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재겸이라 하는, 그 자가 왔습니다.”
단주의 손에서 책이 툭 떨어졌다.
“…뭐?”
패현의 전언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사고가 정지한 상태로 멍하니 얼어붙어 있던 단주는,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흑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흑제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과묵한 성격의 흑제는 평소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었음에도, 이번만큼은 꽤 놀랐는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져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니?”
망연히 굳어 있던 단주가 되물었다.
“누가, 누가 왔다고?”
단주가 이렇게 여유를 잃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패현은 차마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설마 패현의 입에서 재겸의 이름을 듣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수많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이곳을 알아서도, 이곳에 있어서도 안 되는 사람을 딱 한 명만을 고른다면 그건 바로 재겸일 것이다.
“확실해?”
패현은 영귀들 중에 가장 빈틈없는 성격이었다. 따라서 패현이 사람을 착각하거나 잘못 보았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단주는 질문을 되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 애가 맞아?”
잠시 주저하던 패현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각 앞에 서 있던 이는 틀림 없이 재겸이 맞았다. 패현은 한 눈에 재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재겸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으므로 재겸의 생김새와 외양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애가 널 봤니?”
단주가 희게 질린 낯으로 물었다. 패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저를 보지 못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패현이 직접 가서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형운을 통해서 방문객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어쩌다 보니 형운과 동행한 채로 복도를 걷게 되었다. 형운과 함께 복도를 걸어나가던 패현은 별 생각없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건넸다가,
‘여자 혼자 왔다i고 했던가?’
‘으응? 문밖에 서 있는 건 어린 사내놈이었소!’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내?’
복도를 걸어나가던 패현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몇 달 전, 단주의 두루마기를 노리고 누각에 찾아온 쥐새끼들로 인해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불청객의 접근을 막고자 선사로부터 미리 의뢰인의 성별, 연령대와 같은 간단한 신상을 건네받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 온다는 의뢰인은 초로의 여성이었다.
설마 또 위치가 샌 건가. 패현은 혀를 찼다.
처음에는 당연히 의뢰인이 왔겠거니 생각하여 마중을 나간 새로와 길이 엇갈렸구나 싶었다. 그러나 형운의 말대로 문밖에 있는 사람이 어린 사내라면, 그는 선사가 보낸 의뢰인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문밖에 서 있는 이가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패현은, 불청객을 상대하기에 앞서 어떤 인간인지 확인하고자 창문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형운이 말한 ‘어린 사내놈’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저 아이가 어째서 이곳에?
불청객의 정체가 재겸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패현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단주가 소년을 상대로 벽사단의 존재를 꽁꽁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모든 것을 알고서 이곳에 온 것인가?
패현은 혼란에 휩싸였다. 처음에는 소년이 단주를 미행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단주의 뒤를 밟은 것이라면, 단주가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형운, 나 대신 자네가 가서 물어봐 주겠나?’
‘무엇을 말이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말이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패현은 형운을 앞세워 떠보기로 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누각 입구로 내려간 형운은 패현이 주문한 대로 재겸에게 가서 벽사단에 찾아온 목적을 물었다.형운을 통해서 소년의 목적을 알게 된 패현은 그 즉시 단주에게 달려와 이 사실을 알렸다.
“그자는 단주님께 부탁할 것이 있어 이곳에 왔다고 했습니다.”
이어진 패현의 말에, 단주가 낯을 굳혔다.
“…부탁?”
“예, 그래서 형운도 부탁하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모양입니다. 헌데 단주님을 만나서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하기에, 형운이 그럼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 말해두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단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단주님, 이제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패현은 낭패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러나 단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병풍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단주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집에 데려다준 이후로 지금까지 재겸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재겸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재겸은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단주는 무감정한 눈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의심을 완전히 거두었으니 더 벽사단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단주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졌으나 단주는 흔들림 없이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있었다. 마침내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재겸아.”
그 순간, 패현과 흑제가 멈칫하며 동시에 단주를 쳐다보았다. 단주가 전화를 건 상대는 지금쯤 누각 밖에서 들여 보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단주를 사지로 몰아넣은 소년이었다.
