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당황한 얼굴로 서 있던 재겸은 곧장 문간으로 다가갔다. 일단은 이곳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아무리 힘을 주고 잡아당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
문고리를 잡고 있던 재겸이 천천히 낯을 굳혔다.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이 방에 갇힌 것 같다는 직감이 섰다. 어쩌면 윤태희가 한 짓일지도 몰랐다.
그때, 뒤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 앞에 서 있던 재겸이 홱 고개를 돌려 어느 한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세히 보니, 어두운 벽면에 웬 인영 하나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패현이었다.
일전에 도서실에서 본 적이 있는 영귀라는 걸 기억해낸 재겸이 경계 어린 눈을 했다. 어둠 속에 숨어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패현은 팔짱을 낀 채, 마치 감시꾼처럼 재겸을 지켜보고 있었다. 줄곧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었으나 경황이 없던 탓에 미처 깨닫지 못했다.
“너 뭐야?”
패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재겸이 물었다.
“곁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정중한 대꾸에, 재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명령을 내린 건 틀림 없이 윤태희일 것이다. 재겸은 새삼 윤태희가 영귀를 부린다는 사실에 기이함을 느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콧대 높은 영귀들이 어째서 윤태희를 따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도 영귀 하나가 아니라 몇씩이나.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인간이면서 영귀를 부리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문 열어.”
재겸이 무감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패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문 열라고 했어.”
재차 던진 말에, 패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산을 벗어나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재겸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올라오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였다. 따라오지 말라는 말에 웬일로 순순히 말을 듣는가 싶었더니, 이런 식으로 치졸하게 굴 줄은 몰랐다.
윤태희는 가끔 애처럼 굴었다.
세상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여유만만한 어른처럼 굴다가도, 이럴 때 보면 윤태희는 영락없이 애 같다. 미성숙하고 서툴고, 오직 본인의 감정만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거다.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문 열어.”
어느덧 밤이 깊었다. 재겸은 현재 심신이 피로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마음의 진정이 필요했다. 영귀를 상대할 기운이 없었다. 오늘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고 싶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물러서시지요.”
패현은 흔들림 없는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말하게 하는 걸 싫어해.”
재겸이 눈을 가느다랗게 좁혀 떴다.
“다 박살 내 버리기 전에 문 열어.”
그러나 패현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
결국, 재겸은 심기가 뒤틀렸다.
“내가 봐주는 건 태희뿐이야.”
재겸이 눈을 치켜뜨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명령을 듣는 건 오직 태희 님뿐입니다.”
눈앞의 영귀는 훌륭한 수족이었다.
“…….”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입가에 비웃음을 매달았다.
“내가 이대로 문을 부수고 나가면 어쩔 건데?”
“발목을 잘라서라도 붙들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흐릿하던 재겸의 눈에 서서히 안광이 스며들었다.
“발목을 잘라?”
재겸은 작게 실소를 흘렸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허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 말대로 패현의 허리춤에는 검집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윤태희의 명령은 진심인 게 분명했다. 패현도 그 명령을 진심으로 이행할 생각이었다.
“그래?”
마침내 재겸의 눈동자에 날붙이처럼 섬뜩한 이채가 서렸다. 패현을 응시하던 재겸이 어느 순간 걸음을 옮겼다. 방 한쪽으로 향한 재겸은 병풍 옆에 매달려 있던 검을 손에 쥐었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봐.”
재겸이 검을 잡자마자 패현이 낯을 굳혔다.
“아니, 너 꼭 그렇게 해라.”
싸늘하고 음산한 목소리였다.
“못 자르면, 넌 죽는 거야.”
재겸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패현을 쏘아보았다.
장검을 손에 쥔 재겸은 패현을 돌아보다가,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갔다. 패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재겸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선 재겸이 말했다.
“네 손에 내 발목이 잘리거나, 아니면 내 손에 네 목이 잘리거나.”
그 말과 함께 재겸이 발도했다.
스르릉, 소리와 함께 잘 벼린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
패현의 낯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패현은 제법 착잡한 심정이었다. 싸우기 싫은 건 패현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패현은 재겸을 상대로 최대한 예를 갖추고 싶었다. 꽤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 주인이 아끼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재겸에게 위해를 가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물론, 재겸이 자신의 요구대로 순순히 따라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되도록 머리를 식히고 얌전히 있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심기를 어긋나게 만든 모양이었다. 이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겸은 검 끝으로 패현을 겨누고 있었다.
