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어제….”
재겸이 망설이며 운을 띄우자, 물컵을 입으로 가져가던 윤태희가 움직임을 멈추고 재겸을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간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윤태희 앞에서, 재겸은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며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의 10년은 실패했다는 말.
다른 이야기는 다 제쳐두고라도, 목 끝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을 전하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분명 결심이 섰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인지, 막상 윤태희를 보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마치 누가 입술에 아교풀이라도 발라놓은 것 같았다. 뭐라 입술을 달싹이려던 재겸이 스르륵 시선을 내렸다.
“…아냐, 아무것도.”
재겸은 결국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에 윤태희는 아무런 말 없이 재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에 쥔 물컵을 내려놓았다.
“그래.”
윤태희는 더 묻지 않았다. 하려던 말이 뭐였냐며 파고들지도 않았고, 공주 지부에서 있었던 일이나 어제 병원에서 재겸에게 추궁당했던 일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없었다.
맥없이 대화가 끊기며,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재겸은 말없이 수저를 들었다. 입맛이 없었지만 먹는 시늉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숟가락을 들고 억지로 한술 떴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기계적으로 식사를 했다. 마치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재겸의 앞에 접시 하나가 끼어들었다. 윤태희가 본인 몫으로 주문한 삼치구이였다. 잔가시 하나 놓치지 않고 살이 빠짐없이, 꼼꼼하게 발려 있었다.
“왜 나를 줘?”
접시에 담긴 생선을 바라보던 재겸이 고개를 들었다.
“나 생선 잘 안 먹어서.”
“그럼 왜 시켰는데?”
윤태희가 지나가듯이 대꾸했다.
“저번에 섬에서 잘 먹는 것 같길래.”
그 말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
얼마 전, 거여도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머무르던 민박집에서 제철 해산물로 가득한 저녁 식사를 했었다. 그날 밥상에는 노릇하게 튀긴 삼치구이가 올라왔었는데, 그걸 아주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었다. 윤태희는 재겸이 무엇을 먹는지 눈여겨보았다.
“너도 그때 이거 잘 먹었잖아.”
“그거야 차려준 성의가 있으니까.”
편식이 심하던 윤태희는 그날 군말 없이 밥을 먹었다. 그 말인즉슨 평소라면 입에도 대지 않았을 음식이었지만 식사를 대접해 준 정성을 생각해서 성실하게 먹었다는 소리였다.
“…….”
재겸은 잠시 말없이 접시를 보았다.
“그럼 넌 뭐랑 밥 먹으려고?”
“밑반찬이랑 먹으면 돼.”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마음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재겸은 왜인지 화가 났다.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그만인 것을, 평소 입에 대지도 않는 생선구이를 고른 것. 아니, 애초에 이런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에 저를 배려하여 식당을 고른 것.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남의 밥 챙겨준답시고 생선 살만 발라내서 고스란히 넘겨주는 것. 밥을 먹자는 말에 이유도 묻지 않고 알겠다고 한 것.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 화를 내지 않는 것.
“야.”
재겸은 탁, 소리가 나도록 수저를 내려놓았다.
“너나 신경 써.”
젓가락질을 하던 윤태희의 손이 멈칫했다.
“내가 언제 너더러 생선 살 발라 달랬어?”
송곳처럼 튀어나온 날 선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
재겸은 차라리 윤태희가 화를 내거나 집요하게 캐물어 주기를 바랐다. 같이 밥을 먹자고 한 건 처음이었다. 저라면 왜 밥을 먹자고 했느냐며, 할 얘기가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윤태희의 말을 어기고 멋대로 공주 지부에 찾아간 것, 그래놓고 터무니없이 윤태희를 의심한 것에 대하여 화를 내주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뭐라 변명이라도 할 수 있을 거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방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태희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윤태희의 복수를 망가트린 건 재겸 자신이었다.
윤태희의 복수와 제 죽음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재겸은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다. 마음 속으로 윤태희의 복수를 등졌다. 오늘은 그 말을 하려고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그런 재겸에게 생선 살을 발라주고 있었다. 재겸은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건 윤태희의 잘못이 아니었다. 말을 하지 않았으니 윤태희가 아무것도 모르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 상처를 받아야 할 이도 윤태희고, 화를 내야 할 이도 윤태희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윤태희의 다정함에, 재겸은 제풀에 상처를 입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게.”
그러던 어느 순간, 윤태희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내가 또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네.”
윤태희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팔 한쪽을 테이블에 올린 느슨한 자세로 젓가락질을 이어나갔다. 시선을 내린 채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나가던 윤태희가 피식 웃었다.
“웬일로 먼저 같이 밥 먹자고 하길래, 애새끼처럼 들떠서 그랬나.”
