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윤태희는 손끝으로 재겸의 넥타이를 툭, 건드렸다.
윤태희를 바라보고 있던 재겸이 멈칫 굳을 때였다.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서 있던 윤태희는 재겸의 넥타이를 얼마간 말없이 만지작거렸다. 넥타이 자락이 손끝에 부드럽게 감겼다. 재겸은 윤태희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윤태희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넥타이를 감상하듯이 넥타이 자락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윤태희가 바지 주머니에 꽂고 있던 다른 쪽 손을 꺼냈다. 갑자기 거리를 좁혀오는 행동에, 반사적으로 가슴이 쿵쾅거렸다. 윤태희는 양손으로 재겸의 넥타이 매듭을 잡더니, 반듯하게 모양을 잡아 주었다.
“......”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인해 재겸의 어깨는 굳어 있었다. 윤태희의 손이 얼굴 근처로 가까워졌을 때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움찔할 뻔했으나, 재겸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특히 술에 취한 윤태희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었기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로, 재겸은 윤태희와 적당한 거리에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전처럼 싸우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일 없이 최대한 떨어져서 지내고 있었다. 따라서 이렇게 단둘이 남게 된 상황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런 기류가 없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밀어내자니 부자연스러웠다. 윤태희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흔들리는 것 같아서 어색했다. 왜 따라 나왔냐고 묻는 게 좋을지, 아니면 최대한 반응을 하지 않고 이 상황을 넘어가는 게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재겸의 넥타이를 정리해 준 윤태희는 다행히 별다른 행동을 덧붙이지 않고, 다시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윤태희의 손길을 의식하고 있던 재겸은 애써 긴장을 풀었다.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
잠시 굳어 있던 재겸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을 건넸다. 어쨌든 태연하게 구는 편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윤태희도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러게.”
윤태희는 큼지막한 손으로 제 하관을 감싸 쥐더니, 이내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윤태희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처럼 시선을 내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중심을 잡기가 힘든지 이따금 구두 앞코를 까딱거리기도 했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태희가 재겸을 향해 반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무표정한 낯으로 재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 입술이 쪽, 가볍게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예기치 못한 입맞춤을 받은 재겸이 멈칫할 때였다. 윤태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입맞춤을 직감한 순간, 잠시 얼어붙었던 재겸은 곧바로 외면하듯이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그러자 재겸에게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던 윤태희가 코끝에서 우뚝 멈췄다.
“…….”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 정지해 있던 어느 순간,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왜?”
재겸이 고개를 들었다.
“…….”
눈이 마주쳤다. 윤태희는 눈을 반쯤 내리뜬 채 재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보다 느슨한 시선이 재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앞뒤 없이 날아든 질문이었지만, 왜 거부하냐는 듯한 의미로 짐작한 재겸은 윤태희의 어깨에 손을 대고 가볍게 힘을 실어 밀면서 대꾸했다.
“하기 싫으니까.”
그러자 윤태희가 또다시 물었다.
“왜?”
“…….”
재겸은 윤태희가 술주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 너 안 좋아해.”
술김에 암묵적인 거리를 망각하고 어리광을 부리거나, 투정을 부리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재겸으로선 이 상황에서도 확실하게 선을 긋는 편이 최선이었다.
그때, 윤태희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그에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올려다볼 때였다.
“이건 기만이야.”
윤태희가 코끝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재겸아.”
자신의 어깨를 밀어내는 재겸의 손을 그대로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재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넌 나를 기만한 거야…….”
그렇게 말하는 윤태희의 목소리는 몹시 음울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고 있는 재겸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애초에 날 기만한 건 너야. 앞에서는 죽여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나한텐 묻지도 않고 말을 바꾼 것도 너고, 네 마음 하나 어쩌질 못해서 멋대로 굴고 있는 것도 너야.”
