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마지막 주 토요일.
목패를 훔치는 날이 정해졌다.
수석실에서 나온 재겸은 자리에 앉자마자 탁상 달력으로 시선을 던졌다. 윤태희가 말한 마지막 주 토요일은 약 보름 뒤였다. 재겸은 문득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꼈다.
윤태희가 오늘 저녁에 만나자고 한 까닭은, 명부실에 잠입하여 목패를 빼돌리기까지 그 방법과 과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늘 염두에 두고는 있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길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재겸은 왜인지 긴장이 되었다.
목패를 훔치는 일은 나례청 부수기의 첫 단추가 되는 일이었다. 동시에 윤태희와 재겸이 처음 손을 잡게 되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재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재겸이 달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여러분.”
윤태희가 수석실에서 나오더니 팀원들에게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방금 위에서 내려온 얘긴데, 공부 지부에 나자들 내려보낸다고 해요.”
벽사단이 경주 지부를 습격하던 날, 당시 벽사단의 영귀는 현장 관리자인 최 주임에게 칠석날 공주 지부를 공격하겠다는, 노골적인 선전 포고를 남겼다. 그에 나례청은 비상 경계 태세에 돌입하였고, 윗선에서는 며칠 내내 치열하게 내부 회의를 벌이던 중이었다.
본청은 회의 끝에 나자들을 차출하여 공주 지부에 배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조만간 인원 추려서 소집할 거라고 하니까, 일단은 미리 알고들 있어요.”
간략하게 내용을 전한 윤태희가 탕비 테이블로 가서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윤태희는 상관답게 이렇다 할 동요 없이 태연해 보였지만, 팀원들은 침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전쟁터에 끌려 나가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싶네요.”
표지호가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뱉었다.
물론 예상했던 바였다.
벽사단이 구체적인 장소와 날짜를 들어 선전 포고를 한 이상, 본청 입장에서는 방어 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습격에 대비하여 인력을 배치하고, 공격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벽사단이 예고한 대로 정말 공주 지부에 쳐들어온다면 충돌은 불가피할 것이었다. 또한, 나자를 차출한다면 아마 전투직인 축역부가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였다.
고준형이 머리를 감싸 쥐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벽사단은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나례청에 쳐들어오는 거래요? 솔직히 해서는 안 될 말이긴 한데, 이러다가 누구 하나 죽어 나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자 표지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그런 말은 하지 말자. 말이 씨가 된다고 하잖아.”
이건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두 명 다치는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모두가 알고 있기에 제1팀 사무실은 줄곧 초상집 분위기였다. 귀신들의 집단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건 나례청의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팀원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재겸이 윤태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윤태희는 말없이 티스푼을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눈에 띄게 동요하는 팀원들과 달리 차분한 모습이었지만, 윤태희 역시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듯했다. 목패를 되찾고 나례청을 무너트려야 하는 입장에서 벽사단의 존재는 불청객이었다. 재겸 또한 얼마 전부터 벽사단이 신경 쓰였다.
언젠가 윤태희에게 벽사단이 계획에 차질을 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윤태희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벽사단이 보낸 서신을 보면, 벽사단은 노골적으로 나례청에 적대감을 품고 있었고 귀신의 입장에서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만약 이쪽에서 움직이기 전에 벽사단이 먼저 선수를 치거나, 계획에 훼방을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저녁에 윤태희와 목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벽사단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강이빈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다들 그만들 해요, 벌써부터 초상집이 따로 없네.”
“맞아.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표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 때였다. 분위기를 환기한 강이빈이 손뼉을 쳤다.
“이러지 말고, 어디 가서 맛있는 거라도 먹고 기운 냅시다.”
강이빈이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 말 나온 김에 우리 오랜만에 회식이나 할까요?”
***
늦은 저녁, 식당이 즐비한 좁은 골목은 불야성처럼 환했다.
