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59)화 (259/348)

#259

음력 7월 4일. 어느덧 칠석이 코앞이었다.

영귀들은 칠석을 앞두고 공주 지부를 습격하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단주는 영귀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준비가 잘 되어 가고 있는지 점검하고자 이른 아침부터 누각을 찾았다.

“단주님, 오셨습니까.”

패현은 언제나 그렇듯이 단주가 누각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회색 후드를 입고, 편한 옷차림을 한 단주는 패현의 보좌를 받으며 나무로 된 복도를 걸어 나갔다.

“애들은?”

“아까 전에 불러 두었으니, 지금쯤 모여 있을 겁니다.”

평소 영귀들이 자주 모여 있는 방은 복도 제일 끝에 있었다. 단주는 문을 벌컥 열었다.

“안녕. 좋은 아침.”

노크도 없이 문을 연 단주가 여상히 인사를 건넸다. 제일 먼저 단주를 반긴 건 연옥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거문고를 정비하고 있던 연옥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단주님 언니야!”

활짝 웃으며 달려온 연옥이 단주의 품에 와락 안겼다. 방 안에 있던 나머지 영귀들도 제각기 인사를 건네며 단주를 맞이했다. 단주는 제 품에 안긴 연옥에게 제일 먼저 물었다.

“다들 준비는 잘하고 있니?”

그러자 연옥이 단주의 후드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응, 거문고 끈도 새로 걸었어! 칭찬해죠!”

“그랬어, 잘했네. 형운은?”

“술지게미를 짜내느라 힘들어 죽겠소!”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해. 다가는?”

다가가 옷고름으로 입가를 가리며 다소곳하게 말했다.

“작두 칼에 기름칠을 해 두었습니다. 제가 전부 멱을 따겠습니다….”

얌전한 말씨와 상반되는 살벌한 내용에, 단주가 빙그레 웃었다.

“목은 안 따도 돼, 적당히 겁만 줄 거야.”

경주 지부 습격 때와 마찬가지로, 적당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 그걸로 충분했다. 경주 지부를 습격한 것은 나례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공주 지부를 습격하는 건 ‘굳히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 습격은 본청으로 쳐들어가기 위한 중간 과정인 셈이었다. 다음에는 본청을 노릴 것을 예고한 뒤, 그대로 치고 빠진다는 계획이었다.

“이제 사흘 뒤야.”

아직 목패를 되찾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단주는 나자들과 직접적인 충돌을 할 수는 없었다. 단주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믿고 맡길 수 있는 건 영귀들뿐이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마지막 주 토요일에 목패를 되찾고, 본청으로 진격한다. 모든 지부를 잃은 본청은 만반의 준비를 하며 벽사단을 막으려 할 것이다. 영귀들이 나례청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동안, 단주는 본청 내부에 있다가 나례청장의 숨통을 끊고, 탈을 빼돌릴 생각이었다.

처음과는 다소 계획이 달라졌지만, 갑자기 달라진 지휘에도 영귀들은 순순히 잘 따르고 있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즐거운 건지, 영귀들은 하나같이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통통 튀는 성격들이라 다루기가 힘들긴 했으나 그래도 나름 착실히 준비하고 있으니 특별히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단주가 영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했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할게.”

계획대로 재겸은 확실하게 벽사단을 의식하게 되었다. 공주 지부를 습격하는 것은 쐐기를 박을 생각이었다. 윤태희의 복수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나, 단주의 계획은 성공할 것이다.

“그럼, 화끈하게 날뛰어 줘.”

다행히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

음력 7월 5일. 칠석 이틀 전.

나례청은 공주 지부 건설을 위한 공사를 전면 중단했고, 벽사단의 공격에 대비하여 현장 인근에 배치될 인력과 본청 주둔 인력을 소집하였는데 마침내 오늘 그 명단이 공개되었다.

소집 명단은 각 층의 공문란에 붙었으며, 이후 개별적으로 통지할 것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방송을 듣자마자 재겸과 제1팀 팀원들은 곧바로 복도로 나가서 명단을 확인했다.

