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늦은 오후, 재겸은 우거진 숲속에 있었다.
열심히 산을 오르던 재겸은 걸음을 멈추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이렇게 잠시 숨을 돌리고 있으려니, 문득 꿈을 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집에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머나먼 산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기만 했다.
재겸을 이 산에 데려다 놓은 건 비마였다.
윤태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던 재겸은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낮잠을 잤다. 그리고 비마를 불러내 벽사단으로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 비마는 재겸을 등에 태우고 구름 너머 시원한 창공을 내달렸다. 비마는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재겸을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바로 이 산에 벽사단의 누각이 있다고 했다.
벽지에 있는 이 산은 이름조차 없는 평범한 야산이었다. 재겸은 비마가 알려 준 방향을 따라서 산을 오르고 있었다. 등산객은커녕 발길에 다져진 오솔길조차 없는, 그야말로 인적 드문 산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마한테 산 꼭대기에 내려달라고 할 것을 그랬다.
잠시 땀을 식힌 재겸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덧 목적지 부근인 것 같았다.
거침없이 산을 오르는 재겸의 눈동자에는 어떠한 결의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재겸은 이 고행에 저도 모르게 몰두해 있었다. 누각 앞에 도착한 재겸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산 아래 광활하고 탁 트인 풍경이 내려다 보였다. 재겸은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정주와 메산이는 삶을 지탱해 준 소중한 가족이었지만, 그 둘을 향한 마음과 윤태희를 생각할 때 드는 마음은 달랐다.
정주와 메산이를 생각하면 한결같이 고마웠다. 그리고 고마운 만큼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태희를 생각하면 아주 복합적인 마음이 들었다. 윤태희는 무료하고 평온한 일상을 깨트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윤태희 때문에 죽고 싶기도 했고, 그런 윤태희 때문에 살고 싶기도 했다. 재겸은 이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오랫동안 길을 헤매야 했다.
윤태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이 재앙과 같은 마음을 직면하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격변이 일어나거나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재겸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행을 두려워 했다. 그러나 일상은 변함없이 흐르고, 눈에 보이는 풍경은 그대로였으며, 재겸을 둘러싼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윤태희가 있는 내일이 좋은 만큼 윤태희가 없는 내일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두렵다. 그러나 나의 내일에 네가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 지옥 같은 오늘을 살아 내겠다. 나의 슬픔보다 너의 슬픔이 괴롭다면, 나는 이 마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너를 슬프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나는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재겸은 자신의 마음에 책임을 지기 위하여 이곳에 서 있었다.
숨을 고르던 재겸은 누각의 문을 두드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우람한 덩치의 돌쇠 같은 영귀가 서 있었다. 재겸은 눈을 크게 뜨고 영귀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시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청에, 재겸은 인상을 쓰며 귀를 틀어막았다. 겨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영귀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는 문을 닫고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닫혔던 문은 열릴 기미가 없어 보였다. 문밖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겸은 불안해졌다. 이대로 문전박대라도 당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새하얀 백의를 입은 영귀였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앞선 영귀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오랜 세월을 살아온 영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귀는 문턱에 서서 재겸을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누각 안으로 들어온 재겸은 영귀의 뒤를 따랐다.
영귀는 재겸보다 한 걸음 앞서 복도를 걸어나갔다. 재겸은 측면으로 보이는 영귀의 옆 얼굴을 힐끔거렸다. 어디서 온 누구냐든가, 무슨 일로 왔냐든가 지나가듯이 말을 붙일 법한데도 영귀는 몹시 과묵했다. 영귀는 무표정한 얼굴로 오로지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저기, 있잖어.”
복도를 걷던 재겸이 입을 열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
그러자 영귀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영귀가 반쯤 몸을 틀더니 재겸을 돌아보았다. 분명 초면인 것 같은데, 왜인지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던 탓이다. 눈이 마주쳤다. 재겸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영귀를 응시했다.
“…….”
