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77)화 (277/348)

#277

전원을 켜자마자 온갖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르르 쏟아졌다.

윤태희가 손가락으로 액정을 슥슥 넘길 때였다.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윤태희는 얼마간 물끄러미 액정을 응시하는가 싶더니, 재겸을 돌아보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와 동시에 침대에 앉아서 물을 마시고 있던 재겸이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전화기 밖으로 새어 나온 건너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정주 씨.”

정주에게서 걸려 온 전화임을 알자마자 뜨끔하여 몸을 일으켰다. 생각해 보니 어디에 간다고 말도 하지 않고 나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재겸은 뒤늦게 휴대폰을 찾았다. 하룻밤 사이에 배터리가 방전되어 전원이 꺼져 있었다.

정주는 재겸과 연락이 닿지 않자, 대신 윤태희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때, 정주는 혹시 재겸과 함께 있느냐고 물었다. 말을 늘이던 윤태희가 재겸에게 시선을 주었다. 재겸은 잽싸게 눈짓을 보냈다.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에 윤태희는 재겸이 시키는 대로 잘 모르겠다고 적당히 둘러댄 후 통화를 끊었다.

“왜? 정주 씨 엄청 걱정하는 거 같은데.”

재겸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잤다고 말해도 정주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저번에도 윤태희의 집에서 자느라 외박을 한 적이 있었고, 그때만 해도 재겸은 별생각 없이 정주에게 사실을 말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재겸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머지 얼떨결에 잡아떼고 말았다.

이 집에 와서 한 일이라고는 윤태희에게 그동안 못다 한 말을 털어놓고, 한 침대에서 쿨쿨 잠이나 잔 것뿐이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제 발을 저린 이유는 딱 하나였다. 어느샌가 재겸은 자신과 윤태희의 관계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했음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

쓸데없이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괜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가뜩이나 정주와 메산이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많았다. 죽을 결심을 하고 나자가 되었다는 비밀을 한 가지 만들었을 뿐인데, 언젠가부터 사소한 것 하나하나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재겸은 문득 마음속으로 무거운 가책을 느꼈다.

“나는 일단 집에 가 볼게.”

“왜? 지금?”

“응. 정주가 계속 걱정하잖어.”

그때였다.

또다시 윤태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줄곧 무성의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윤태희가 발신인을 확인하고 낯을 굳혔다. 혹시 정주가 다시 전화를 걸었나 싶어서, 재겸이 고개를 내밀고 액정을 들여다보려고 할 때였다.

윤태희가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왜? 누군데?”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는 대수롭지 않게 “잠시만.” 하더니 침실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행여나 재겸에게 통화 소리가 들릴까 봐 일부러 침실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방으로 향했다. 윤태희가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네, 선사님.”

전화를 걸어온 이는 다름 아닌 여혜 선사였다.

선사는 급히 도움을 부탁할 사람이 있다며, 오늘 오후에 벽사단에 고객 한 명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당장 오늘, 예정에 없던 손님이 방문한다는 소식은 꽤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꼭 오늘이어야 하나요?”

윤태희는 벽사단의 주인으로서 선사와 통화를 주고받았다.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선사에게 진 신세가 있었으므로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손님을 맞이하러 누각에 잠시 얼굴을 비칠 수밖에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윤태희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얼마간 생각에 잠겼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나 속이지 마.’

‘아니, 속여도 상관없어. 속일 거면 들키지만 마.’

이제까지 널 속여 왔다고 말하면, 너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방금 정주와 통화를 하고 새삼 알게 된 사실은, 재겸은 스쳐 지나가는 거짓말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윤태희는 그렇지 않았다. 일생을 바쳐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보며 맹목적으로 달려온 윤태희는 감정의 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었다.

윤태희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고, 거기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감정에 쉽게 동요하는 편이 아니다.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이 우선이었다. 때로는 지나치게 계산적이거나 냉혹한 선택을 내릴 때도 있었다.

사실 윤태희는 재겸이 제 발로 걸어와 줄 것이라고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태여 치부를 드러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까지 너를 속였노라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오히려 재겸에게 반감을 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윤태희는 자신이 없었다.

만약 재겸이 이대로 제 곁에 남아준다면, 이로써 벽사단을 움직여 탈을 선취해야 할 이유는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윤태희는 자신이 벽사단의 단주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숨겨야 할 이유는 사라졌으나, 굳이 밝혀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었다.

