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54)화 (254/348)

#254

윤태희는 자꾸만 비굴해지고 싶었다.

머리를 조아리거나 무릎을 꿇거나 ‘제발’이라는 말을 쓰고 싶었다. 신에 의지하는 이들의 아둔함을 비웃고 그 맹목적인 절박함을 우습게 여겼던 주제에, 자꾸만 어디론가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구차한 감정과 불행한 나날을 들여다봐 주기를 바랐다.

“재겸아.”

윤태희는 큼지막한 손으로 하관을 짓뭉개듯 험하게 훔쳤다.

“나 얼마나 더 비굴해지면 돼?”

재겸은 윤태희의 코끝에 매달린 눈물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

콧대를 따라 굴러떨어진 눈물을 매단 채, 윤태희는 붉어진 눈시울로 재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태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어딘지 자조적으로 보이는 눈빛이었다.

“네가 알려줘.”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재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눈앞에서 윤태희가 울고 있었다.

재겸은 문득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마치 어디론가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뜨거운 덩어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숨이 막히고 손이 떨렸다. 윤태희의 눈물을 핥아먹고 싶다는 충동, 동시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겸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이런 거 그만하자고 했잖아.”

입안에 든 것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재겸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코끝이 시리고,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아팠다. 모질게 굴고 매몰차게 밀어내는 일은 윤태희뿐만 아니라 재겸 자신을 상처 입히는 일이었다. 재겸은 점점 한계에 치닫고 있었다.

“한심하게 굴지 마.”

재겸은 냉연함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정신 차려. 우리가 왜 손을 잡았는지 기억하란 말이야.”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재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재겸은, 윤태희에게 그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주먹을 힘껏 말아쥐었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한 차례 감정을 삼킨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가 신경 써야 하는 건 복수뿐이야. 죽지 않는 나를 방패막이로 삼아도 좋고,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네 앞을 열라고 해도 돼. 나는 네 복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재겸이 윤태희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나는 그러려고 네 곁에 있는 거야.”

윤태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맞아.”

윤태희는 그대로 말을 멈췄다. 말하면서 감정이 울컥 북받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먼 곳을 바라보며 감정을 삼킨 윤태희가 다시 재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피식 웃었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

“그리고 나는 그런 너를 사랑한 거고.”

“…….”

“그게 다야.”

“…….”

먼 곳을 노려보던 윤태희가 한참 만에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한심하게도, 고작 이런 일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하고, 너의 냉랭한 시선에 하루가 망가지고, 하루하루 조금씩 메말라가고 죽어가는 기분을 느껴야 한다는 게 우습다.

“오늘까지만, 이 밤이 지나면 전부 잊을게. 너는 없었던 일로 생각해도 돼. 정 그렇게 싫다면 뺨을 때려도 상관없어. 아니면, 지금까지 그냥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해.”

윤태희가 재겸의 양 뺨을 감싸 쥐더니, 코끝에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사실은 전부 거짓말이었던 거야.”

윤태희가 눈을 반쯤 내리뜬 채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도서실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좋았어.”

처음 봤을 때부터 시선을 잡아끌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원귀에게 기회를 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 기분이 묘했다. 알면 알수록 궁금했다. 생각해보면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차근차근 지나온 모든 순간이 계기였다. 좋아하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희뿌연 예감이었다. 어느샌가 마음속에 생겨난 이 희미한 불씨가 종국에는 나를 전부 망가트리고 내 모든 것을 불태우리라는 사실을.

“나례청을 부순다는 것도 복수한다는 것도, 사실 다 거짓말이었어. 널 꼬시려고 수작 부린 거야. 방상시에 대한 것도 전부 정신 나간 거짓말이고, 너는 여태 나한테 속았던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되는대로 지껄인 윤태희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너는 어쩔 수 없었다고 치면 돼.”

말을 마친 윤태희가 재겸의 뺨을 감싸 쥐더니 그대로 입을 맞췄다. 뭐라 대꾸할 겨를도 없이 재겸은 속수무책으로 키스에 휘말렸다. 깊은 입맞춤에 한순간 추락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윤태희의 입맞춤은 다정하고 쓸쓸했다. 마지막이라는 수식어가 떠오르는 키스였다.

뜨거운 숨결이 엉망으로 뒤섞이고, 한참 만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그리고 방금 건, 키스하려고 거짓말한 거고.”

코끝이 맞닿은 상태에서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

그에 재겸이 멍하니 윤태희를 올려다볼 때였다. 이제 됐다는 듯이, 윤태희가 천천히 손을 늘어트렸다. 재겸에게서 한 걸음 두 걸음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 윤태희가 힘없이 말했다.

“조심히 가.”

그 말을 끝으로 윤태희는 등을 돌렸다.

재겸은 휘청이며 골목 끝으로 걸어가는 윤태희를 붙잡지 못했다.

***

한동안 자리를 비웠던 재겸이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팀원들이 물었다.

