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비가 내리는 거리를 하염없이 걸으며, 재겸은 멍하니 생각했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부 저 때문이라는 사실을. 수향이 재겸을 알아본 순간부터 이 계획은 실패한 것이었다.
살갗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빗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 재겸은 쓰러지듯이 잠에 빠졌다.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평소처럼 잠으로 도피했으나 그마저도 편하게 도망칠 수는 없었다. 비를 맞아서인지 열이 오른 탓이었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수향이 건넨 말은 약해진 마음을 파고들어 독처럼 퍼져 나갔다. 메산이와 정주는 번갈아 방을 드나들며 이마 위에 물수건을 올려주었고 재겸의 상태를 확인했다. 재겸은 잠결에 헛소리를 하며 끙끙 앓았다.
‘너였으면 좋겠어. 역모에 가담해줄 사람이.’
윤태희는 그렇게 말했지만, 재겸이 윤태희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윤태희의 복수는 망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겸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수향의 눈에 띈 순간부터였다.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재겸을 나자로 만든 윤태희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때문에 수향으로서는 재겸과 윤태희의 관계를 주시하게 된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결과, 수향은 재겸의 정체를 시작으로 하여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쉽게 유추해냈다. 뿐만 아니라 몇 가지 단서만으로 재겸과 윤태희의 계획을 꿰뚫어 보았다.
만약 윤태희가 재겸이 아닌 평범한 귀재를 후임으로 데려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물론, 재겸은 다른 누구보다도 목패를 확실하게 되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명부실에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아무런 시도조차 못한 상태에서 목패를 되찾는다는 계획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재겸은 열에 달뜬 머리로 생각했다.
윤태희는 나를 선택해서는 안 됐던 것이다, 라고….
재겸은 그렇게 밤새도록 소리 없이 끙끙 앓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져 있었다. 잠결에 헛소리를 하며 끙끙 앓은 탓에, 재겸이 아프다는 것을 눈치챈 메산이가 새벽 내내 직접 치유를 하고 곁에서 돌봐준 덕분이었다. 머릿속은 어느새 씻은 듯이 개운해져 있었다.
익숙한 천장을 올려다보던 재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느덧 남은 시간은 일주일이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윤태희의 목패를 되찾는 날과 겹치는 날이었다. 이대로라면 모두가 위험할 것이었다.
재겸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수향에게 가서 네가 원하는 대로 내 몸을 줄 테니 누구에게도 손대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주와 메산이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조영우는 풀어달라고 하자. 아쉬운 건 그쪽도 마찬가지니까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윤태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이다. 복수는 어차피 실패했고 너는 할 만큼 했으니, 괴롭겠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전부 잊어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살라고 하는 거다.
“…….”
재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늦은 저녁, 알람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 윤태희는 평소보다 멍한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저녁 출근이었다. 지난 며칠이 폭풍처럼 흐른 탓에 평화로운 순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윤태희는 흑진주에 입술을 붙이고 흑제를 불렀다.
얼마 전, 윤태희는 흑제에게 묘정에 대해서 알아 오라고 부탁을 해둔 참이었다. 그동안 조사에 진척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단주는 예를 갖추고 나타난 흑제를 향해 물었다.
“아직 멀었니?”
“아직 쓸 만한 정보는 찾지 못했습니다.”
묘정에 관한 정보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묘정은 지금은 사라진 선대 나례청의 나자이자, 약 200년 전인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이었다. 워낙 오래전 인물인 데다, 주어진 정보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조사가 쉽지 않았다.
흑제는 오래 산 귀신과 영물을 중심으로 수소문하여 알아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얼마 전, 묘정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는 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단서를 잡았다. 흑제는 그리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단주가 작게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래. 알겠어.”
단주는 여러모로 심란한 기색이었다.
언제나 계획 바깥으로 튀어 나가는 소년 때문에 단주가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사실을 흑제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공주 지부를 습격하는 과정에서 단주가 큰 부상을 당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패현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난 단주는 옆구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덕분에 그날 영귀들은 난리가 났다.
다가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으며 작두칼을 손에 들었다. 누구든 말만 하라며, 목을 베어오겠노라고 했다. 연옥 역시 누가 그랬느냐며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악다구니를 썼다.