재겸이 받아들여 줄지, 아닐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끝까지 완벽하게 숨기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재겸이 직접 윤태희의 옆구리를 확인했던 일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윤태희는 이를 전화위복으로 삼아서 재겸의 의심을 완전히 불식시켜놓은 참이었다.

그렇게까지 의심을 잘라 냈으니, 재겸이 앞으로 이번과 같은 의심을 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벽사단은 계획을 위한 도구였으므로 이 일이 끝나면 흔적도 없이 흩어질 예정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잘 묻어둔다면, 이 비밀은 영원히 땅에 묻히게 될 것이다. 재겸은 그렇게 단주가 누구인지 영영 알 길이 없을 것이었다.

통화를 마친 윤태희가 태연한 얼굴을 하고 침실로 돌아왔다.

“왜? 무슨 전화였어?”

불안정한 평화일지언정 윤태희는 지금 이 순간을 만끽했다.

“그냥. 잘못 건 전화.”

***

늦은 오후, 재겸을 집으로 돌려보낸 단주는 약속 시간에 맞춰 홀로 누각을 찾았다.

“너무 안 오는데.”

서가 앞에 서 있던 단주가 중얼거렸다. 어느덧 약속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상황이었다. 여혜 선사가 보냈다는 의뢰인은 산에서 길을 잘못 들었는지 시간이 지나도 기별이 없었다. 의뢰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단주는 서가에 꽂아 놓은 책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길을 헤매는 듯하여 새로를 내려보냈습니다. 곧 올 것입니다.”

단주는 묘하게 들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패현이 지금껏 지켜봐 왔던 단주는 기복이랄 것이 없는 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정의 기복이 있어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때문에 단주는 보필하기에 몹시 까다롭고, 골치 아픈 인간이었다.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쉽게 파악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점에서 그랬다. 단주는 언제나 느긋했고 여유로웠다.

최근 며칠 동안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던 단주는, 어찌 된 일인지 오늘따라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직접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으나 그 까닭이 무엇인지는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단주가 극명한 기복을 보이는 순간은 오로지 소년과 관련된 일이었으므로.

책을 정리하던 단주가 또다시 손목을 젖힐 때였다.

“단주! 문밖에 손님이 왔소이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목소리를 낮춰라.”

형운의 우렁찬 목소리에 패현이 설핏 인상을 썼다.

“새로도 같이 있나?”

“새로는 없고, 인간 혼자뿐이었소!”

의뢰인을 데리러 간 것은 새로이건만,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은 형운이었다. 문밖을 서성이던 와중에 인간이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달려오는 길이었다.

의뢰인은 새로와 길이 엇갈린 듯했다.

“내가 가지.”

패현이 형운을 데리고 나갔다.

패현이 의뢰인을 마중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조용히 문을 두어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흑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가에 서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단주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왔니?”

단주는 난데없이 찾아온 흑제에게 무슨 일이냐고 용건을 묻지 않았다. 부르지도 않은 흑제가 먼저 단주를 찾아온 이유는 불 보듯 훤하기 때문이었다.

흑제는 묘정에 대해서 무언가 알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어때? 알아낸 것 좀 있어?”

책 페이지를 넘기던 단주가 물었다.

“예.”

역시나 흑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영물과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귀신을 대상으로 탐문을 벌인 끝에 선대 나자와 왕래를 하고 지냈다는 영물을 만난 것이다.

“백림산 근처, 버려진 솟대 안에 깃들어 있는 영물이온데, 한때 선대 나자와 연을 맺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비교적 기억이 온전하여 소상히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

단주는 계속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운을 띄워놓고도 몹시 드물게도 무언가 주저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단주는 재촉하지 않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흑제는 왜인지 시름에 잠겨 있었다.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자, 단주는 설핏 눈매를 좁혔다가 손목을 젖혀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의뢰인이 들어올 거야. 얘기가 길다면 끝나고 해도 돼.”

“그것이…”

내내 주저하던 흑제가 결국 시선을 내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말씀하신 ‘묘정’이란 자는….”

그때였다. 복도에서 우당탕,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흑제와 단주의 시선이 동시에 문간으로 향했다. 소란스럽게 뛰어 들어온 패현은 웬일인지 몹시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패현이 나타나면서 흑제의 보고는 자연스럽게 끊겼다. 언제나 점잖은 행동거지를 보이며 격식을 잃지 않는 패현은 드물게도 아주 동요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 그것이… 지금 문밖에….”

책을 빼 들던 단주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자, 그자가 와 있습니다.”

단주가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누구?”

“재겸이라 하는 아이 말입니다.”

단주의 손에서 책이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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