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80)화 (280/348)

#280

영귀와 단주는 묘하게 허술했다.

그래서일까?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던 재겸은 그 덕분에 한결 편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나는 김재겸이라고 해.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인사를 건네자,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단주는 붓을 쥐고 종이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정갈한 한문이었다. 그에 영귀가 단주의 뒤에 서더니, 단주의 필담을 말로 옮겨 주었다.

“이곳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다고 하십니다.”

들키지 않으려면 만남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단주는 이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단주가 자리에 없다고 돌려보낸다면 지금 당장은 안전할지 모른다. 그러나 재겸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 보면 다음을 기약하고 다시 이곳에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충분히 이야기를 듣고, 어떤 부탁이든 간에 단호하게 거절하여 더는 발걸음하는 일이 없게 싹을 잘라내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한편으로는 재겸이 이렇게 거짓말을 하고, 제게 숨기면서까지 벽사단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여러모로 위험부담이 큰 상황이었지만, 다른 누군가를 시켜 저인 척 대신 앉혀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새로와 패현은 재겸과 일면식이 있기에 불가능했다. 남은 건 형운과 다가뿐인데, 둘을 앉혀 놓을까 고민도 해 보았으나, 역시 그것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단주는 고민 끝에 직접 나섰다. 대신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를 내지 않기로 했다. 꽁꽁 숨겼으니 알아챌 도리는 없을 것이다. 흑제를 앞세워 의중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귀마가 있어.”

그때, 재겸이 입을 열었다.

“팔도를 돌아다니는 녀석인데, 세상일에 관심이 많아서 모르는 게 없어. 그 녀석이 너희에 관해 말해 준 적이 있어. 돈을 주면 의뢰를 들어준다고. 그게 인간이든 귀신이든 말이야.”

단주는 짜증을 억누르며 입술을 꾹 겹쳐 물었다.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까지 꼬일 수도 있구나 싶다.

“그래서 그 녀석한테 여기로 데려다 달라고 했어.”

소리 없이 한숨을 쉬던 단주가 다시 붓을 놀렸다.

“부탁하고 싶다는 건 무엇이냐고 하십니다.”

흑제가 말을 옮기자, 재겸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우선 부탁하고 싶은 건 두 가지인데….”

재겸은 가만히 말을 골랐다. 부탁을 하려면 왜 이런 부탁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을 해야 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군지 말해야 했다.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했다.

“사실, 나는 나자야.”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어쩌면 공격을 당하거나 당장 붙잡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재겸이 고개를 들고 검은 면사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공주에 왔었지. 알아봤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너랑 싸운 거, 나였어. 상처를 입혀서 미안하게 됐어. 악감정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냐.”

재겸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가 나례청에 원한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서 나례청과 전쟁을 벌이려고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너희한테는 이상하게 들릴 거고, 믿기도 어려울 테지만, 나도 너희와 목적이 같아.”

재겸은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나 혼자만 있는 건 아냐. 친구가 있는데, 그 애가 나례청에 복수를 하려고 해. 그래서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 왔고, 나는 그 애의 복수를 도와주려고 나자가 된 거야. 그런데 나 때문에 계획이 전부 엉망이 되어버렸어.”

단주와 영귀는 재겸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애는 강하고 똑똑한 애야. 그 애가 평생 세워 온 계획을 이대로 실패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래서 너희한테 부탁하려고 온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주가 붓을 휘갈겼다.

“손을 잡자는 뜻입니까?”

영귀가 말을 옮겼다.

“그래.”

재겸의 의중을 알아차린 단주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게 첫 번째 부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차분히 숨을 고르던 재겸이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나는 오랜 세월을 살았어.”

재겸이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어쩌면 너네랑 비슷할지도 몰라. 나는 죽지도 늙지도 않거든. 처음에는 내 스승이 저주를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잠시 말을 멈춘 재겸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만 살고 싶었어.”

단주는 재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를 봉인해줬으면 해. 이게 두 번째 부탁이야.”