명단 속에는 제1팀 팀원들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명단에서 제외된 사람은 재겸, 딱 한 명뿐이었다. 재겸은 칠석날 본청에 있을 수 없었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미성년자와 노약자, 초라니와 수습 나자는 자택에서 대기하라는 재가(在家)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정규 인력이 아닌 이상, 위험 부담이 있는 소집에서 제외되는 건 당연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재겸은 왜인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례청을 부수기 위해서 들어왔고, 그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맺은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팀원들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막상, 함께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이 위험한 현장에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예상보다 훨씬 더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제일 심란한 점은 윤태희 역시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팀원들 역시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물론, 윤태희는 핵심 전력이다. 그러나 윤태희는 최근 크게 부상을 당했고 완전히 회복했다고 하기에는 이른 시기였으므로, 팀원들은 윤태희가 공주 현장이 아닌 본청에 주둔하게 되리라 예상했었다. 그래서 재겸도 그럴 줄로만 알았다.

재겸은 힐끗, 눈을 들어 윤태희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윤태희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딱히 놀란 기색 없이 태연해 보였고, 명단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팀원들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온 재겸은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 재겸은 윤태희가 있는 수석실로 걸어갔다.

윤태희는 컴퓨터로 업무를 하는 중인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우스를 딸각거리고 있었다. 재겸은 열린 문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들어오셔도 돼요.”

기다렸다는 듯이 수석실 안으로 들어온 재겸은 문을 탁, 닫았다.

“나도 갈래.”

여전히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윤태희가 반말로 물었다.

“어디를?”

“공주.”

마우스를 딸각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윤태희의 눈동자에 한순간 이채가 스쳤다가 휙 사라졌다. 윤태희는 태연한 표정으로 눈을 들었다. 재겸을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왜?”

그야 네가 다치거나,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걱정되니까.

재겸은 오늘도 악몽을 꾸었다. 딱히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윤태희가 명단에 있는 것을 본 순간부터 마음이 불안했다. 혹시라도 그곳에 갔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됐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한다 하더라도 윤태희는 걱정하지 말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 뻔했다. 다행히 재겸에게는 꽤 그럴듯한 핑계가 있었다.

“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난 계속 신경 쓰여.”

“뭐가?”

“벽사단 말이야.”

“…….”

“그러니까 나도 벽사단이 어떤 놈들인지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겠어.”

윤태희의 낯이 한순간 싸늘해졌다.

씨발.

재겸이 벽사단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위기감을 심어주려는 차원일 뿐이지,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들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설마 직접 따라오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의자를 뒤로 물리며 다리를 꼬았다.

“네가 강하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아.”

윤태희는 무감정한 눈으로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뭐든지 참견하려고 하면 곤란해.”

“…….”

“너는 네 할 일을 하면 돼. 정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면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 볼 테니 필요 이상으로 나서진 말아줬으면 하는데. 충분히 집중하고 있고. 계획을 움직이는 건 나야.”

“…….”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렇게 대책 없이 구는 것 좀 고쳤으면 해. 만약 거기 갔다가 위험에 빠져서, 네 정체라도 들키면? 수습 나자인 너는 가봤자 아무것도 못 해.”

“…….”

냉철하면서도 이성적인 대답이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재겸은 왠지 화가 났다. 사실은 네가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고, 네가 다칠까 봐 두렵고,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겁이 나서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마음을 윤태희가 모르길 바라면서, 모른다는 것에 화가 나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너를 두고 떠나겠다고 말해놓고서, 너를 걱정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반칙이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거리를 바란 건 재겸 자신이었다. 재겸은 자신이 대체 뭘 이렇게까지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서 화가 났다. 그저 한 배를 탄 동료에 대한 걱정이라고 하기엔 지나친 수준이라는 걸 재겸도 깨닫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재겸은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

***

음력 7월 6일. 칠석 전야.

오후 8시를 기점으로 나례청은 본 청사의 출입을 통제하고, 모든 업무를 중단했다. 재가 명령을 받은 재겸은 일찍 퇴근해 사무실을 나섰다. 소집된 나자들은 어제부터 현장에 배치되었고, 덕분에 상당수의 인원이 공주로 향한 터라 본청은 평소에 비해 한산하고 썰렁한 분위기였다.