자칫하면 정체가 들킬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단주는 다행히 하루 만에 상처를 깨끗하게 치료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 섬에 다녀오고 나서 재겸을 통해 받아두었던 메산이의 약수가 남아 있던 덕분이었다.
메산이의 약수를 남겨두지 않았다면 치료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화부의 약수 정도로는 하루아침에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 물론, 아무리 메산이의 약수라고 해도 뼈가 부러졌거나 검에 꿰뚫린 수준이었다면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단주의 옆구리에 난 상처는 다행히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깊이만 스친 수준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메산이가 준 약수를 뿌리자 눈 깜짝할 사이에 상처가 아물었다.
단주는 누각에서 상처를 치료한 후에 본청으로 복귀했다. 덕분에 재겸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지만, 설마 옷을 벗어보라고 할 줄은 몰랐다. 처치를 하지 않고 어제와 같은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임효문이 본청에 소문을 낸 탓에 재겸이 단주와 검을 섞었고 그 과정에서 옆구리에 상처를 냈다는 소식은 어느덧 본청에 일파만파로 퍼져 있던 상황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리해서 치료를 했는데, 치료가 늦어졌거나 약수가 모자라 상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대로 들통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재겸의 의심을 샀다는 생각에 어제만 해도 상황이 절망적으로 느껴졌으나, 이제 와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겸이 직접 두 눈으로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더 이상 벽사단과 저 사이를 연관 짓지 못할 것이고, 이걸로 의심을 완전히 종식한 셈이었다.
전화위복이었다.
단주는 묘정에 대해 뭔가 알아낸 것이 생기는 대로 다시 찾아오라고 말한 뒤, 흑제를 돌려보냈다. 이제 본청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소파에 앉았던 몸을 느릿느릿 일으킬 때였다.
어느 순간 휴대폰에서 띠링, 소리가 울리며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어디야.?」
발신인은 재겸이었다. 윤태희는 멈칫하여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날 선 말투로 밀어붙인 탓에 먼저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잠시 답장을 고민하는데, 뒤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랑.밥먹자.」
***
저녁이 되자, 윤태희는 집 앞으로 재겸을 데리러 왔다.
둘은 인사를 나누지도,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재겸이 차에 타자마자 윤태희는 먹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었다. 그에 재겸은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말했다. 뭔가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윤태희와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밥을 먹자고 대충 구실을 만들었을 뿐이다. 윤태희는 말없이 차를 몰았다.
차가 멈춰 선 곳은 전에 와본 적 있는 식당이었다.
생선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백반집이었다. 언젠가 윤태희와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재겸이 평소 좋아하는 식당이라는 사실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재겸이 알기로 윤태희는 해산물이나 비린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저번에 왔을 때도 깨작거리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일부러 저를 위해서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재겸은 어쩐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저녁 시간이 지난 무렵이라 가게 안은 한산했다. 가게 구석에는 혼자 반주를 기울이는 손님 한 명뿐이었다. 사장은 빈 테이블에 앉아 무료한 얼굴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재겸과 윤태희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으니, 사장이 물과 물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윤태희는 저번처럼 뚝불을 주문했다. 그러자 사장이 “뚝불은 지금 안되는데.” 라고 했다. 뚝불을 제외하면 윤태희가 먹을 만한 것은 없었다. 잠시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윤태희는 결국 삼치구이를, 재겸은 갈치 조림을 주문했다.
주문을 마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밥을 먹자고 불러낸 건 이쪽이니 뭐라도 운을 띄워야 하는데, 왜인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재겸이 말을 고르는 사이, 윤태희는 물수건으로 손을 꼼꼼히 닦더니 재겸의 앞으로 냅킨 한 장을 깔고 수저를 놔주었다. 말도 안 했는데 컵에 물도 따라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윤태희는 세심하고 다정했다. 사소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모습이었다.
윤태희의 행동을 눈으로 좇다가, 재겸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 어제….”
“응.”
말을 꺼내놓고 망설이자, 윤태희가 물었다.
“…….”
분명히 결심이 섰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윤태희의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