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66)화 (266/348)

#266

“…수향?”

재겸이 눈을 크게 뜨며 눈앞에 있는 청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다. 어째서 수향이 나례청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 아니, 그전에 수향이 어떻게 여태껏 살아있을 수 있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역시, 알아보았구나.”

그때, 청장이 두 눈을 휘며 웃었다. 인자하게 접히는 눈매를 본 순간, 재겸은 그제야 확신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이었다. 어디선가 틀림없이 본 적이 있는 시선이었다. 알 수 없는 위화감과 기시감이 마구 뒤섞여, 재겸의 사고를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

재겸은 황급히 제 기억 속에 있는 수향의 외양을 되짚어 보았다. 재겸이 기억하는 수향은 사내였다. 오래전의 기억 속에 있던 수향은 갓을 쓰고,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눈앞에 있는 수향은 어딜 봐도 늙은 여성의 모습이었다. 재겸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했다. 그러자 재겸이 속내를 눈치챘는지, 수향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렇지, 나를 사내로 알았던 모양이구나.”

사기로 만들어진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수향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래, 그때는 사내인 척 변복을 하고 돌아다녔지.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말이야. 그러던 때가 있었구나. 여인을 잘 모르는 이들은 쉬이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테지. 그 시절에는 아예 드문 일도 아니었어. 왕왕 사내로 위장하는 여인들이 있었지. 여인으로 살아가기에 힘들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야. 설마 알아볼까 싶었는데, 눈썰미가 좋구나.”

순간, 재겸은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진정 수향이란 말인가? 성인 남성치고 약간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격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설마 여자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재겸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네가… 어, 어떻게….”

머릿속이 정지한 느낌이었다. 비단 수향의 성별을 착각하여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나례청장을 만나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떤 표정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었다. 나례청장은 윤태희의 원수였다. 그런 청장과 단둘이 대면하는 일은 재겸에게도 몹시 불편한 일이었다. 행여 섣불리 분노하거나 적대를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청장은 오래전에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던 수향이었다.

그래서 재겸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 무슨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자고,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나 재겸은 지금 이 순간 어쩔 수 없이 동요하고 있었다.

상상치도 못한 정체에 큰 충격을 받은 재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재겸은 혼란스러웠다. 정녕 이것은 현실인가?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향이 왜 저를 기다린 것인지, 지난 세월 동안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있었던 건지, 어떻게 나례청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인지, 전부 의문투성이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야. 같은 땅이건만, 가끔은 이렇게나 세상이 격변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구나. 과거에 비할 데 없이 세상이 좋아졌으니…….”

그러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재겸과 달리, 수향은 아주 평온해 보였다.

“나는 지금의 이 땅을 몹시 사랑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이 땅을 몹시 증오했단다. 이런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에 하루하루 처절한 고통을 느끼던 시절이었지.”

수향은 사대부 출신으로, 명망 높은 양반 가문의 자제였다.

만약 그때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남들처럼 혼인하여 아이를 낳고, 여인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향이 바란 삶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향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그러나 여인으로 살기에 제약이 많던 시절이었다. 여인이 야망을 품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세상이었다. 수향은 그 야망을 쟁취해내기 위해 험한 세상 바깥으로 나왔다.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구나.”

말을 이어 나가던 수향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긴, 너로서는 꽤 놀랄 법도 하지.”

그때였다. 수향이 등지고 앉은 병풍 뒤에서 낯선 것이 튀어나왔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재겸이 흠칫, 시선을 던졌다. 병풍 뒤에서 나온 것은 새까만 털을 지닌 고양이였다.

“오랜만에 손님이 와서 반가운가 보다.”

수향은 익숙하게 손을 뻗어 고양이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눈치로 보건대 수향이 키우는 고양이인 듯했다. 잠시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빛으로 재겸을 올려다보던 고양이는, 이내 사뿐사뿐 걸어오더니 재겸의 무릎에 볼을 부비고 지나갔다. 고양이가 하품을 하며 꼬리를 바르르 떨었다. 호박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재겸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고양이가 수향을 돌아보며 먀웅, 하고 작게 울음소리를 냈다.

“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고양이와 눈을 맞추며 수향이 웃었다.

“이 눈에 온 우주가 담겨 있지.”

부드러운 손길로 고양이를 쓰다듬던 수향이 불현듯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 아이도 꽤 오랜 세월을 살았어. 본래 수명대로라면 백 년도 더 전에 죽었어야 했지. 그러나 욕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외로움을 핑계로 여적 보내 주질 못했단다.”

수향은 감회에 젖은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어느덧 주변 이들은 다 떠나고, 홀로 남았다는 외로움을 너도 알 것이다. 가끔은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내가 나로 있을 때, 내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고 편하게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 한 명 없다는 것이, 그거 하나는 아쉽더구나.”

잠시 감상에 빠져 있던 수향이 고개를 돌려 재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아주 기쁘구나.”

수향은 정말 진심으로 재겸을 반기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너와 다시 만나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재겸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저와 다시 만날 줄 알고 있었다는 수향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수향은 재겸과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오래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묘정이 이승을 하직하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저를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인생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크게 상처를 입은 재겸은 그대로 마음의 문을 닫고 오랜 세월 동안 속세를 떠나 있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수향은 한때, 소년의 행적을 찾기 위해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어찌나 잘도 꼭꼭 숨었는지, 머리털 한 올 보이지 않았고 끝내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수향은 재겸을 찾는 것을 그만두었다. 불안하지는 않았다. 죽지 않는 소년은 분명 어디에선가 살아있을 것이고,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수향은 재겸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기필코 저를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향의 예상은 적중했다.

“당, 당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지?”

재겸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역시 그것이 궁금한 모양이구나. 피차 너나 나나 마찬가지이면서 말이야. 하긴, 나 역시 궁금하단다. 너야말로 지금까지 어떻게 늙지 않고 살아있었는지 말이야.”

수향은 재겸과 다시금 조우하게 된 이 상황이 퍽 즐거운 듯했다.

“하지만 서두를 것은 없지. 마침내 기다리던 만남이 성사되었으니 이 밤은 더없이 뜻깊은 날이 되겠어. 밤은 길고 이곳에는 우리뿐이니, 천천히 그간의 회포를 풀자꾸나.”

그렇게 말한 수향은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렇게 너를 만나니 옛 생각이 나는구나.”

나무 살을 덧대어 만든 창문틀 바깥으로 광활하고 맑은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수향은 감회에 젖은 눈빛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단다. 언젠가는 기필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지. 죽지 않는 몸이 된다는 건 누군가에겐 형벌과도 같고, 누군가에겐 축복일 거야.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없으면 삶이 지루해지니 말이야. 영영 고갈되지 않는 젊음이라면 더더욱.”

잠시 말을 멈춘 수향이 재겸을 바라보았다.

“헌데, 설마 나자가 되어 내 앞에 오리라고는 생각 못 했어.”

“…….”

“그래, 해서, 무엇이 너를 이곳으로 이끌었느냐?”

“…뭐?”

“이름이 태희라 했던가.”

그 순간, 재겸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그 아이가, 꽁꽁 잘도 숨어 있던 너를 세상으로 끌어낸 것이냐?”

재겸의 눈동자가 거세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수향은 재겸의 동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탁자 위에 팔을 걸치며 미소를 지었다. 수향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재겸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방상시의 탈을 빼앗아서 널 죽여주겠다고 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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