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63)화 (263/348)

#263

“내가 할게.”

영귀를 향해 검을 겨누었던 재겸이 비틀거리며 이마를 움켜쥐었다.

재겸은 불력의 영향으로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칠칠아!” 재겸이 창백한 낯으로 휘청이자, 임효문이 놀라서 재겸을 부축하려 들었다. 그러자 재겸이 임효문의 손길을 뿌리쳤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빨리 가라고.”

“널 두고 어떻게 가? 못 가! 같이 가!”

재겸은 임효문이 차라리 저를 혼자 내버려 두고 도망치기를 바랐다. 임효문이 있어봤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자칫 정체가 탄로 날까 봐 걱정되었던 탓이다. 게다가 몸 안에서 재앙신의 기운이 불안정하게 날뛰고 있다는 것을 재겸 또한 느끼고 있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임효문이 이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재겸 입장에서는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효문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재겸은 벽사단을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이렇게 투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벽사단이 있었다.

결국, 재겸은 임효문을 밀쳐내고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

단주는 고민에 빠졌다.

재겸과 맞서 싸우는 이상 어느 한쪽은 다칠 수밖에 없다. 만약 이곳에 재겸 혼자만 있었다면 자리를 피했을 것이나, 곁에는 임효문이 있었다. 먼저 자리를 피하고 떠난다면 의심을 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단주가 바란 것은 저 둘이 먼저 도망치는 것이었다. 때문에 패현을 통해서 언질을 주었으나, 두 사람은 단주의 바람과는 달리 도망치지 않았다. 만약 먼저 도망쳤다면 깔끔하게 상황이 정리되었을 것이나, 이렇게 선제로 덤벼 온다면 싸움을 피할 겨를이 없었다.

만약 이쪽에서 먼저 자리를 피하고 떠났다가는, 남겨진 임효문에 의해서 본청으로 이야기가 흘러 들어갈 것이다. 안 그래도 석주련이 심증을 가지고 있는 와중에 모양새가 부자연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제스쳐를 취해야 했다.

단주는 석주련이 어째서 자신의 공주행을 막지 않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심증만 가지고 있는 석주련은 어쩌면, 재겸과 저 사이의 확실한 물증을 잡으려고 하는지도 몰랐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재겸이 다치지 않도록 적당히 기절시킨 후, 자리를 뜨는 편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가 재겸이라는 것이다.

자칫하다간 패현이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나자들에게 지급된 검은 평범한 검이 아니라 귀신을 벤다는 사인검이었다. 사인검에 베인다면 아무리 패현이라도 멀쩡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험 부담이 큰 상황에서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하라고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주문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패현에게 맡기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패현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안심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재겸이 크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윤태희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짧은 고민 끝에, 단주는 제 앞을 가로막고 선 패현의 어깨를 잡았다. 단주가 직접 나서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패현이 멈칫하며 단주를 돌아보았다.

“…….”

패현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지만 단주와 편히 말을 섞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겸과는 일전에 도서실에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 목소리를 들었을 테니, 패현 역시 정체가 발각될 염려가 있는 상황이었다. 면사로 가린 탓에 서로의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패현의 시선이 얼마간 단주를 향해 머물렀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무언의 우려에 답하듯, 단주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물론 재겸을 직접 상대하는 일은 단주에게도 큰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정체가 들통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껏 재겸과 몸싸움을 하거나 주먹 다툼을 한 적은 있었어도, 검을 섞어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얼굴을 가리고 있고, 붉은 두루마기에 깃든 원념과 사특한 기운에 단주 본연의 기운이 묻혀 있는 상태였다. 또한, 사방에 연기가 자욱하여 시야가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재겸이 자신의 정체를 쉽게 눈치채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패현은 단주에게 검을 건네고 뒤로 물러났다.

단주는 검을 건네받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재겸을 향하여 자세를 잡았다. 단주는 검 자루를 쥔 손아귀에 천천히 힘을 실으며 두 눈을 감았다. 적당한 기회를 노려 의식을 잃게 만든 후,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제발. 단주는 심호흡했다.

마음속으로 되뇌던 단주가 마침내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재겸이 검을 들고 땅을 박차고 올랐다.

챙!

검과 검이 격돌했다. 검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금속성의 울림이 퍼졌다. 밀어붙이는 힘에 뒤로 밀려났던 단주가 재겸의 검을 한 차례 밀어냈다. 단주와 재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단주의 적색 두루마기 자락이 열기 섞인 바람에 펄럭였다.

빠르게 눈을 굴리며 기척을 좇던 패현이 눈을 크게 떴다.