팀원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재겸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윤태희와 분명 선약을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1팀 팀원들과 함께 회식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까 전, 강이빈의 갑작스러운 회식 제안에 고준형은 난색을 표했다.
“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벽사단이 쳐들어오느니 마느니 하는 판국에 무슨 회식이에요… 다른 팀이 알면 우리 욕먹어요. 당분간은 얌전히 몸 사리는 게…,”
“뭐 어때서? 그렇게 남들 눈치 보면서 살아봤자 뭐가 달라지니? 우울하게 신세 한탄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구만. 어차피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
눈을 가늘게 뜨고 고준형을 타박하던 강이빈이 고개를 돌려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요, 수석님?”
아까 수석실에서 얘기하기로는, 윤태희와 저녁에 따로 만나서 목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었다. 그래서 재겸은,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한다고 미리 핑계거리를 생각해 두었던 참이었다. 왜냐하면, 재겸은 윤태희가 선약이 있다고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핑계를 대고 빠져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겸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좋은 생각이에요.”
재겸의 예상과는 달리, 윤태희는 흔쾌히 회식을 수락한 것이다.
때문에 재겸도 덩달아 회식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윤태희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자리가 파하면 윤태희와 따로 빠져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간만의 회식이었다.
팀원들은 주류도 빼먹지 않고 주문했다. 팀원들은 서로 술을 따라주며 주거니 받거니 했다. 처음엔 식사를 곁들인 가벼운 음주였으나, 어느덧 시간이 흐르며 다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술을 마시지 않는 재겸은 그 틈에 끼어 조용히 식사를 했다.
그런데, 식사를 하면서도 자꾸만 저도 모르게 윤태희를 쳐다보게 되었다. 재겸은 되도록 윤태희와 부딪치지 않도록 피해 다녔고, 용건이 없으면 말을 섞지 않았으며, 되도록 마주칠 일은 만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냉담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장소에 함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윤태희에게 신경이 쏠렸다. 이래서 윤태희와 함께 있지 않으려고 한 것이었다. 자꾸만 시선이 향하다 보니, 당연하게도 윤태희와 몇 번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재겸의 마음은 덜그럭거렸다.
결국, 재겸은 윤태희가 있는 쪽으로는 아예 시선 한 톨 주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이따금 윤태희가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재겸은 애써 주의를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윤태희는 술을 잘 하지도 못하면서, 아까부터 팀원들이 따라주는 술을 전부 받아마시고 있었다. 평소 팀원들과 식사도 하지 않는 윤태희였기에 처음에는 어디까지나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겸은 어느샌가 윤태희가 꽤 취했다는 걸 알았다.
저래서야 오늘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불현듯 슈트 재킷 안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해 보니, 정주로부터 전화가 오고 있었다. 식당 안은 매우 시끄러웠기에 나가서 전화를 받아야 했다.
가게 밖으로 나온 재겸은 근처 골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재겸아, 어디야?
재겸이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지금 회식 중이야.”
- 응? 회식? 갑자기?
재겸은 골목 안을 서성거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 회식 언제 끝나는데? 조금 있으면 막차 끊길 시간이잖아. 내가 데리러 갈까?
“괜찮아. 혼자 들어갈 수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메산이랑 먼저 자.”
[그래, 알겠어.]
통화를 마친 재겸은 재킷 주머니 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통화를 하면서 되는대로 걸음을 배회하다 보니 어느덧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꽤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재겸은 다시 가게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골목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윤태희였다.
윤태희를 발견한 재겸이 우뚝 멈춰 설 때였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채, 재겸을 바라보고 있던 윤태희가 살짝 흐트러진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재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윤태희가 걸음을 멈췄다. 담배를 피우고 온 모양인지, 코끝에 스치는 향수의 잔향에 담배 냄새가 섞여 있었다.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재겸을 응시했다. 어둡고 좁은 골목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윤태희가 손을 뻗어 재겸의 넥타이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