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65)화 (265/348)

#265

“청장님께서 재겸 군을 만나고 싶다고 하세요.”

한주영의 말을 듣는 순간, 재겸은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청장님께서 너를 궁금해하시더군. 시험날 사슴을 봤다는 소문을 들으셨던 모양이야. 조만간 호출이 있을 테니 뵙고 인사드리도록 해.”

나례청장이 저와 만나기를 희망한다는 사실은 일전에 석주련을 통해서 한 차례 언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서 어느 틈엔가 잠시 잊고 있었다. 혹시 공주 지부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뭔가 덜미라도 잡힌 걸까?

제 발 저려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하필이면 시기가 좋지 않았다. 어제 그런 일이 있고 난 직후에 나례청장으로부터 호출이 떨어졌다는 게 기이하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교롭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언제쯤 뵙는데요?”

“오늘 밤입니다.”

잠시 주저하던 재겸이 물었다.

“저를 부르는… 특별한 용건이 있나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한주영이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리며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한주영도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호출은 석 부장을 거쳐 내려왔고, 한주영은 어디까지나 안내를 해 주러 온 것이었다.

재겸의 낯빛이 좋지 않아서, 한주영은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아, 혹시 재겸 군이 벽사단 귀신들과 맞서 싸웠으니까, 그걸 치하하려고 그러시는 건 아닐까요? 벌써 본청에 소문이 파다하거든요. 게다가 청장님께서는 이전부터 재겸 군을 눈여겨 보고 계셨다고 하니까요. 벽사단과 직접 붙은 사람은 재겸 군밖에 없기도 하고….”

말을 흐리던 한주영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쨌든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편하게 생각하세요.”

재겸은 일단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주영은 저녁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위에서 호출이 내려왔다는 사실을 함구에 부쳐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병실을 떠났다.

그렇게 한주영이 떠나고, 병실에 홀로 남은 재겸은 생각에 잠겼다.

한주영은 청장으로부터 호출이 왔다는 사실을 함구하라고 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난번에 석주련과 면담을 했던 당시에는 윤태희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괜히 윤태희의 마음을 들쑤시고, 어지럽히는 화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말할 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만약 이렇게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만날 줄 알았다면 진작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도 청장과의 만남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비상사태였다.

윤태희에게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알리고, 당장 저녁에 있을 만남을 대비하여 상의를 해야만 했다. 잠시 고민하던 재겸은 휴대폰을 찾았다. 곧바로 윤태희의 번호를 눌렀다.

-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윤태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

낮에는 맑았던 하늘에 어느샌가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하더니, 오후부터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자정을 앞둔 밤이 되자 한주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내려오라는 내용이었다. 1층으로 내려왔더니 못 보던 자동차 한 대가 도착해 있었다.

재겸은 한주영이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한주영은 재겸을 데리고 본청으로 향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재겸도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결국, 밤이 깊도록 윤태희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화를 몇 통이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할 얘기가 있으니 전화를 달라고 문자까지 보냈지만 끝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건 처음이었다. 재겸은 결국 윤태희에게 청장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본청에 도착한 재겸은 한주영의 안내를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청장실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주영이 버튼 몇 개를 한꺼번에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어느 층에서도 멈추지 않고 끝없이 위로, 위로 올라갔다. 재겸은 점점 초조해졌다.

청장은 어떤 사람일까.

나례청장은 윤태희의 원수였다. 윤태희가 평생을 바쳐가며 복수를 꿈꾸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대체 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걸까.

한주영의 말대로 그저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려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일전에 석주련과 면담을 할 때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때도 석주련이 무언가 추궁을 하면 어쩌나 싶어 잔뜩 긴장했었지만, 막상 별일이 없지 않았던가. 재겸은 애써 의연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간 끝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어둑어둑하고 기나긴 복도가 펼쳐졌다. 터널처럼 긴 복도였으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문 하나뿐이었다. 기묘한 분위기에, 재겸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끝에 문 보입니까? 저기로 가면 됩니다.”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것은 한주영이었다. 한주영은 손가락을 들더니 어떻게 들어가면 되는지 경로와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한주영이 동행하여 안내해 주는 건 여기까지였다.

재겸은 한주영이 일러준 대로 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 끝에 이르러 문을 열자 휑한 청장실 내부가 보였다. 재겸은 서재로 이어지는 문으로 향했다. 그 문을 열었더니 이번에는 나무로 된 문이 나왔다. 이게 마지막 문일 것이다.

재겸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넓은 정원이 보였다. 탁 트인 정경에, 재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쾌청한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으며, 동그란 달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딴 세계에 온 것 같았다. 너른 정원 끝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본청 안에 어떻게 이런 곳이 있는지 새삼 놀랍기만 했다.

비현실적인 풍경에 압도당한 재겸은 얼마간 굳은 채로 서 있었다. 어느 순간 번뜩 정신을 차렸다. 너른 정원을 가로질러 안채에 도착했다. 재겸은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창호지로 된 문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릴 때였다.

“뭐 하니? 어서 들어오지 않고.”

재겸이 온 것을 알았는지,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겸이 움찔했다. 재겸은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제일 먼저 커다란 병풍이 보였다. 그리고 병풍 앞에는 짧은 백발 머리에 풍성한 한복을 입은, 노인 여성이 앉아 있었다.

“앉으렴.”

청장은 자신을 소개하지도 않았고, 재겸에게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태연하고 친숙한 태도였다. 청장은 손수 차를 내리더니 한 잔을 건네주었다.

“길을 헤맸느냐? 차를 미리 내려 두었는데 다 식었구나.”

뭐라 인사를 건넬 겨를도 없이, 재겸은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다. 온돌바닥에 놓인 좌식 탁자를 사이에 두고, 청장과 마주 보고 앉게 된 재겸은 이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그래도 제법 좋은 차란다. 식었어도 들 만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청장은 재겸의 앞에 찻잔을 밀어주었다.

차를 권하는 몸짓에서는 격식이 묻어났다. 재겸은 제 앞에 놓인 차를 마시지 않았다.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조용한 경계를 읽은 청장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똘똘하구나.”

청장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필시 그날 뭔가 배운 게 있었던 모양이야. 남이 권하는 대로 마셨다가 화를 입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지.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된다.”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재겸이 설핏 눈매를 좁혔다.

“…….”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겸은, 저도 모르게 청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태희의 원수구나. 태희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삶을 망가뜨린 사람인 거다. 그런데 청장은 의외로 아주 소탈하고 수수한 인상이었고, 동시에 어딘지 고아해 보였다. 만약 길에서 마주쳤다면 꽤 지체 높은 노인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이상하게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어른을 그렇게 쳐다보는 건 좋지 않아. 다 늙어서 뭐 볼 게 있다고.”

그때, 차를 따르며 미소를 머금고 있던 청장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젊음은 한철이라…….”

청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젊음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지. 그래도 젊을 적에는 꽤나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거울을 볼 때마다 언제 이렇게 초라하게 늙었는지… 스스로가 낯설고, 괜히 쓸쓸해진단다.”

청장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재겸이 찻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늙는다는 건, 아무렴 추한 일이니까 말이야.”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찻잔으로 손을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 게 당연한 거예요.”

“하지만 넌 그렇지 않잖니.”

찻잔을 들던 재겸의 손이 멈칫했다.

……뭐?

재겸이 번쩍 고개를 들어 청장을 바라보았다. 청장은 고개를 돌린 채 먼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던 청장이 재겸과 눈을 마주쳐 왔다.

마침내 재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크게 뜨인 눈동자가 사정없이 경련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수향?”

마침내 재겸의 손에서 찻잔이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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