재겸의 검 실력은 몹시 걸출했던 탓이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재겸은 현재 불력의 영향을 받아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필요한 움직임이 없었고,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뒤로 나자빠져 있던 임효문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임효문 역시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재겸이 저렇게 검을 잘 다루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움직임이 워낙 빨라서 눈으로 따라가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민첩성과 순간의 기지로 도달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검을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챙! 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빚어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재겸은 귀감을 활짝 열고 단주의 기척에 집중하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자욱하고 시커먼 연기에 가려져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재겸은 거의 기척에 의지하다시피 하여 단주의 움직임을 좇는 중이었다. 활짝 열린 귀감으로 느끼는 단주의 기운은 기묘했다. 신격이라고 하기에는 사특하고, 왜인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방상시가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두루마기에 배어 있는 기운이 강렬하여 분간해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계속 검기를 따라가다 보니 확실히 보통 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단지 검을 몇 번 섞은 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단주는 재겸의 움직임을 예상하였고, 재겸이 어디를 노릴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그동안 재겸이 상대했던 이들 가운데서 단주는 손에 꼽을 정도로 월등한 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따라오는 사람은 지금껏 묘정, 휘림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재겸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어?

재겸의 손이 멈칫했다. 순간 빈틈이 생기자, 단주가 도리어 당황했는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빈틈을 노리지 않은 것인지, 노리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재겸이 재빨리 자세를 잡았다. 재겸은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검을 섞다 보니 불현듯 떠오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휘림이었다. 단주의 검기는 휘림의 검기와 아주 흡사했다.

유려한 검술, 부드러운 보법,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공격을 되받아치는 방식.

설마… 휘림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휘림은 분명 오래전에 죽었을 터다. 그런데, 죽어서 영귀가 될 가능성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휘림이라고 단정 짓자니 단주는 휘림과 체격도 기운도 달랐다. 그러나 워낙 오래전이었기에 긴가민가한 느낌이었다.

상념이 섞여들자, 재겸의 자세가 다시 흐트러졌다.

재겸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몇 차례 검을 섞으며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검이 단주의 얼굴 근처로 향할 때마다 단주는 필요 이상으로 움직임이 굳고,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분 탓일까, 재겸은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목 아래쪽으로 검을 휘두르는 척을 하다가 팔을 비틀었다.

검을 올려치자, 재겸의 검 끝이 면사에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면사 끝자락이 사락, 잘려 나갔다. 그러자 단주가 멈칫하며 상체를 확 뒤로 뺐다.

“…….”

재겸은 눈에 힘을 주고 단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 검이 면사에 닿는 것을 맞기 위해 단주의 움직임에는 커다란 빈틈이 생겼다. 단주는 머리에 덮어쓴 면사가 급소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면사가 훼손될까 우려하느라 움직임이 흐트러진 게 틀림없었다.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간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단주는 당장은 면사를 사수하는 게 우선인 것처럼 보였다.

단주는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 혹시, 일면식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수상한 행동은 재겸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을 증폭시켰다.

게다가 아까 전부터 몇 번이고 검을 찔러 넣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단주는 어째선지 그 틈을 노리지 않고 다소 방어적인 태도로 임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기만 했다.

“너 누구야?”

단주와 잠깐 떨어진 순간, 재겸이 콜록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그러자 흐트러진 너울을 고쳐 쓰며 숨을 고르던 단주가 멈칫하더니, 이쪽을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단주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목소리라도 들려준다면 의심을 거두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단주는 정체를 유추할 만한 어떤 것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다시 검이 맞붙었다.

이번에는 검으로 찌르는 척하며 손을 뻗었다. 흑색 면사가 재겸의 손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단주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때문에 빈틈이 생기고 말았다. 재겸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검을 푹 꽂아 넣었다. 재겸의 검 끝이 옆구리를 베어내듯이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검게 물든 땅바닥에 단주의 피가 투둑, 떨어졌다.

‘…단주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상황을 관전하던 패현이 숨을 들이켜는 순간이었다.

재겸은 그대로 손을 뻗었다. 검은 면사에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때였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단주가 검을 내팽개치더니, 코앞에 다가온 재겸의 손목을 그대로 콱 움켜잡았다.

단주가 재겸의 움직임을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한 패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재겸의 등 뒤로 이동한 패현은, 손날에 귀기를 실어 재겸의 목 뒤를 퍽 후려쳤다. 이대로라면 위험하여, 더 이상 잠자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불시에 끼어든 패현의 손길에 재겸이 윽,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그러자 임효문이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고함을 쳤다.

“칠, 칠칠아!”

그 틈을 타 패현은 단주를 데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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