재겸이 냉담하게 대꾸했다. 어쩌면 제 발이 저려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재겸은 윤태희의 손을 뿌리치며, 제 목에 이마를 묻고 있던 윤태희의 어깨를 잡고 윤태희를 밀어냈다.
그러자 윤태희가 순순히 밀려나는가 싶더니,
“그래, 맞아.”
이내 무감한 얼굴로 대꾸했다.
“나는 널 기만했어.”
술에 취해서 하는 말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문득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자꾸 목끝에서 올라오는 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날 기만해.”
기만이라도 좋다.
“한마디면 돼.”
나를 동정하거나, 질릴 대로 질려서 내뱉는 말이라도 좋다.
“거짓말이라도 상관 없으니까.”
그러나 윤태희는 뒤에 이어지는 말을 결국 꺼내지 못했다. 목 끝에 걸린 말을 삼켜내며, 윤태희는 한껏 인상을 썼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북받쳐 오르는 듯했다.
“…….”
윤태희는 쓴 것을 삼키는 사람처럼 미간을 모은 채 울컥 솟아오른 감정을 삼켰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감정의 허들이 평소보다 훨씬 낮아져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감정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목 끝이 뜨거워져서, 윤태희는 한껏 인상을 썼다.
“나는 구질구질한 게 참 싫어.”
윤태희가 고개를 푹 숙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근데, 넌 자꾸 날 비굴하게 만들어.”
윤태희가 오늘 회식을 수락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단둘이 만났을 때보다 재겸을 더 오랫동안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윤태희에게 허락되는 시간은 오로지 짧은 용건을 전하는 그 잠시일 뿐이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회식 자리에 나와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재겸은 저한테 관심도 없고, 시선 한 번 주지도 않았다. 윤태희는 불현듯 저의 이런 꼴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서 더 엿 같은 게 뭔지 알아?”
잠시 말을 멈춘 윤태희가 입을 다물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 입술을 꾹 겹쳐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 끝까지 치받쳐 오른 감정이 좀처럼 내려가질 않았다.
“자꾸….”
결국, 단단한 껍데기가 깨지듯 윤태희의 목소리에 선명한 떨림이 섞였다.
“자꾸, 비굴해지고 싶다는 거야.”
눈가에 열기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기라도 부리는 것처럼, 치받쳐 오른 감정을 꾹 참기 위해서 눈도 감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어코, 붉어진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너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내 세계는 종말에 가까워진다.
너는 영영 붙잡혀 주지 않을 것이다. 윤태희는 이미 몇 번의 실패를 겪었고,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재겸은 멀리 달아났다. 어떤 방법을 써서든 곁에 붙들어 놓는 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남아 있는 수도 그것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윤태희는 생각했다.
목패를 선취하기로 한순간, 윤태희는 다짐했었다.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아도 좋다. 네 스스로 원해서 내 곁에 남은 게 아니라도 좋다. 결국, 네가 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도 좋다.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그때부터는 다른 건 욕심 내지 않겠다. 이렇게 냉담한 시선이라도, 하루가 망가지고, 하루하루 버림받는 기분이 들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 그렇게 윤태희는 자신에게 기도를 올리듯이 다짐했었다.
진정으로 재겸을 가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윤태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재겸을 기만하고 있는 건 윤태희 자신이었다.
목패를 빼돌려 약속을 깨고, 재겸이 죽을 수 없게 된다면.
죽음이 가로막힌 상황에서 죽을 수 없게 된 너는, 언젠가는 반드시, 단 한 번은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돌아봐 줄지도 모른다. 그거면 족하다고 믿었다.
분명 그렇게 다짐했는데도, 윤태희는 자꾸만 무언가를 더 바라고 싶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하루하루가, 이 지옥 같은 나날이 지속되길 바랐다. 가질 수도 없는 네가 내 곁에 있는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여기서 더 욕심을 낸다면, 너의 증오와, 원망도, 그리움도, 전부 다 내 것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단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너에게
죽음보다도 매력적이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