침묵하던 영귀가 슬쩍 눈을 피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대꾸한 영귀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영귀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영귀는 재겸을 빈 방으로 안내했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말을 마친 영귀는 잠시 자리를 떴다. 빈방에 홀로 남은 재겸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방 내부를 구경했다. 이곳에 있으니 과거로 돌아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세월의 때가 탄 반질반질한 나뭇바닥, 장식처럼 놓인 고아한 백자, 열두 폭짜리 병풍과 벽에 걸린 묵화가 보였다. 중앙에는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침대처럼 크기가 컸다. 어찌나 큰지 두 명은 누워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멀뚱히 서 있던 재겸은 탁자 앞에 놓인 의자로 가서 앉았다.
왜인지 긴장이 되었다.
재겸은 손바닥에 밴 땀을 무릎에 문질러 닦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조금 전에 보았던 영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영귀는 혼자가 아니었다.
영귀의 뒤로, 단주가 들어오고 있었다.
적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방 안에 들어온 단주는 아무런 말 없이 재겸의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의 크기가 워낙 큼직한 탓에, 마주 보고 앉았음에도 멀찍이 떨어진 거리였다. 재겸은 얼떨떨한 눈으로 단주를 바라보았다. 단주를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단주는 어둡고 짙은 적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고, 안에는 검은색 면 옷을 받쳐 입고 있었는데, 공주 지부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머리에는 검은 너울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단주와 마주 보게 된 재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 저기… 나는….”
그때, 단주의 곁에 서 있던 흑제가 입을 열었다.
“단주님께서는 얼마 전 사인검에 당하여 회복 중에 계십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말을 하는 데 어려움이 겪는 터라, 당신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건 어려울 듯합니다.”
말을 할 수 없다고? 재겸이 멈칫하며 단주를 쳐다보았다.
“대신 제게 글로 써서 뜻을 전해주신다 하였으니, 제가 단주님의 말을 대신할 것입니다.”
“알겠어.”
재겸은 넓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단주와 마주 보았다. 영귀는 탁자 중앙에 서서, 단주의 앞에 붓과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놓은 다기를 이용해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공주에서 보았을 때는 워낙 경황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단주에 대하여 무언가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더군다나 재겸은 그날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사방에서 불길이 번지며 연기가 자욱한 데다 시야를 포함한 오감이 마비되다시피 하여 멀쩡한 정신이 아니었다.
공주 지부에서는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단주는 완전히 장성한 성인 남성의 체격이었다. 당장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부탁하는 입장이니 공손하게 굴어야 하나. 인사를 건네야 하는데 존댓말을 써야 할지, 반말을 써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일단은 미안하다고 할까? 아니면 만나서 반갑다고 해야 하나?
재겸이 잠시 고민할 때였다.
우당탕!
갑작스러운 소란에, 단주와 재겸의 시선이 동시에 영귀에게로 향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다기를 만지작거리던 영귀가 찻주전자를 그대로 엎은 것이다. 손이 미끄러진 듯했다.
기묘한 침묵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언제나 패현이 차를 내렸던 탓에, 흑제는 차를 내리는 데 서툴렀다.
“…….”
과묵한 인상과는 달리, 차를 내리는 영귀의 손길이 워낙 서툴러서 재겸은 할 말을 까먹고 말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선이 빼앗겨서 영귀가 차를 내리는 손길을 구경하게 되었다.
쿠당탕!
영귀가 이번에는 찻잔을 떨어트렸다.
“…….”
“…….”
영귀는 단주와 재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차를 내렸다.
어찌어찌 차를 내렸는지 향긋한 차향이 퍼졌다. 영귀는 손수 내린 차를 찻잔에 따라서 각각 소년과 단주 앞에 놔주었다. 재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산을 오른 탓에 목이 말라서 마음만 같아선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지만, 남이 준 것을 마셨다가 사달이 났던 경험이 있는지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때, 단주가 찻잔을 들었다.
단주는 차를 마시려는 듯이 찻잔을 얼굴 근처로 가져갔다가, 이내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멍하니 정지한 자세로 굳어 있던 단주가 어느 순간 태연하게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재겸은 의아한 눈으로 단주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마시려다 말지?
“…….”
이내 재겸은 알아차렸다.
면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차를 마시려고 했구나.
“…….”
“…….”
또다시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나례청을 상대로 도전장을 내밀고, 지부 두 개를 박살낸 악귀들의 집단이라기에 숨막힐 정도로 흉흉하거나 냉혈한 분위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하게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벽사단은 생각보다 희한한 곳이었다.
영귀와 단주는 묘하게 허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