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이상한 일이었다.
위화감을 모른 척하며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윤태희는 목패를 훔치고 나서 그 이후의 계획에 대해선 말해준 적이 없었다. 평소 알고 지낸다는 영귀가 있었다. 나례청과 전쟁을 바라는 벽사단에 대해서 지나치게 안일하게 굴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벽보를 붙인 것부터 공주 지부를 습격한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윤태희가 꾸민 일이었던 거다. 자신이 속았음을 알게 된 재겸은 상처를 입었다.
“너는 아무 데도 못 가. 영원히.”
그런데, 윤태희가 저를 속였다는 사실에 분해서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수향의 손을 잡을 수는 없다. 마음을 인정한 이상, 윤태희에게 죽여달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벽사단뿐이었다. 그런데 벽사단의 주인이 윤태희였으니 이로써 죽음을 부탁할 수 있는 곳은 사라진 셈이다. 재겸이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은 재겸이, 뭐라 말을 뱉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일 때였다.
“재겸아.”
그때, 윤태희가 눈을 반쯤 내리뜨며 피식 웃었다.
“넌 못 죽어…….”
윤태희는 재겸의 뺨을 잡아 올리며 시선을 맞췄다.
“알겠어? 사실 처음부터 약속 지킬 생각 없었어.”
재겸의 양 뺨을 감싸고 있던 윤태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벽사단도, 나도, 네가 원하는 건 이뤄줄 수 없어.”
섬뜩하고 오싹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에, 맥이 탁 풀렸다.
“…….”
그 말을 들으니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이해가 갔다.
하필이면 윤태희가 나례청을 부수려는 시기에, 공교롭게도 벽사단이 나타났다. 벽사단은 나례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고 했고, 윤태희는 벽사단과 관련된 화제에서는 유독 안일한 태도를 보였으며, 재겸이 벽사단에 대해 갖는 관심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마침내 재겸은 깨달았다.
윤태희는 나를 믿지 않았고, 동시에 놔줄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러니까 재겸아.”
윤태희의 낯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평생 이렇게, 내 옆에서 불행하게 살아.”
나를 증오하거나 경멸하더라도 상관없다. 전부 들켜버린 마당에 이제 와서 네게 용서를 빌거나, 사죄를 하고 싶진 않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됐으므로.
윤태희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내가 지긋지긋해서 도망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도망친다면 찾아낼 것이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발버둥을 쳐도 좋으니 너는 내 곁에서 죽는 날까지 불행해야만 한다.
“…….”
줄곧 말이 없던 재겸이 어느 순간 인상을 썼다. 험하게 미간을 구기며 울컥 솟아오른 울화를 꾹 억눌렀다. 목 끝까지 차오른 감정을 꾹 삭여냈음을 보여주듯이 목울대가 움직였다.
“윤태희.”
눈이 마주치자, 재겸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경멸하듯이 말했다.
“너도 묘정이랑 똑같애. 알아?”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뱉은 재겸이 윤태희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네가 묘정이랑 다를 게 뭐냐?”
비수처럼 박히는 말에, 윤태희의 한쪽 눈가가 일순 경련했다.
“…….”
잠시 침묵하던 윤태희는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윤태희가 선뜻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이내 무감한 눈으로 재겸을 응시했다.
“그러네.”
윤태희는 자신의 잘못을 덜어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실망했어?”
윤태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덧붙였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태어나기를 이렇게 생겨 먹었는데.”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재겸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이내 뭐에 붙들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허공에서 주먹을 꾹 말아쥐며 그대로 팔을 내렸다. 예전 같았으면 뺨이라도 때려서 화풀이라도 했을 테지만, 왜인지 이제는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왜? 때려도 돼.”
기가 막혔다.
손찌검할 수도 없고, 뭐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일까? 북받친 감정이 눈물로 나오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긴 세월 동안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감정의 빗장이 풀려서 망아지처럼 날뛰는 느낌이었다. 눈가에 열기가 몰리는 것을 깨달은 재겸은 눈매를 험하게 잡아 쥐었다. 자존심 상해하는 어린애처럼 고집스럽게 꾹꾹 눈물을 참았다.
그런데, 아무리 참아도 눈물이 나왔다.
결국, 오기로 참았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에 윤태희가 천천히 웃음기를 지웠다. 끝내 죽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목을 조르고 싶을 만큼 가여웠다.
“재겸아. 울지 마.”
윤태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재겸의 뺨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렇게 죽고 싶어?”
울고 있는 재겸을 보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눈물을 쏟아 낼만큼 죽고 싶다면. 단 하루도 더 살기가 싫을 만큼, 나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끝내 죽고 싶다면.
“그래, 알겠어. 그럼 같이 죽자.”
눈물 젖은 뺨을 애처롭게 쓰다듬던 윤태희가 말했다.
