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76)화 (276/348)

#276

재겸과 윤태희는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이 세상에 오직 단둘만 있는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어느덧 멀리서 동이 트고 있었다.

창밖에 온통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감돌았다. 어둠이 걷히며 푸르스름하던 새벽하늘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재겸은 코를 훌쩍거리며 부둥켜안은 윤태희의 어깨에 제 뺨을 짓뭉갰다. 그러자 등허리를 안은 힘이 강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격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다. 윤태희와 재겸은 마주 앉아 서로를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사방은 온통 고요하였으며 귓가에 들리는 것은 서로의 숨소리뿐이었다.

전부 다 털어놓고 나니 머리가 멍했다.

눈물은 그쳤지만, 아직 울음기가 남아 있는 탓에 재겸은 연신 코끝을 훌쩍거리고 있었다. 진력을 쏟아낸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 온몸의 수분이 전부 빠져나간 것 같았다.

재겸은 문득, 지금 이 순간이 생(生)의 마지막이기를 바랐다.

여기서 삶이 끝나도 좋을 것 같았다. 이대로 날이 밝으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 오지 않아도 좋으니 영원히 이 순간에 멈춰 있기를 바랐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을 박제하고 싶었다.

재겸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몹시 두려워졌다.

양극단은 통하기 마련이다. 전부 버리고 싶어서 죽음을 원하고, 전부 가지고 싶어서 죽음을 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재겸은 점점 형용할 수 없는 절박함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재겸은 자꾸만 침울해졌다. 태어나서 누군가와 이렇게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위태로운 줄 위에서 기묘한 평화와 안정감을 느꼈다. 윤태희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단단한 어깨와 등허리를 두른 강인한 팔과 산 사람의 뜨거운 온기가 생생하게 살갗으로 전해져 왔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충만함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언제나처럼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윤태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은 것은 재겸에게 있어서 아주 커다란 변환점을 맞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 자체만 놓고 본다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윤태희가 10년 동안 쌓아온 계획이 저로 인해 실패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고, 모든 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단 하나 분명한 사실은, 이로써 재겸은 수향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가능성 자체를 폐기해 버렸다는 것이다. 수향의 손을 잡는다는 선택지를 스스로 구겨 내버렸다.

윤태희의 복수는 엉망이 되었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수향에게 죽음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방향이 명확해진 느낌이었다. 수향과 재회한 이후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내내 기로에서 서서 갈팡질팡하던 재겸은 비로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았다.

바로 수향의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만약 수향이 손짓하는 대로 따라간다면, 그것은 과거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재겸은 수향의 뜻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재겸은 비로소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어느덧 많이 진정한 상태였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윤태희와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었다. 감춰두었던 이야기를 전부 털어놨으나 윤태희가 그중에서 골라 든 것은 좋아한다는 말뿐이었다.

그런 윤태희에게, 날이 밝기 전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태희야.”

윤태희의 목을 꽉 끌어안고 있던 재겸은 윤태희의 뒤통수에 손을 얹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다른 한팔로는 여전히 윤태희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

“너는 나를 만나서 잘못된 거야.”

그러자 내내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재겸을 끌어안고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윤태희가 등허리를 둘러 안고 있던 팔을 풀더니, 붉어진 눈으로 재겸과 시선을 맞췄다.

“아직 잘못된 건 하나도 없어.”

“나는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래도 상관없어.”

윤태희가 지난 10년을 바쳐 온 계획은 보기 좋게 어그러졌다. 그런데도 윤태희는 이상하리만치 흔들림이 없는 모습이었다. 모든 일에 철두철미한 윤태희치고 지나치게 낙관적인 반응이었다. 어쩌면 저를 안심시켜 주려고 이러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설마 잘못되더라도 내가 패망할 일은 없어.”

윤태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는 네가 있으니까.”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설사 만에 하나 잘못되더라도 너는 패망하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해?’

‘너한테는 네가 있으니까.’

윤태희는 언젠가 재겸이 건넸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재겸아.”

재겸에게 코끝을 맞댄 상태에서, 윤태희가 말했다.

“너는 군(君)이야.”

군을 잃는 순간, 이 판은 끝난다.

윤태희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재겸을 잃는 것이었다. 물론, 나례청장이 역모를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그 자체로서 이 계획은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태희는 여기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재겸이 있다면. 재겸이 제 곁에 있어 주는 한, 그 어떤 혹독한 결과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너만 있으면 돼.”

내가 네 10년을 망쳤어. 재겸은 그렇게 말했지만, 윤태희는 정말 괜찮았다. 자신의 10년이 붕괴했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깨달은 사람은 다름 아닌 윤태희 본인이기 때문이었다.

“…….”

재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자신이 모든 걸 망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윤태희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저를 탓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재겸이 윤태희의 양 뺨을 감싸 쥐며 말했다.

“만에 하나 잘못되면, 그땐 도망가자.”

약점은 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재겸은 약점도, 윤태희가 준 오르골도 버리지 못했다. 오르골조차 버리지 못한 주제에 윤태희를 버린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

잠에서 깬 재겸은 눈을 꿈벅꿈벅 떴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멍한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자, 한 박자 늦게서야 현실감이 돌아왔다. 온몸에 이불을 꽁꽁 싸매고 누에고치처럼 웅크린 그대로 고개를 돌리자, 윤태희가 재겸을 등 뒤에서 끌어안은 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몇 시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파에서 윤태희를 부둥켜안고 있다가 그 상태로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눈을 뜨니 침대였다. 창문에 커튼을 쳐 둔 탓에 방 안은 어두웠다. 동이 트고 나서야 잠들었으니 아마 지금쯤 한낮은 되었을 것 같았다.

재겸은 고개를 꺾어 저를 끌어안고 잠든 윤태희의 낯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불 속에서 꿈지럭거리며 손을 꺼냈다. 저도 모르게 윤태희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얕은 숨결이 느껴졌다. 검지로 윤태희의 이마에 흘러내린 앞머리를 사라락 걷었다.

그러자 윤태희가 눈을 스르륵 떴다. 어둑한 방 안에서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윤태희는 졸린 눈으로 “안녕.” 했다.

속삭이듯이 인사를 뱉은 윤태희가 불현듯 픽 웃었다.

“왜 웃어.”

어제 펑펑 눈물을 쏟은 재겸은, 그 여파로 인해 눈두덩이가 토실토실 부어 있었다. 퉁퉁 부은 눈을 보고 말없이 웃기만 하던 윤태희는 별 대꾸 없이 재겸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더 자도 돼.”

“목말라서 잠이 안 와.”

“목말라?”

“응.”

목이 마르다는 말에 윤태희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침실 밖으로 나간 윤태희가 금세 물 한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윤태희가 컵을 건네자, 재겸은 까치집이 된 머리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재겸이 물을 마시는 사이, 윤태희는 배터리가 방전된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전원을 켜자마자 온갖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르르 쏟아졌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