패현은 검집에 손을 갖다 대며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단주는 발목을 잘라서라도 데리고 있으라 말했으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는 없었다. 단주는 평소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감정적인 상태였다.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기절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패현은 별수 없이 검을 빼 들었다.
재겸이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서로의 검이 맞부딪치며 둔중한 충격이 손아귀에 전해져 왔다. 손이 저릿할 지경이었다. 패현이 몸을 틀었다. 검을 막음과 동시에 빈 곳을 찔렀다.
틈을 보였다간 정말 목이 잘릴 것 같았다. 물론 귀신을 벤다는 사인검이 아닌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나, 소년은 비범한 귀기를 지니고 있었기에 길게 끌면 정말 위험할 듯싶었다.
내내 방어적인 태도로 검을 휘두르던 패현이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패현의 기세가 바뀌자 재겸이 검을 고쳐잡았다. 패현의 움직임은 정적이었으나 날렵했다. 매끄러우면서도 유려한 검기. 신묘한 보법. 검을 섞으면 섞을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어느 순간, 재겸이 눈을 크게 떴다.
“…휘림?”
재겸이 내뱉은 이름에, 검을 쥐고 있던 패현의 자세가 일순 흐트러졌다. 패현은 움직임을 멈추고 어딘지 놀란 듯한 표정으로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을 알아들은 듯한 반응을 보이자, 재겸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둘은 얼마간 긴가민가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휘림을 알아?”
“휘림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동시에 말을 뱉었다.
“머리 짧고, 검을 잘 쓰는….”
“천하제일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기억을 대조한 패현과 재겸은 일시에 검을 거뒀다. 기억을 맞추어보니 서로가 알고 있는 ‘휘림’에 대한 정보가 정확히 일치했다. 재겸은 당황했다. 어떻게 이 영귀가 휘림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놀랍기만 했고, 그건 패현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연이 닿을 줄은 몰랐다.
“네가 휘림을 어떻게 알아?”
“한때 그 인간과 검을 나누었던 적이 있습니다.”
패현은 버려진 검에 혼이 들러붙음으로써 솟아나게 된 검귀였다. 패현은 한때 팔도를 떠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베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휘림을 처음 만났다.
“진짜로?”
재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베네 마네 하며 검을 섞고 있었으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튀었다. 덕분에 둘의 기세는 완전히 누그러져 있었다. 재겸이 들고 있던 검을 휙 집어던졌다. 패현은 곧바로 검집에 칼을 집어넣었다. 무장 해제와 함께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럼 혹시 태희한테 검을 가르친 게 너냐?”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말이 되었다.
공주 지부에서 단주와 마주쳤을 때, 단주가 휘림의 검기를 구사하여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패현은 휘림에게서 검을 배웠고, 그걸 윤태희에게 전수해줬던 거다.
“아주 비범한 인간이었지요.”
정말 그랬다. 묘정은 때때로 휘림을 만나러 갔지만, 재겸은 딱 한 번 휘림을 만났을 뿐 그 이후로는 휘림을 보지 못했다. 가끔 가다 휘림을 만나고 온 묘정으로부터 뭐하고 지내는지 근황만 전해 듣는 정도였고, 묘정과 연을 끊고 나서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일도 없었다.
한번 만난 것이 전부였지만, 휘림은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었다.
“휘림은 죽었어?”
패현이 그렇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래도 막상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묘한 기분이었다. 휘림은 묘정과 견줄 정도로 강한 이였으니 어쩌면 죽어서 영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귀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평소 인간을 싫어하며 연을 맺기를 꺼리는 패현이었지만, 휘림은 제법 마음에 드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휘림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다.
“젊어서 죽기엔 여러모로 아까운 인간이었지요.”
휘림은 소탈하고, 허례허식이 없었고, 강한 인간이었다.
“산달을 앞두고 자식을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채 허망히 떠났으니, 귀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저도 행방을 수소문해보았으나, 허물없이 이 땅을 떠난 모양입니다.”
패현이 생각에 잠긴 눈으로 말을 이어나갈 때였다.
“뭐?”
재겸이 멈칫하며 패현의 눈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 귀를 붙잡는 이야기가 있었다. 재겸이 토끼눈을 뜨고 있으니, 패현이 왜 그러느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휘림에게 부인이 있었어?”
재겸이 놀라워하며 물었다.
“…….”
그런데, 패현이 기이한 낯으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모르셨습니까?”
이상하다는 눈으로 재겸을 보다가, 패현이 말했다.
“휘림은 여인(女人)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