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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81)화 (281/348)

#281

방금 전, 열어놓은 창문에서 미풍이 불어온 순간이었다.

재겸은 바람결에 실려 있는 희미한 향기를 맡았다. 바람을 타고 넘어온 향기는 시간이 지나며 평소보다 한결 옅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재겸은 코끝에 스친 향기를 놓치지 않았다.

손목에 밴 잔향을 확인함으로써 최후의 검증이 끝났다.

단주의 손목에 코를 박고 있던 재겸이 눈동자를 스르륵 들어 올렸다. 매서운 눈매가 단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면사 너머를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잠시 정적이 흘렀다.

“…….”

“…….”

멍하니 굳어 있던 단주가 면사 속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윤태희. 대답해.”

재겸의 부름에, 내내 굳어 있던 단주의 손끝이 희미하게 꿈틀했다.

“그깟 천 쪼가리 한 장에 숨는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시간이 늘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모든 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과 몇 초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리석었다.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를 숨긴다면 정체를 눈치챌 법한 단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얼굴도 목소리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재겸은 벽사단의 주인이 누구인지 간파해 냈다. 얼굴과 목소리를 숨기는 것은 가능해도, 몸에 배어 있는 향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것만 염두에 두었지, 설마 향기로 알아차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재겸이 손목에 코를 갖다 댄 순간, 단주는 비로소 술래잡기가 끝났음을 알았다.

단주의 패배였다.

사실, 자칫하다간 정체가 탄로 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내심 각오는 하고 있었다. 단주는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벽사단의 주인으로서 재겸과 한 공간 안에서 대면하는 상황이었으니 그만큼 위험부담이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고민 끝에 목적을 알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 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그러나 설마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재겸이 기습적으로 면사에 손을 댄다거나 하는 식의,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해 얼굴을 내보여 들키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얼굴도 목소리도 내놓지 않았건만, 이런 식으로 들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주는 애초에 본인에게서 향기가 난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건 명백히 자신의 패착이었다. 몸에 밴 향기는 마치 원래 있던 체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후각이 무뎌져 있던 상황이었다. 일부러 의식하려고 애쓰지 않는 한, 당사자 본인이 제 몸에 향기가 배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묻잖아, 왜 대답이 없어?”

그때, 침묵으로 일관하는 단주를 향해, 재겸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아직도 잡아뗄 구석이 남았어?”

“……”

“선택해.”

“……”

“네가 벗을래, 아니면 내가 벗길까.”

“…….”

더는 달아날 곳이 없다는 것을 직감한 단주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재겸이 순식간에 탁자를 넘어서 단주에게 달려들었다.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있던 단주의 자세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의자가 나뒹굴었다. 떠미는 힘에 뒤로 쓰러지듯이 넘어진 단주는 벽과 바닥 사이에 험하게 구겨져 있었다. 넘어져 있는 단주에게 가까이 다가간 재겸이 곧장 손을 뻗을 때였다.

내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흑제가 기척을 냈다. 이대로라면 단주가 크게 다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주는 맞설 생각조차 없는지 무방비한 자세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중재해 보고자 두 사람 사이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때, 재겸이 고개를 홱 돌려 흑제를 쳐다보았다.

“끼어들지 마. 죽여 버리기 전에.”

흑제가 멈칫하며 몸을 세웠다. 본능적으로 몸이 굳는다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이대로 덤빈다고 하더라도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형형한 안광을 담은 눈동자는 고요하지만 흉흉한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흑제는 그 눈에서 무언의 경고를 읽었다.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흑제야.”

그때, 면사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만 나가 봐.”

굳은 채로 서 있던 흑제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예.”

흑제가 나갔다.

재겸은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단주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재겸은 구겨져 앉아 있는 단주를 얼마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면사가 달린 죽립을 손으로 툭 쳐올렸다.

죽립이 벗겨지며 면사 속에 감추어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헝클어진 머리칼.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피식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안녕.”