본청을 나오자, 늦은 저녁임에도 거리가 북적거렸다. 쥐 죽은 듯 고요하고 삭막한 전운이 감돌던 본청 내부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꼭 딴 세계에 온 기분이었다.

재겸은 건너편 버스 정류장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 앞으로 향했다.

말다툼으로 이어질 뻔한 어제의 대화를 끝으로, 윤태희는 팀원들과 함께 공주로 떠났다. 마음만 같아선 함께 가고 싶었지만, 윤태희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팀원들에게 데려가 달라 말해볼까 생각도 했으나 수습 나자를 굳이 위험하게 데려가 줄 리도 없었다. 현장 위치를 안다면 몰래 따라가기라도 하겠는데 재겸은 위치도 몰랐다.

결국, 재겸이 할 수 있는 건 집으로 돌아가는 일밖에 없었다.

“…….”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던 재겸은 휴대폰을 꺼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무겁고 힘든 건지 알 수 없었다. 고민하던 재겸은 머뭇거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사실은.너를걱정해」

입력한 메시지를 보던 재겸이 고개를 저었다.

「머슨일잇으면.연락해.」

지우고 다시 써 봤으나 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몸조심해.」

한 번 더 내용을 바꾼 후에야, 마음이 섰다.

윤태희를 내버려 두고 죽기로 결심한 이상 이러면 안 되는 거다.

“…….”

재겸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인상을 썼다.

자꾸 가슴이 답답했다. 사이가 멀어진 이후로, 윤태희와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재겸은 결국 메시지를 보내지 못하고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칠칠아!”

어디선가 날아든 목소리에, 재겸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임효문…?”

임효문이 매우 놀란 표정으로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섬에 돌아온 이후로 2주 동안 칩거하던 당시에는 연락이 자주 왔었다. 그러나 전화도 받지 않고, 답장도 하지 않았더니 임효문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칠칠아, 너 살아 있었어!?”

임효문은 득달같이 달려와서, 숨을 씩씩거리며 안부를 물어댔다.

“야이씨, 나는 너 잠수 퇴사한 줄 알고…!!”

“오랜만이네. 잘 지냈냐?”

“잘 지냈지, 임마!! 너 대체 왜 연락을…!!”

임효문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재겸을 붙잡고 짤짤 흔들어댈 때였다. 갑자기 벨소리가 들렸다. 임효문이 펄쩍 뛰더니 재킷 주머니를 마구 더듬거렸다.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헉, 잠깐만. 나 전화 좀.”

재회의 반가움에 몹시 흥분해 있던 임효문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아, 네네. 네. 저 본청 앞이요. 넵, 알겠슴다아. 넵!”

“누구 전화길래 그렇게 굽신거리냐.”

재겸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런데 임효문은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좌우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칠칠이에게 할 말이 많았으나, 하필이면 이런 때에 만나서 시간이 없었다.

“아, 미안. 나 지금 가 봐야 해! 어? 저 차인가?”

임효문이 고개를 쭉 빼고 차도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우리 팀 선배가 데리러 온다고 해서.”

“어디 가는데?

“나 공주 내려가야 돼.”

뭐? 재겸이 멈칫하며 임효문을 쳐다보았다.

“공주? 네가 왜? 수습은 제외잖아.”

“원래는 그런데, 수석님이 이것도 다 경험이라고 나도 데리고 간대. 우리는 후방 지원이니까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 수습 나자여도 그냥… 어!? 저 차다! 왔다!”

저 멀리 검은색 카니발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차를 발견한 임효문이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들더니, 재겸의 어깨를 붙잡고 “나중에 톡해. 알았지? 빠이!” 하고 빠르게 말을 속삭였다.

“어? 야, 야… 잠깐만!”

그에 재겸은 저도 모르게 임효문의 팔을 잡았다. 임효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겸을 돌아보았다. 잠시 주저하던 재겸이 주변을 돌아보았다가, 임효문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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