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설명을 끝낸 윤태희가 서류를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손목을 젖혀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세 시를 지나고 있었다. 윤태희가 물었다.
“밥 먹었니?”
그에 재겸은 윤태희를 따라서 몸을 일으키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안 먹었어.”
그러고 보니 끼니를 놓쳤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윤태희가 걱정된 나머지, 무작정 여기까지 달려오는 데 정신이 팔려 밥 먹을 생각도 못 했다.
“그럼 같이 식사하고, 본청으로 넘어갈까?”
재겸이 멈칫했다. 윤태희는 어차피 늦은 김에 간단히 식사를 하고 본청으로 가자고 했다. 윤태희와 단둘이 밥을 먹는 건 불편했기 때문에, 재겸은 별 고민 없이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뭐라 대답하기 전에 윤태희가 뒷말을 덧붙였다.
“불편하면 어쩔 수 없고.”
깔끔하게 선을 그으며 물러나는 태도에 오히려 거절하기가 힘들어졌다.
“…….”
재겸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윤태희는 냉장고에서 재료에서 몇 개를 꺼냈다. 나가서 먹거나 배달을 시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윤태희는 말없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윤태희가 요리를 하는 동안, 재겸은 할 일이 없었다. TV가 있다면 보는 시늉이라도 할 텐데, 주변에는 온통 책뿐이었다. 재겸은 거실로 가서 괜히 책을 뒤적거리는 척을 했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칼질하는 소리는 꽤 안정적이었다. 의외로 요리하는 게 익숙한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잠시 뒤, 눈 깜짝할 사이에 요리를 마친 윤태희가 식탁 위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거실을 배회하고 있던 재겸이 의자에 앉았다. 윤태희가 만든 것은 볶음밥이었다.
“먹을 만해?”
윤태희가 물었다. 재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맛있었다. 윤태희가 해준 밥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멀쩡히 대화를 나누는 것도, 마주 앉아서 밥을 먹는 것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없이 밥을 먹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따금 식기가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빼고는,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숨 막히게 어색했다. 재겸은 수저를 움직이며 머릿속으로 윤태희가 알려준 계획을 곱씹어 보고 있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시기가 좋진 않네.”
밥알을 뒤적거리던 재겸이 말했다. 그러자 윤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요즘 벽사단 때문에 본청 분위기가 안 좋으니까.”
재겸의 입에서 불시에 ‘벽사단’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수저를 쥐고 있던 윤태희의 손이 짧게 멈칫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재겸은 윤태희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했다.
“예전에 비해서 경비가 많이 삼엄해졌어.”
얼마 전, 벽사단이 경주 지부를 야습하면서 최근 본청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살얼음판이었다. 지부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린 벽사단은 오는 칠석에 남은 공주 지부까지 부수겠노라 예고하며 노골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때문에 본청 안팎으로 경계가 드높아진 상황이었다.
“그러네.”
이런 상황에서 목패를 훔쳐도 괜찮은 걸까, 재겸은 문득 부담을 느꼈다.
“네가 말한 계획대로 움직여도 돼?”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반대로 말하면 기회일 수도 있어.”
“기회?”
“응. 벽사단이 이목을 끌고 있을 때 목패를 훔치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재겸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듣고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었다.
재겸은 어느덧 벽사단에 대하여 확연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부 습격을 계기로 본청 안에서 연일 벽사단에 관한 화제가 들려온 영향이기도 했지만, 사실 재겸에게는 그보다 앞선 계기가 있었다. 비마가 벽사단에 의뢰를 해 보라며 의견을 준 것이 그 계기였다.
“근데, 네가 지난번에 벽사단이 우리 계획에 문제 될 리는 없을 거라고 했잖아.”
재겸은 방상시가 돌아온다는 내용이 담긴 벽보를 보았을 때부터 벽사단과 방상시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윤태희에게 우려를 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윤태희가 ‘그럴 리 없다’라고 일축하면서 그때 이후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와는 상황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례청 안팎으로 벽사단의 주인이 방상시라는 소문이 퍼지더니, 얼마 전에는 벽사단이 경주 지부를 습격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주인은 방상시이며, 방상시를 복위하겠다’라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재겸이 물었다.
“근데, 만에 하나 정말로 벽사단의 주인이 방상시라면 어떡할 거야?”
윤태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어.”
“왜? 걔네가 이번에 직접 그렇게 말했잖아.”