“재겸아,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잠깐 전화가 와서요.”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안 좋아.”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재겸의 시선이 윤태희가 앉았던 자리로 향했다. 먼저 간 것인지 윤태희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재겸의 시선이 빈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걸 눈치 챈 강이빈이 입을 열었다.

“아, 수석님은 먼저 가셨어.”

재겸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 많이 드신 것 같던데.”

“그러게. 요즘 힘드신가 봐.”

팀원들이 걱정스레 말을 주고받았다. 이제까지 한 번도 주량을 넘긴 적 없던 윤태희가 오늘처럼 술을 마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런 것치고는 꽤 멀쩡해 보였고, 팀원들 역시 어느 정도 취한 상태였기에 윤태희가 취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멀쩡하게 계산을 하길래 생각보다 많이 취하지는 않았나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거 봐, 휴대폰도 놓고 가셨어.”

강이빈이 손에 든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윤태희가 떠난 후, 팀원들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휴대폰을 발견하고 나서야 윤태희가 만취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윤태희는 이미 한참 전에 가게를 떠난 뒤였다.

“아, 그래. 이빈아, 재겸이가 우리 중에 멀쩡하잖아.”

그때, 표지호가 강이빈을 툭툭 건드렸다.

“우리 취해서 이러다 또 깜빡한다. 재겸이한테 맡기자.”

“그럴까? 재겸아, 네가 갖고 있다가 내일 수석님한테 드려.”

강이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겸에게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잠시 주저하던 재겸은 윤태희의 휴대폰을 받아 재킷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팀원들은 어느새 2차에 가자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 재겸은 가게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막차가 끊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 했다. 그러나 재겸은 바로 택시를 잡아타는 대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냥 좀 걷고 싶었다.

재겸은 정처 없이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터덜터덜 걷다 보니 저 멀리 불 켜진 버스 정류장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버스가 다니지 않는 시간이어서 정류장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재겸은 정류장 벤치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서늘한 밤공기가 혼탁한 마음을 깊숙이 헤집었다.

재겸은 벤치에 멍하니 앉아서 텅 빈 차도를 바라보았다. 이따금 몇 대의 택시가 스쳐 지나갔다. 이럴 때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문득, 이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정류장에 앉아 있는 이 순간이, 어쩌면 제 삶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갈 곳이 있고, 나는 여전히 여기에 남아 있다.

나는 정류장처럼 이곳에 남아 있다. 누구든 왔다가 결국은 떠난다. 그렇게 마지막에는 나 혼자만 이렇게 덩그러니 남는다.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올 리 없고 내게는 가야 할 곳이 없다.

어떤 버스를 타더라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목적지에 데려다주지 않을 것이다. 가야 할 곳이 없음에도 일평생 방황해온 삶이었다. 이제는 그만두어도 된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됐다.

그래, 나는 이걸로 된 거다.

재겸은 익숙한 고독 속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재킷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윤태희의 휴대폰이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울렸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진동이 멈췄다. 혹시 윤태희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다시 전화를 걸고 싶지는 않았다.

윤태희의 휴대폰은 따로 잠금이 걸려 있지 않은 상태였다. 오던 전화가 그대로 끊기며 휴대폰은 홈 화면으로 돌아와 있었다. 재겸은 휴대폰 액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리저리 액정을 만지작거리자, 배너에 읽지 않은 메시지들과 알림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재겸의 눈에 보인 것이 있었다. 프렌즈팡 앱이었다. 한동안 프렌즈팡에 열을 올리며 매일매일 게임을 했지만, 섬에 다녀온 이후로는 자꾸 알림이 오는 것이 성가셔 앱을 지워버렸다. 그런데 윤태희의 휴대폰에는 여전히 프렌즈팡이 깔려 있었다.

재겸은 아이콘을 눌러 보았다. 게임에 접속해 보았더니 윤태희도 최근에는 게임을 하지 않았는지 기록이 없었다. 재겸은 자신도 모르게 손길이 가는 대로 하트 보관함을 눌러 보았다.

액정을 매만지던 재겸의 손이 멈칫했다.

김재겸님이 하트를 보냈습니다. (23일전)

김재겸님이 하트를 보냈습니다. (23일전)

김재겸님이 하트를 보냈습니다. (23일전)

김재겸님이 하트를 보냈습니다. (24일전)

김재겸님이 하트를 보냈습니다. (25일전)

김재겸님이 하트를 보냈습니다. (26일전)

김재겸님이 하트를 보냈습니다. (26일전)

아래로 내리고 또 내려도, 눈에 보이는 건 오로지 재겸이 보낸 하트뿐이었다. 팀원들도 같은 게임을 하고 있으니 다른 이름이 하나쯤은 끼어 있을 법한데도, 끝없이 아래로 내려도 결국 ‘김재겸’만 있었다. 일부러 남겨뒀다는 걸 바보가 아니고서야 모를 리가 없었다.

문득 눈가가 시큰거리며 열기가 몰렸다.

“…….”

결국, 재겸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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