인사를 듣는 순간, 재겸의 입술 사이에서도 덩달아 웃음이 새었다.

“네가 정말로, 벽사단의 주인이었어?”

어이가 없었다.

향기로 간파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단주로서는 그야말로 허를 찔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단주의 향기에 반응한 것은, 재겸에게 있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만난 이래로, 윤태희라는 인간을 판단하고 이해하기까지 여러 곡절이 있었다.

윤태희는 늘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었다.

처음에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면서도 어딘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던 사서 선생이었다. 이후에는 사서로 위장한 나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무찔러야 할 적이 되었다. 그러다 손을 잡고 한 배를 탄 동료가 되었고, 어느샌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재겸에게 있어 윤태희는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윤태희가 향기로운 인간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 생각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윤태희에게선 언제나 한결같은 향기가 났다.

그러니 어떻게 이 향기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너는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어젯밤 내내 너랑 끌어안고 있었고, 당장 오늘 아침까지 네 향기로 가득한 침대에 파묻혀 있었다. 그러니까 너를 못 알아보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다. 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내가 네 냄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네가 알긴 아느냐고, 마구 따지고 화를 내고 싶었다.

“사람을 등신 취급해도 유분수가 있지…….”

그러나 그 전에, 재겸은 자꾸만 서러워졌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서, 피식거리던 재겸의 낯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속이지 말라 그랬지.”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려고 했다.

“아니, 속여도 되니까, 속일 거면 들키지만 말라 그랬지.”

세상 모두가 나를 속여도, 너만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취중의 힘을 빌려 지나가듯이 던진 말이었지만, 사실은 절실하게 건넨 부탁이었다.

오직 윤태희만이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밑바닥을 알고 있었다.

너에게만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내 밑바닥을 보여주었다.

“야. 하나만 물어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얼마 전, 옆구리에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까지 했었다. 괜한 의심을 품고 윤태희를 추궁했던 일은 재겸 스스로에게도 상처로 남겼고, 아직까지 마음의 빚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현재 벽사단의 주인이 입는다는 적색 두루마기를 입고, 제 앞에 앉아 있었다.

“언제까지 속일 생각이었어?”

윤태희는 바닥에 험하게 구겨진 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뭐라 대꾸할 의욕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씹새끼야, 대답해.”

재겸은 윤태희의 턱을 콱 움켜쥐고 저를 보게 했다. 그러자 윤태희가 천천히 눈을 들더니 재겸과 시선을 맞췄다. 감정이 죽어있는 듯한 눈으로,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태연한 태도에, 이제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슬퍼지려고 했다. 속여서 미안하다거나,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유라도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럼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변명이든 사과든, 뭐라도 말해 봐.”

재겸이 붉어진 눈으로 윤태희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재겸의 낯을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윤태희가 말했다.

“너를 좋아해.”

조용히 흘러나온 대답에,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던 재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건 배신이야…….”

재겸이 축 처진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는 내 마음을 배신한 거야.”

“아니, 나는 널 배신하지 않았어.”

그때, 윤태희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재겸아, 이런 건 배신이 아니야. 나는 그냥 너를 속인 거야.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뀐 적 없어. 늘 한결같았으니까. 이런 건 기만이라고 해야지. 그리고 배신이라는 건.”

이어지는 말에, 재겸이 고개를 들고 윤태희를 바라볼 때였다.

“네가 나한테 한 게 배신이야.”

앞에서는 좋아한다고 해놓고, 뒤에선 남몰래 사라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근데 재겸아, 그래도 괜찮아.”

잠시 말을 멈춘 윤태희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벽사단도, 나도, 네가 원하는 건 이뤄줄 수 없어.”

“…….”

“그러니까 너는 이거 하나만 명심하면 돼.”

“…….”

재겸의 양 뺨을 감싸 쥐며, 윤태희가 다정하게 말했다.

“너는 아무 데도 못 가.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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