“그래, 그래서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거고. 방상시는 신(神)이야. 신격의 존재가 굳이 귀신들을 끌어들여서 이런 일을 벌일 리는 없다고 보는데. 아마 벽사단 귀신들은 나례청이나 인간들한테 원한을 가지고 있을 거야. 방상시 운운하는 건 나례청의 분열을 바라는 거겠지.”
윤태희가 무감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윤태희는 일부러 방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나중에 벽사단을 움직여 탈을 빼돌렸을 때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도록. 방심했다가 손 놓고 당했다는 그림을 만들어야 했다.
“그럼 너는 벽사단의 진짜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뭐, 나례청을 해산시켜서 인간의 입지를 빼앗고 싶은 거겠지.”
시종일관 태평한 태도에, 재겸이 설핏 인상을 썼다.
나례청을 무너트리는 건 벽사단이 아니라 윤태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 네 생각은 알겠어. 근데 네 말대로 나례청을 해산시키려는 게 목적이라면 우리하고 목적이 같은 셈이야. 어쩌면 우리가 나서기 전에 벽사단에서 선수를 칠 수도 있어.”
“나례청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상대가 귀신이라면 더더욱.”
윤태희가 평이한 투로 대답을 꺼내 놓았다. 만에 하나 벽사단이 먼저 선수를 쳐서 본청에 쳐들어오는 일이 있더라도, 벽사단은 나례청의 문을 절대로 열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벽사단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재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태희가 턱을 괴고 넌지시 물었다.
“왜? 불안하니?”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은 한참 만에 고개를 저었다. 그에 재겸의 낯을 예리하게 살펴보던 윤태희는 알아차렸다. 재겸은 여전히 마음 한편에서 위기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듯했다.
윤태희의 의도대로였다.
경주 지부를 습격한 일은 잘한 일이다. 재겸이 벽사단에 대해서 저렇게까지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전과 비교했을 때 재겸은 확실히 벽사단을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윤태희가 바라는 것은 재겸이 계속 불안해하는 것이었다. 벽사단이 변수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계속 가져가기를 바랐다. 재겸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묵묵히 밥을 먹었다.
그렇게 오랜만의 식사는 무거운 정적 속에서 끝났다.
“잘 먹었어.”
재겸이 몸을 일으킬 때였다. 때마침 어디선가 전화가 울렸다.
"잠시만."
윤태희의 휴대폰이었다. 윤태희는 침실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식사가 끝난 식탁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던 재겸은 소파로 가서 윤태희를 기다렸다. 그러나 금방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던 윤태희는 몇 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통화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소파에 앉아 책을 뒤적거리던 재겸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무언가 잘못되어 죽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는 벽사단에 찾아가 이 생을 봉인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윤태희가 복수를 이뤄내는 데 벽사단이 훼방을 놓는 건 곤란했다. 당장은 윤태희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윤태희는 벽사단을 딱히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답지 않게 느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계획을 코앞에 둔 상황이니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자꾸만,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재겸은 책을 배 위에 올려놓으며 눈을 감았다.
***
“통화가 생각보다…….”
그리고 통화를 끝낸 윤태희가 거실로 나왔을 때, 재겸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침실 문을 열고 나오던 윤태희가 멈칫하며 말을 흐렸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까무룩 잠들었는지 고개는 옆으로 꺾여 있었고, 손가락 사이에는 윤태희가 읽고 있던 책이 끼어 있었다. 안 그래도 묘하게 피곤해 보이는 느낌이었는데, 실제로도 그랬던 모양이다.
“…….”
윤태희는 우두커니 서서 잠든 재겸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발이라도 묶인 것처럼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불현듯 윤태희는 탁 트인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땅거미가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줄곧 재겸과 거리를 유지하던 윤태희는 재겸이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재겸의 옆에 나란히 앉은 윤태희는, 재겸이 깨지 않도록 손에 들려 있던 책을 조심스레 빼냈다. 윤태희는 재겸의 손가락이 끼어 있던 페이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마치 어떤 징표라도 간직해 두려는 것처럼 책에 달린 가름끈을 대신 끼워 넣고 책을 덮었다.
“재겸아.”
잠든 재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입술을 달싹였다.
“이게 기만이야.”
윤태희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희미하게 속삭였다. 잠든 재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망가지더라도 상관없었다. 윤태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재겸이 제 곁에서 영영 불행하기를 바랐다. 해가 저물고 땅거미가 길어질 때까지, 윤태희는 재겸의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