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미안해. 널 좋아해.”
윤태희의 가슴팍을 힘껏 움켜쥐고 있던 손이 새하얗게 곱아들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손아귀로 옷자락을 잡아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던 재겸이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미안해 널 좋아해
미안해 널 좋아해
미안해 널 좋아해
윤태희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재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울음기가 얼룩덜룩 묻어 있는 고백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럼에도 재겸은 이 말을 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아주 오랫동안 숨을 참은 사람처럼, 그렇게 몇 번이고 같은 말을 털어놓았다.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은 욕지기처럼 넘쳐흐르고 있었다.
‘미안해. 널 좋아해.’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소년은 아주 먼 길을 돌아와야만 했다.
나의 슬픔보다 너의 슬픔이 괴로워질 때.
삶의 아픔과 절망으로부터 너를 막아서고 싶었다. 과거라는 이름의 녹슨 족쇄로부터 너를 풀어주고 싶었다. 만약 세상이 악의를 품고 너에게 칼을 겨눈다면, 단숨에 그 목을 잡아 비틀고 너의 앞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네가 너로 있을 수 있도록, 너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윤태희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안해’와 ‘좋아해’는 한 몸처럼 붙어있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 좋아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부정하고 싶었다. 전부 너 때문이라고.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너의 이기적인 사랑을 탓하며 내게 멋대로 병을 옮기고 나를 엉망으로 만든 너를 책망하고 싶었다.
재겸은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도망쳤다. 그러나 이제는 막다른 길이었다. 더는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그리하여 재겸은 마침내 저를 뒤쫓아온 거대한 감정과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태희야.”
제일 먼저 든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내가 네 10년을 망가트린 거야.”
공주 지부에 찾아간 것, 너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 것, 때리고 상처를 주었던 것, 섬에서 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치게 한 것, 호수에서 멋대로 너를 끌어올려 이 지옥에 데려다 놓은 것,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기 위해서 너를 기만한 것, 멋대로 너를 걱정하고 구해낸 것…….
그리고 재겸이 저지른 이 모든 후회들은, 윤태희를 좋아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안해. 너를 좋아해서 그랬어.”
재겸의 ‘내일’에 윤태희가 있었던 순간부터였다.
“네가 좋아서 그랬어…….”
윤태희의 지난 행보를 부정하는 일은 곧 재겸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너였으면 좋겠어. 역모에 가담해줄 사람이.’
너는 나를 선택해선 안 됐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걸지도 몰라.’
너와 나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너와 함께하는 매일이 생일 같아.’
너는 내게 손을 내밀지 말았어야 했다.
“수향이 안 죽고 살아 있었어. 청장이 나를 불렀는데. 그게 수향이었어.”
숨 가쁘게 울던 재겸은 횡설수설 수향과 재회한 날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수향을 만났고, 곁에 조영우가 있었고, 수향은 귀재를 제물로 바쳐 삶을 연명해 오고 있었고, 모든 계획을 간파당했다는 것까지 재겸은 눈물과 함께 전부 쏟아냈다. 처음으로 말을 배운 사람처럼 엉터리로 이어붙인 이야기였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고, 순서도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두서없이 나열된 정보들이었지만, 윤태희는 용케도 모든 내용을 알아들었다.
“…….”
어느 순간, 줄곧 재겸의 밑에 깔려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재겸이 윤태희를 깔고 앉은 상태였지만, 윤태희가 몸을 일으켜 앉으니 순식간에 눈높이가 높아졌다. 윤태희는 고개를 기울여 제 허벅지에 앉은 재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재겸아.”
윤태희는 손을 뻗어 눈물로 축축해진 재겸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따끈따끈한 미열이 느껴졌다. 우느라 상기된 얼굴은 붉어져 있었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우는 얼굴을 얼마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재겸이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재겸은 울 때 아주 서러운 얼굴이 된다는 걸, 윤태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재겸아.”
윤태희가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나 좀 봐.”
고개를 기울여 재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윤태희가 조용히 속삭였다. 재겸의 귀밑을 감싸 쥐고 재차 목소리를 냈으나, 재겸은 여전히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내기 바빴다.
“재겸아.”
재겸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겸아.”
재겸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나 좋아해?”
“…….”
재겸은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나 좋아해?”
윤태희가 재차 확인하듯이 묻자, 재겸이 고개를 다시 숙였다.
“안 좋아하려고 했어.”
재겸의 음성은 울음기가 섞여 잔뜩 뭉개져 있었다.
“근데 그럴 수가 없었어.”
끼니마다 무얼 먹었는지 궁금해하는 너를, 무얼 먹었다 하면 어김없이 맛있었느냐고 물어보던 너를, 나에 관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걸 기억하는 너를, 실은 누구보다 악의로 점철된 삶을 살았으면서 세상이 호의적이었노라고 말하는 너를, 노인에게는 친절하고 아이에게는 다정한 너를, 이름부터 반짝이는 너를, 이상하고 향기로운 너를
“그럴 수가 없었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량하고 척박한 땅에 쥐도 새도 모르게 피어났던 새싹이 있었다. 새싹을 돌보기엔 재겸은 너무나도 무기력했으며,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지쳐 있었다. 사람의 마음에도 탄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재겸은 자신의 일상에 소리 없이 찾아온 활력과 생기를 선뜻 거머쥐지 못했다.
그렇게 무엇 하나 일궈내지 않았음에도, 가녀린 새싹은 어느샌가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고 울창한 숲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재겸은 끝까지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상실의 공포는 재겸의 마음을 불구로 만들었다. 그저 착각일 뿐이라고, 아니 그 숲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고, 그저 한순간의 신기루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기 바빴다.
그러나, 우습게도 정신을 차려보면 재겸은 여전히 그 숲속에 있었다.
태웠던 숲은 신기루처럼 되살아나 있었다. 재겸은 번번이 그 숲속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고 향기로운 숲속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재겸의 소관을 벗어난 일이었으므로.
“나 좋아해?”
우느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던 재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답을 듣는 순간,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전율이 있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려는 것처럼, 윤태희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태연하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는 듯했다.
“그래.”
윤태희의 음성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렇구나.”
윤태희가 작게 숨결 같은 웃음을 흘리더니, 어느 순간 고개를 푹 숙였다. 전율에 온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 후로 윤태희는 언어를 잃은 사람처럼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너를 좋아해.”
한참 만에야, 윤태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재겸은 윤태희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재겸은 손을 뻗어 윤태희의 얼굴을 잡아 쥐었다. 윤태희는 완전히 지쳐버린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꾸, 죽고 싶어질 만큼.”
재겸은 윤태희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너를 좋아해…….”
윤태희가 재겸의 어깨에 이마를 박더니 고개를 숙였다.
“…….”
재겸은 윤태희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자 윤태희가 양팔을 교차하여 재겸의 등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치의 빈틈조차 없이, 이 세상에 오직 단둘만 있는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헷갈리지 않는 순간은 재앙의 얼굴을 하고 재겸을 찾아왔다. 재겸은 자신의 목덜미에 부서지는 뜨거운 숨결과 물기를 느꼈다. 둘은 열병을 나누는 것처럼 조용히 숨을 골랐다.
어느새 두 사람은 병색이 완연했다.
그것은 오직 서로만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