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64)화 (264/348)

#264

눈을 떴을 때는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재겸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주변을 확인하던 재겸은 눈을 끔뻑거리며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칠칠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재겸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 깼냐?”

고개를 돌리니, 옆 병상에 팔에 깁스를 한 채 누워 있는 임효문의 모습이 보였다. 단주와 검을 겨루던 것까지는 떠오르는데,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어쩐지 머리가 아팠다. 재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재겸과 임효문은 본청과 연계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지난밤 공부 지부를 비롯한 주변 산림 일대가 화재로 인해 전소되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며 벽사단의 습격 사건은 일단락이 났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인명 사고보다는 오히려 불로 인한 피해가 커서 진화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고, 현장 일대에 나자들이 파견되어 현장 수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벽사단이 공주 지부를 부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나례청은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예상했던 것만큼 피해는 크지 않았다.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본보기 차원에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부상 당한 나자들은 다친 정도에 따라 정화부와 연계된 병원, 혹은 본청 치료실로 이송되었다고 했다.

재겸과 임효문은 몇 시간 후, 나자들이 주변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둘이 발견된 장소는 지부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였다. 명단에 없는 수습 나자 두 명이 의식이 잃은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나자들이 두 사람을 곧장 병원으로 이송했다고 한다.

임효문은 기절한 재겸을 둘러업고 도망치다가, 화재 현장에서 연기를 흡입한 여파로 얼마 못 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지면서 비탈을 구른 탓에 부상을 당했다. 재겸은 가벼운 타박상 정도에 그쳤지만, 임효문은 불운하게도 오른쪽 팔에 골절을 입었단다.

화재 연기를 흡입한 두 사람은 병원에서 하루 이틀 머무르며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재겸은 임효문의 이야기에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가장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깨어난 순간부터 묻고 싶었다. 윤태희는 무사하느냐고.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그때, 임효문이 속내를 읽은 것처럼 해맑게 말했다.

“너네 팀도 전부 다 무사하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다행히 윤태희도 무사한 듯했다. 다만, 윤태희의 말을 어기고 공주로 몰래 쫓아갔다가 치료실에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도 아무런 연락조차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휴대폰을 찾을 때였다.

“어? 뉴스에 우리 얘기 나온다.”

재겸이 누운 병상에 앉아서 제집인 양 티비 리모컨을 매만지던 임효문이 어느 순간 눈을 반짝 빛냈다.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가, 팔에 통증을 느꼈는지 “억!” 하며 허리를 숙였다.

- …다음 소식입니다. 오늘 새벽 공주의 한 야산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산림 천 오백 제곱미터를 태우고 두 시간 만에 꺼졌습니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등산객이 버린 화기 용품에서 화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원인을 조사 중입니다. 다행히 접수된 인명 피해나 재산 피해는 없으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재겸은 어느 순간 임효문의 기색을 살폈다.

임효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해 보였다. 그러나 재겸은 왜인지 마음이 불안했다. 단주와 검을 겨룬 뒤로 기억이 없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불력의 영향으로 재앙신의 기운이 불안정하던 참이었다. 혹여 의심을 살 만한 모습을 보인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야.”

“응?”

“너… 나, 나한테 할 말 없냐?”

재겸이 애써 덤덤한 척 입을 열었다. 그러자 티비를 보고 있던 임효문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재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임효문이 한참 만에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너한테 궁금한 게 있었어.”

재겸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뭐, 뭔데.”

임효문이 심각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너도 검도 배웠냐?”

“…….”

잠시 긴장했던 재겸이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말해 봐. 배웠어, 안 배웠어?”

“그래, 배웠다고 쳐….”

“진짜? 어쩐지. 해동검도야, 대한검도냐?”

천만다행으로 임효문은 별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재앙신의 봉인이 풀려 있는 상태인 데다, 어제는 특히 상태가 불안정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임효문의 반응으로 보아하니 의심을 살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재겸은 일단 한시름 놓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재겸은 임효문과 더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의식을 되찾자마자 연락이 갔는지, 현장 조사를 맡은 나자들이 재겸이 머무르는 병실에 찾아와서는 어제 일에 관하여 이것저것 물어댔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벽사단과 정면에서 맞닥뜨린 것도 모자라, 단주와 검을 섞었다고 하니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저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아니 글쎄, 들어 보세요.”

재겸이 뭐라 말할 겨를도 없이 임효문이 알아서 어제의 무용담을 펼쳐놓았다.

“멀미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던 애가, 검을 잡자마자 갑자기 눈빛이 확 바뀌는 거예요!”

이래서 나서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임효문은 오늘도 변함없이 시끄러웠다. 그래도 크게 다친 곳 없이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조사차 방문했던 나자들이 떠나고, 이번에는 간호사가 찾아왔다. 그동안 재겸의 옆에 앉아서 쉴 새 없이 입방정을 떨어대던 임효문은 간호사의 호출을 받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제1팀 팀원들이었다. 팀원들은 재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온 참이었다. 재겸은 팀원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동안 꾸중을 들어야 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기까지 갔던 거야?”

특히 강이빈으로부터 호되게 혼이 났다. 강이빈은 재겸이 몰래 합류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부터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재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표지호가 현장에서 경미한 화상을 입은 것을 제외하면 팀원들 모두 무사하다고 했다. 그렇게 팀원들은 한참 동안 돌아가며 눈물 빠지게 재겸을 혼낸 뒤에야 자리를 떴다.

병실에 혼자 남겨진 재겸은 병상 위에 털썩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쨌든 윤태희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조금 무모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옆구리를 찌를 때 재겸은 확신이 있었다.

휘림이라고 단정 짓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 단주가 휘림의 검기를 구사하는지 궁금증이 생기며, 단주에게 전에 없던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재겸은 어제 기회를 잡았고 더 확실하게 치명상을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재겸이 그러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순간 망설였기 때문이다.

윤태희의 복수를 위할 것인가, 나의 죽음을 위할 것인가.

윤태희의 복수에 있어 벽사단은 명백한 불청객이었다. 윤태희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일축했으나 재겸의 생각은 달랐다. 벽사단과 윤태희의 궁극적인 목표가 같다면, 언젠가는 방해물이 될 것이다. 만일을 대비해 위험한 싹은 처음부터 잘라내는 게 낫다.

따라서 어제 그 자리에서 당장 해치워버리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재겸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벽사단은 윤태희의 복수를 방해하는 불청객인 동시에 재겸에게는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이다. 윤태희가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죽기가 불가능해지면 찾아가서 봉인해달라고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차후를 위해서라면 필요 이상으로 적대감을 보이거나 큰 해를 끼치면 곤란해진다.

단주와 대치하던 마지막 순간에 제대로 찌르지 않고, 검 끝으로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그 갈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순간의 망설임이 낳은 결과였다.

그런데, 어제 보았던 단주는 어떻게 됐을까…….

한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재겸 군? 안에 있어요?”

그러던 어느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주영이에요.”

재겸이 멈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난데없는 한주영의 방문에 재겸은 긴장했다. 어째서 한주영이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무언가 덜미라도 잡힌 걸까. 딱딱하게 낯을 굳힌 채 병실 문을 바라보던 재겸이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한주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치자, 한주영이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몸 좀 괜찮아요?”

재겸이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걷기 힘들거나 움직임에 무리가 있는 건 아니고요?”

“네.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한주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위에서 호출이 내려왔어요.”

“…네?”

호출? 재겸이 고개를 들고 한주영을 바라보았다.

“청장님께서 재겸 군을 보고 싶다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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