신의 목을 조른다면 당신은 내 손에 죽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장님.”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윤태희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저는 후회 안 해요.”

그 말을 끝으로 윤태희는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갔다.

***

석주련의 집에서 나왔을 때는 어느덧 늦은 밤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몰고 나오자 흐린 밤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조그맣게 떨어지던 빗방울은 차츰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장대비가 되어 있었다.

윤태희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무료한 표정으로 운전을 했다.

쏟아지는 장대비는 자동차 앞 유리창을 마구 두들겨댔다. 와이퍼가 좌우로 작동하며 쏟아지는 빗방울을 열심히 닦아 내고 있었다. 집 근처에 도착한 윤태희는 빗속에 차를 세워 놓고 차의 시동을 껐다. 핸들을 팔을 걸치고 비가 오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라디오를 끄자 성난 빗소리가 투두둑, 끊임없이 차체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

잠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윤태희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열었더니 여기저기서 귀찮게 연락이 와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 윤태희가 기다리는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윤태희는 우울했다.

기다려야 할 사람도 없는데, 계속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겸에게서는 이제 더 연락이 오지 않는다. 게임 초대 메시지도, 전화도, 문자도 오지 않았다. 이젠 재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런데, 자꾸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재겸은 여전히 윤태희에게 냉랭했다. 주먹을 섞은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용건이 있는 게 아니면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오늘도 고작 차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눈 것이 전부였다. 손끝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던 윤태희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갔다.

뚜르르르…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재겸이 전화를 받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전처럼 전화를 피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화는 받을지언정 재겸이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왜 전화했느냐는 말도 없었다.

전화를 먼저 건 사람은 윤태희였으므로, 용건을 말해야 하는 사람 역시 윤태희였다. 그러나 윤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건이 있다면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게 다였다.

“…….”

- …….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건너편에서 조용히 침묵했다.

윤태희는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든 채, 다른 팔로 핸들을 팔로 감싸며 상체를 엎드렸다. 이렇게 숨소리만이라도 계속 듣고 싶었다. 그러나 거센 빗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건너편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윤태희는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랐다.

아무리 기다려도 윤태희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니, 재겸은 이내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윤태희는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을 축 늘어트렸다.

“…….”

빗속에 세워 둔 차 안에 앉아 있던 윤태희는 그로부터 한참 만에야 집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14층 버튼을 누른 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 머지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 때였다.

윤태희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집 앞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윤태희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커다란 후드 집업을 푹 눌러쓴 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윤태희는 기대를 했다.

그때, 상대가 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

얼굴을 확인한 순간, 윤태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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