잠시 말을 멈췄던 재겸이 시선을 내렸다.

“너희는 오랜 세월을 산 영귀들이라고 했으니 너희라면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돈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줄 수 있어. 그리고 지금 당장 여기서 봉인해 달라고 하는 건 아니야. 왜냐면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찻잔을 매만지던 재겸이 고개를 들고 단주를 바라보았다.

“전부 다 정리하고 나면, 그때 나를 봉인해줬으면 좋겠어.”

단주는 아무런 미동조차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붓을 손에 쥐었다. 단주는 붓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적을 준비를 했다. 재겸은 단주 앞에 놓인 종이를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단주는 그저 붓을 매만지기만 할 뿐, 붓을 들어 올리지도 않았고 종이에 어떤 글도 적지 않았다. 아니, 적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윤태희는 알고 있었다.

“…….”

붓을 들어 올리는 순간, 등신처럼 손이 떨릴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왜 그런 걸 원하는 거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연을 묻고, 안타깝지만 그런 의뢰는 받지 않는다고 거절하면 되는 거다. 그렇게 너를 허망하게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해가 저물어 저녁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를 데리러 가면 되는 거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너의 곁에서….

“…….”

단주는 손에 쥔 붓을 내려놓았다.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너의 마음을 얻은 걸로 온전히 너를 가졌다고 믿었던 스스로에게 화가 나면서도, 끝까지 내 곁에 남아줄 생각이 없는 너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으로, 온갖 감정이 마구 뒤섞였다.

지난 10년이 망가졌다는 걸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윤태희 본인이었다. 하지만 윤태희는 정말로 괜찮았다.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고, 이미 오래 전에 다짐했다. 너와 함께라면, 너만 얻을 수 있다면 어떤 불행이라도 달게 받겠다. 어떤 가시밭길이라 하더라도 걸어가겠다. 설사 너에게 미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증오하거나 원망하거나, 평생 냉대를 받게 되더라도 다 감내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었다.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허리를 바르게 세우고 앉아 있던 단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그림처럼 산의 능선이 펼쳐져 있었다. 어느덧 산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문득 시야가 흐려졌다. 재겸에 관한 것이라면, 윤태희는 그게 무엇이든지 전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라면 알고 싶지 않았다.

“…….”

단주는 그렇게 얼마간 말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주의 대답을 기다리던 재겸도 덩달아 시선을 돌렸다. 어느 순간, 열린 창문 틈으로 희미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검은 면사가 살랑, 바람결에 흔들렸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재겸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틀어 단주를 바라보았다. 그에 바깥 풍경을 응시하고 있던 단주가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재겸을 바라보았다.

“…….”

단주를 빤히 바라보던 재겸이 대뜸 제 앞에 놓여 있던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어느덧 한 김 식은 차는 미지근했다. 입 안에 차를 털어 넣은 재겸이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향이 좋네…….”

빈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재겸이 말했다.

“야. 나 차 한 잔만 더 줘라.”

재겸의 요구에, 단주의 뒤쪽에 서 있던 영귀가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영귀는 단주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걸음을 옮겨 재겸의 근처로 다가왔다. 빈 찻잔에 차를 다시 따라주려는 듯, 재겸의 찻잔에 손을 뻗을 때였다. 재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새로 따라줄 필요는 없어.”

재겸이 손을 들어 영귀의 손길을 가로막았다.

“식은 거 마시고 싶으니까, 그냥 네 거 줘.”

재겸은 단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턱짓을 했다. 심드렁한 눈빛이었지만, 면사 속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영귀는 재겸과 단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차피 입에 대지도 않았잖아.”

멍하니 앉아 있던 단주가 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단주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보던 단주가 손끝으로 찻잔을 가볍게 들었다. 재겸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이르러서 찻잔을 내려 놓을 때였다.

갑자기 재겸이 손을 뻗더니, 단주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야.”

단주가 멈칫하는 순간이었다. 재겸이 움켜쥔 손목에 얼굴을 내렸다. 마치 입맞춤이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손목에 코를 박았다.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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