“너 죽고, 나도 바로 죽을게.”
소리 없이 씩씩거리며 눈물을 닦던 재겸이 윤태희의 손길을 탁, 쳐냈다. 아무리 봐도 윤태희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까부터 뭐에 쓰인 것처럼 말이 안 통하는 느낌이었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불현듯, 언젠가 윤태희가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너의 진짜 알맹이를 아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나는 널 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그리고 너도 날 알지.’
웃기는 소리다.
윤태희는 나를 모른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예전에는 그 무엇이라도 너에게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은 나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넌,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아냐?”
간신히 눈물을 삭여낸 재겸이 말했다.
“나는 죽으려고 온 게 아니야.”
“…뭐?”
“살려고 온 거야.”
윤태희가 멈칫하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너랑 같이 살려고. 그래서 온 거야.”
재겸은 윤태희가 슬프지 않기를 바랐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 윤태희가 겪어야 할 아픔과 절망이 있다면, 그 몫을 대신해서 짊어지고 싶었다. 자신이 조금 더 아프고, 조금 더 괴로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직 윤태희를 위해서, 윤태희를 남겨두고 떠나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그래, 마음만 같아선! 당장 죽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
사실대로 말하면, 재겸은 여전히 살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은가? 라고 묻는다면, 재겸은 솔직하게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왜 살아야 하느냐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물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재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삶’ 자체를 설명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근데 안 죽고 살기로 했어.”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고, 여전히 살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겸이 계속해서 살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그건 오직 ‘남겨질 사람’을 위해서였다.
“왜냐면 네가 좋으니까.”
말을 멈춘 재겸이 붉어진 눈으로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나는 알거든. 혼자 남겨지는 삶이 어떤 건지.”
윤태희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하루하루 사는 이유가 없어.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거야. 나는 계속 여기 있는데, 정신 차리고 돌아보면 아무도 없어. 그 기분이 어떤지 네가 알아?’
언젠가 윤태희와 나눴던 대화는, 그대로 가슴에 박혀서 재겸을 오래도록 괴롭게 했다.
묘정을 떠나보내고 나서 재겸은 줄곧 아프고 슬펐다. 영원히 지울 수도, 잊을 수도 없는 멍을 매달고 살았다. 남겨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움과 증오에 시달리며 과거에 갇힌 채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가 떠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이후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재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윤태희를 혼자 남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죽지 말자고, 언젠가 윤태희가 말했던 대로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그걸 나중으로 미뤄보기로 다짐했다.
“그걸 아는데, 아는데도 나는 너랑 살겠다고 여기에 온 거야. 나는 죽지 않지만, 너는 아니잖아.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 당장 무슨 일이 생겨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잖아.”
재겸이 울컥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가 사라지면, 그때는 나도 그만 살려고 부탁하려고 온 거야.”
재겸은 언제나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만약 어떤 연유에서든 윤태희를 먼저 떠나보내고 이 땅에 남겨진다면, 그때는 정말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묘정이 떠나고 난 후로 메산이와 정주가 곁을 지켜주었지만,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제 두 번 다시는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겨지는 사람의 상실과 고통을 이해하는 만큼, 재겸은 여전히 아이처럼 두려웠다.
때문에 재겸에게는 마지막 담보가 필요했다. 그렇게 최후의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훗날 윤태희가 죽고 나면, 그때 봉인해 달라고 하여 삶을 끝낼 생각이었다.
윤태희는 미동조차 없이 앉아서, 가만히 재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네가 나를 우습게 여기는 건 상관없어.”
나는 너를 위해서 이 삶을 버텨내 보기로 했다.
네가 있는 내일을 조금 더 살아가 보기로 했다.
“너는,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우습게 여긴 거야.”
그런데 윤태희는, 이러한 재겸의 결심과 맹세를 전부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물이 툭, 툭, 떨어져 내렸다. 재겸은 코를 훌쩍이며 팔을 들어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이렇게 눈물이 많았나 싶다. 험하게 눈가를 짓이기던 재겸이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등을 돌려 문으로 나가려는데, 윤태희가 손을 뻗어 재겸을 붙잡았다.
재겸은 저를 붙잡는 손목을 확 뿌리치더니, 그대로 몸을 틀었다.
뻐억—
자신을 뒤따라온 윤태희의 멱살을 잡더니, 얼굴에 냅다 주먹을 날렸다.
“이 개 같은 씨발새끼야.”
있는 힘껏 힘을 실어 때린 탓에 입안이 터졌다.
윤태희가 작게 신음하며 몸을 휘청일 때였다. 재겸이 윤태희를 벽에 쾅 몰아붙이더니, 입을 맞췄다. 윤태희의 입 안에 터진 피를 빨아먹은 재겸이 퉤, 침을 뱉으며 방을 나갔다.
“…….”
멍하니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윤태희가 주르륵 미끄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