“뭐 하고 있었어?”
단주는 몹시 냉철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목소리만큼은 몹시 다정했다.
- 어? 아, 그게….
어딘지 뻣뻣한 태도로, 재겸이 어물어물 대답을 꺼낼 때였다.
“지금 집이니?”
재겸의 동요를 알아차린 단주가 곧바로 질문을 덧붙였다.
“나 일이 일찍 끝났는데, 거기로 갈까.”
단주의 통화를 지켜보던 패현은 불현듯 가슴 한구석이 선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주의 행동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대담했다. 만약 이것이 술래잡기라면 현재 붙잡힐 위기에 처한 쪽은 단주였다. 재겸의 추격을 따돌리고 어떻게든 달아나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단주는 술래에게 제발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것도 모자라, 술래를 시험하고 있었다.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 …….
침묵이 길어질수록, 단주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 지, 지금은 안 돼.
“왜?”
- 사실 바, 바람 쐬려고 지금 산에 왔어.
잠시 말이 없던 단주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알았어.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은 단주는 싸늘한 눈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
재겸은 거짓말에 서툴렀다. 이로써 단주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첫째로 재겸은 여전히 벽사단의 단주가 누군지 모르고 있다는 것. 둘째는, 저에게 비밀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형운에게 말했던 것처럼 재겸은 정말로 순수하게 의뢰를 하고자 벽사단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어젯밤 재겸은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그동안 감춰 두었던 마음을 전부 다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개중에 벽사단에 찾아가 무언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내용은 없었다.
‘미안해. 널 좋아해.’
마침내 손에 잡힐 듯했다.
‘만에 하나 잘못되면, 그때는 같이 도망가자.’
네 마음을 얻었으니 더 바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윤태희는 재겸을 보기 좋게 놓쳐 버렸다. 재겸은 모래처럼 윤태희의 손아귀를 빠져나갔고, 윤태희 몰래 이곳에 있었다.
나 몰래 부탁할 게 있다, 라….
단주가 고개를 툭 떨어트릴 때였다.
“단주님.”
그때, 패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초대를 받지 않은 자의 의뢰는 받지 않는다고 돌려보내심이 어떠신지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니, 빈방으로 안내해.”
단주가 음울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허, 허나….”
당황한 패현이 난색을 보일 때였다.
“곧 새로가 올라올 거야.”
패현이 멈칫하며 단주를 바라보았다.
“우선은 새로와 마주치지 않게 해.”
잠시 잊고 있었다. 단주의 판단이 옳았다. 재겸은 뭔가를 알고 온 것은 아닌 듯했으나, 어쨌든 정체가 들통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선 만남 자체를 차단하는 편이 이로웠다. 따라서 누각에 들이는 일 없이 문전박대하여 돌려보내는 게 제일 안전할 것이었다. 그러나 단주의 말대로 하산하는 과정에서 의뢰인을 데리러 갔던 새로와 재겸이 맞닥뜨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흑제야.”
이제 곧 있으면 새로가 올 것이었다. 당장 돌려보낼 수도 없고, 계속 바깥에 세워둘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어선 안 됐다.
“오늘은 패현 대신에 네가 나가봐야겠다.”
누각에 방문한 외부인을 내부로 안내하는 건 본래 패현이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재겸과 구면인 패현을 직접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번만큼은 흑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단주는 지금 자리에 없다고, 우선은 거기서 기다리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흑제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단주는 이어서 패현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의뢰인이 오거든 다음에 오라 양해를 구하고 돌려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를 포함한 다른 영귀들이 돌아다니지 않게 해 재겸과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지시를 받은 흑제와 패현이 방을 빠져나갔다.
영귀들을 내보내고 홀로 방 안에 남은 단주는 불안한 걸음으로 서가 주변을 서성였다. 이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황이 왔다는 사실에, 불현듯 허탈한 감정이 올라왔다.
재겸이 이곳에 있다는 것도, 사실은 서로가 속고 속이고 있었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침착해야 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에 골몰할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이 상황을 타개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돌이키기엔, 너무도 멀리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