태연하고도 자조적인 대꾸에, 재겸의 눈가 한쪽이 짧게 떨렸다.
“네 기분 잡치게 만들었다는 거 잘 알겠으니까, 오늘은 그냥 밥 먹어.”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재겸은 알아차렸다. 이건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윤태희가 차라리 저에게 못되게 굴고,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모질게 대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
“…….”
재겸은 결국 몇 술 뜨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완전히 끝이 났다.
“더 먹어.”
윤태희가 말했다.
“…….”
재겸은 고개를 저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렇게 별다른 대화 없이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집으로 갈 거니?”
윤태희가 물었다. 재겸은 오늘 휴무였고, 윤태희는 이제 출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재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윤태희가 차 키를 꺼내며 말했다.
“타. 집까지 데려다줄게.”
“됐어. 넌 출근 해. 나는 알아서 갈게.”
“데려다주고 가도 안 늦어.”
그러나 재겸은 들은 체도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알아서 갈 테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네 갈 길 가.”
완강한 거부에, 윤태희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재겸을 응시했다. 먼저 밥을 먹자고 해놓고서 이유 없이 화를 냈고, 별것도 아닌 호의를 거절했다. 제멋대로 굴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럼에도 재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윤태희는 재겸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윤태희를 뒤로한 채 재겸은 터덜터덜 걸었다. 어느새 밤이 깊어 있었다. 별생각 없이 걷다 보니 금세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정류장에 도착한 재겸은 빈 의자에 털썩 앉았다.
“…….”
재겸은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려고 만나자고 한 게 아니었는데.
발밑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울적하고 답답했다. 윤태희와 얼굴 맞대고 있는 것조차 괴로워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괜히 화풀이를 해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대의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가 떠나기를 반복했다. 그동안 몇 대의 버스가 와서 멈춰 섰으나, 재겸은 말뚝에 매인 사람처럼 그 어디로도 가지 못했다. 도시의 밤은 어둡고 서늘했다.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 불빛이 소년의 음울한 뺨을 쓰다듬고 떠나기를 반복했다.
버스 정류장은 언제나처럼 소리 없이 소란스럽고, 쓸쓸했다.
새삼스럽지만 꽤 익숙한 감각이었다. 모두 갈 곳이 있으나 재겸만은 여전히 이 자리에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고독과 막막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모든 세상이 잿빛처럼 보였다.
재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광막하고 쓸쓸한 세상에 홀로 동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올 리 없고 나는 가야 할 곳이 없다. 어떤 버스를 타더라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목적지에 데려다주지 않는다. 가야 할 곳이 없는데도 일평생 방황해온 삶이었다. 이제는 정말이지 전부 그만두고 싶었다. 재겸은 어느덧 한계까지 내몰려 있었다. 낭떠러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먼저 떠나지 않으면 내가 남겨진다. 먼저 버리지 않으면 내가 버려진다. 그런데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아무것도 뒤돌아보지 말고 떠나면 돼. 그러니까 제대로 선택하란 말이야….
문득 눈가에 열기가 몰리는 것 같았다. 재겸이 험하게 눈을 짓이길 때였다.
빵, 빵—
그때, 어디선가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재겸은 경적이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느 순간, 재겸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그리 멀지 않은 대로변에 윤태희의 자동차가 서 있었다.
재겸의 시선이 향하기를 기다렸는지, 클랙슨 소리가 멈췄다. 차를 발견한 재겸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재겸은 꿈쩍도 않고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운전석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윤태희가 차에서 내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재겸이 오지 않으니 직접 나온 모양이었다. 재겸에게 가까이 다가온 윤태희가 물었다.
“밤이 늦었어.”
헤어진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본청에 있어야 할 윤태희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너는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재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여는 순간 또 화를 내거나 못된 말을 할 것 같았다.
“가자.”
그때, 윤태희가 재겸의 앞에 쪼그려 앉더니 눈높이를 맞췄다.
“데려다줄게.”
윤태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이런 식이다. 아까 전에도 분명히 혼자 알아서 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물었다.
“어디를?”
“…뭐?”
재겸은 지금 집에 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디에 갈 줄 알고 데려다주겠다는 건데.”
재겸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음울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묻잖아. 내가 어디로 갈 줄 알고 데려다주겠다는 거냐고.”
“…….”
윤태희는 얼마간 먼 곳을 응시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재겸에게 시선을 주었다. 산란하는 자동차 불빛이 반딧불이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쓸쓸한 풍경 속에서, 윤태희가 말했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훌쩍 몸을 일으켰다.
“버스에 타지 않을 거라면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어.”
윤태희가 손을 뻗었다.
“가자.”
그 순간, 재겸은 알아차렸다.
나는, 나의 슬픔보다 너의 슬픔이 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