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옷 벗어 봐.”
재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윤태희가 짧게 멈칫하며 재겸을 내려다볼 때였다.
“옷 벗어 보라고.”
재겸은 또렷한 눈으로 윤태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
잠시 침묵하던 윤태희는 조용히 물었다.
“왜 그러는데?”
어제 단주와 검을 겨루었을 때, 분명히 윤태희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종일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는 치료받는 와중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늘따라 올 블랙 슈트를 입었고, 평소보다 향수 냄새가 짙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상처를 숨기기 위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생각을 거듭할수록 공교롭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흩어져 있던 조각들은 하나같이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수향의 말대로 벽사단을 이끌고 있는 게 윤태희라면,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윤태희가 단주라면 아직 상처가 남아 있을 것이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상황이니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을 테고, 만약 정화부의 약수를 쓴다고 하더라도 고작 하루 만에 상처가 낫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은 파문처럼 일어난 의심은 어느덧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재겸은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 그런데 윤태희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짝 놀란 것 같기는 했으나, 허를 찔려서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럴 듯한 반응이었다.
“너, 나한테 속인 거 있어?”
잠시 주저하던 재겸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를?”
“저번에 알고 지내는 영귀가 있다고 했었지.”
그 순간, 윤태희의 눈가 한쪽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래.”
재겸이 천천히 눈을 들고 윤태희를 쏘아보았다.
“언제, 어디서 만났어?”
“절에서 지낼 때.”
“어떻게 알게 된 건데?”
“그냥 우연히.”
단조로운 답변이 이어지자, 재겸은 초조한 낯으로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듣고 싶은 말이 뭔데?”
재겸이 고개를 들어 윤태희의 눈을 또렷하게 쳐다보았다. 시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윤태희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겸은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쪽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윤태희는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았다. 재겸은 입술을 꾹 겹쳐 물었다. 역시나 이런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정확한 과녁을 앞에 두고도, 괜히 주변을 선회하며 대답을 이끌어내는 건 고문이었다.
“벽사단의 주인, 혹시 너야?”
결국, 재겸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
윤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미동조차 없이 재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묵묵히 재겸을 바라보던 윤태희는, 어느 순간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는가 싶더니,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며 큼지막한 손으로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 정도면 혹시나 하는 수준이 아니라, 확신이네. 그렇지?”
얼마간 골똘한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굳이 나를 믿을 필요 없다고 말은 했었지만, 솔직히 놀랐어.”
잠시 말을 멈춘 윤태희가 자조적인 어투로 중얼거렸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거든. 너한테 나는 ‘몰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인간’이었다는 소린데. 하긴,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아무래도 사람 보는 눈이라는 게 있겠지.”
윤태희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재겸에게 시선을 던졌다.
“뭐,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데 이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
그 말을 끝으로, 윤태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
재겸과 마주 보고 서 있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천천히 손을 들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고 있던 슈트 재킷을 벗었다. 이어서 넥타이 매듭 틈으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단정하게 묶여 있던 넥타이가 스르륵 풀려나가며 발치에 툭 떨어졌다.
어느덧 와이셔츠 한 벌 차림이 된 윤태희는 손목 소매에 달린 단추부터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뒤이어 목 끝까지 채운 와이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톡, 톡, 풀어나갔다.
와이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풀어낸 윤태희가 헐렁해진 셔츠 밑단을 옆으로 훌쩍 들어 올리더니, 복근과 옆구리를 보여주었다. 어두컴컴한 병실에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창문 바깥에서 비쳐오는 불빛뿐이었으나, 몸의 굴곡과 피부를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납작한 복근과 근육이 붙은 탄탄한 몸매가 드러났다. 윤태희의 몸을 확인한 재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고개를 들자, 윤태희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만족해?”
윤태희의 옆구리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
재겸은 빗속에서 어두운 밤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재겸의 의심에 응하여 요구대로 옷을 벗고 몸을 보여준 윤태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옷을 입더니, 그대로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병실을 휙 빠져나갔다. 재겸은 그런 윤태희를 붙잡지 못했다. 윤태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병실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던 재겸은 그로부터 한참 뒤, 병원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의심암귀. 무언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없던 귀신도 생긴다고 했다.
수향의 농간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흘려보내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럴 리 없다며 무작정 덮어놓고 부정하기에는 그동안 쌓여 있던 정황들이 의심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고, 한편으로는 수향의 말에 혹하여 흔들리고 있는 이런 자신이 싫었다. 의심을 잘라내려면 직접 확인하는 편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윤태희가 어떤 심정일지는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만족해?’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이 뇌리에 박혀 따끔거렸다.
차라리 윤태희가 저에게 화라도 냈으면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야 묘정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수향의 말은 틀렸지만, 결국은 수향의 손아귀에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에 현혹되어 흔들린 사람은 저인데, 애꿎은 윤태희만 몰아세운 꼴이다.
윤태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몹시 우스운 상황이었다.
애초에 화를 냈어야 할 사람은 윤태희다. 위험하니 따라오지 말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공부 지부에 찾아갔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실은 네가 벽사단의 주인이고 나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되려 추궁했다. 생각해보면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너, 나한테 속인 거 있어?’
윤태희를 향해 그렇게 물었지만, 윤태희에게 떳떳하지 못한 건 재겸 자신이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외면하며 윤태희를 밀어내고 모질게 굴었다. 그런 주제에 윤태희를 걱정하면서, 걱정한다는 말 한마디 솔직하게 하지 못했다. 그래 놓고서 윤태희를 의심한 거다.
‘이 정도면 혹시나 하는 수준이 아니라, 확신이네.’
무엇보다 용납할 수 없는 것은, 한순간이나마 윤태희가 정말로 벽사단의 주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재겸은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혐의를 눈치챘다.
나는 어쩌면 수향이 코앞으로 내민 죽음에 혹한 나머지, 내 마음 편하자고 윤태희에게 덮어씌우려고 했던 건 아닐까? 만약 수향의 말대로 윤태희가 벽사단의 단주이고, 이제까지 저를 속여왔다면, 그것을 빌미로 삼아 수향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새삼 이런 제 자신이 비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윤태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청장을 만났다는 것도, 청장이 수향이라는 것도, 수향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도, 조영우를 만났다는 것도, 죽여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는 것도, 재겸 혼자만 아는 사실이었다. 멍하니 길을 걷던 재겸은 어느 순간 홀연히 걸음을 멈췄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재겸은 문득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 삶을 끝내려면 윤태희를 버리고, 수향의 손을 잡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윤태희를 위해서라도 수향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사실 수향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윤태희를 잡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다.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윤태희가 계속해서 계획을 진행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정주와 메산이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재겸은 현재 기로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