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휘림은 여인이었습니다.”
패현이 기이한 낯으로 뱉은 말에, 재겸은 숨을 멈췄다.
“……뭐?”
재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휘림이 여인이었다고?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돌이켜 보면 휘림은 묘정에 비하면 확실히 키가 작았고 왜소한 체격이긴 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어린 나이였던 재겸은 지금보다 몸집이 작았기 때문에, 어린 재겸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휘림은 평범하게 장성한 사내처럼 보였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휘림은 짧게 머리를 자른 모습이었다. 복장 또한 사내가 입는 옷을 입고 있었고, 검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묘정이 한 수 접고 들어갈 만큼 강했던 데다, 성격 역시 시원시원하고 수더분하면서도 호방하여 그 점이 사내답다고 생각했었다. 그 시대에 통용되던 신분과 예의범절에서 훌쩍 벗어나 있었기에 당연히 사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를 싹둑 자르고, 천하제일검이라고….”
더듬더듬 반박을 하다가, 재겸은 어느 순간 말을 끝맺지 못하고 제풀에 뒷말을 흐리고 말았다. 말을 하면서도 이러한 점이 반드시 사내이기에, 사내여야만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여인이라고 하여 그 시대에 상놈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지 못할 이유는 없고, 여인이라고 하여 천하제일검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불과 얼마 전에 사내라고 오인했다가 알고 보니 여인이었던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나를 사내로 알았던 모양이구나.’
오래 전에 만났던 수향도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때는 사내인 척 변복을 하고 돌아다녔단다. 여인을 잘 모르는 이들은 쉬이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테지. 허나 그 시절에는 아예 드문 일도 아니라, 왕왕 사내로 위장하는 여인들이 있었어. 아무렴 여인으로 살아가기에 힘든 시절이었으니 말이야.’
재겸은 혼란스러운 낯으로 하관을 틀어쥐었다.
말도 안 돼, 휘림이 여인이었다니…….
휘림이 여인이라는 것도, 아이를 품고 있었다는 것도 놀랍기만 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라 혼란에 빠져 있는데, 문득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묘정에게 정인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
일순 뒷골에 불쾌한 전율이 흘렀다.
하필이면 휘림이 여인이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이 순간, 수향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돌부리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근거 없는 생각일 뿐이었으나, 불분명한 예감에서 출발한 생각은 어느덧 점차 뚜렷한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생각해보니 묘정은 몇 년 만에 휘림과 재회한 이후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며칠씩 자리를 비우곤 했다. 멀리 사는 휘림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었다. 휘림을 보러 갈 때는 항상 묘하게 들뜬 기색이었는데, 돌아오고 나서는 매번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가끔은 마당을 서성이며 휘림의 서신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 묘정의 모습을 보면 사람 간의 관계에 서툰 재겸조차 각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는 그저 오랜 벗이라 정이 깊은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때 묘정은 휘림을 자신의 오랜 벗이라고 소개했었고, 실제로 두 사람은 허물없이 친밀해 보였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둘 사이에는 묘한 격식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수향이 말한 묘정의 정인은 휘림이 아닐까?
“그게 누구, 아니,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알아?”
대뜸 두서없이 던진 질문에, 패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알지 못합니다.”
패현이 휘림과 동행하며 지냈던 것은 한 철뿐이었다.
애초에 살갑게 정을 나누며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이후에는 간간히 왕래했을 뿐이고, 휘림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패현은 인간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관심이 있어도 그걸 캐묻는 성격도 아니었을뿐더러 휘림도 본인에 관하여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재겸은 턱을 매만지며 아연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묘정은 그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었어.’
그러고 보니 재앙신이 묘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놈아. 나는 혼인을 하려야 할 수가 없는 몸이다.’
‘혼인은 혼자서 하느냐, 짝이 있어야 하지.’
그리고 묘정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은 혼인을 할 수 없는 몸이라고. 확신할 만한 증거도 없고, 무언가 의심할 만한 광경을 본 적도 없다. 헌데 기묘하면서도 강렬한 직감이 든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묘정의 정인이 정말로 휘림이었다면? 휘림이 품고 있었다는 아이가, 묘정과의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라면? 묘정은 가정을 꾸릴 생각이었던 걸까? 휘림은 어쩌다 죽은 걸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럼…그 아이는 어떻게 됐어? 죽은 거야?”
“글쎄요. 까마득히 오래전의 일이니까요.”
패현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어리석은 질문이었다는 걸 알았다.
200년 전의 일이다. 묘정과 휘림은 이 세상에 없고,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었더라도 그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보았는지 아닌지 따져봤자 이제 와서는 부질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재겸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윤태희가 서 있었다. 윤태희는 바닥 한쪽에 떨어진 검에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눈을 들어 재겸을 바라보았다.
“…….”
“…….”
윤태희는 서늘한 낯으로 말없이 재겸의 눈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가 들리기에 잠에서 깨어난 재겸과 패현이 대치하는 상황일 거라고 생각했다. 난동을 부리고 있을 거라 예상하고 와 봤으나, 의외로 둘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어깨 너머에 서 있던 패현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때, 윤태희를 바라보고 있던 재겸이 눈에 힘을 주었다.
“너…….”
재겸이 윤태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기세가 워낙 흉흉하여 자신을 가둔 것에 화를 내고, 뺨을 한 대 올려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재겸은 윤태희가 입고 있던 두루마기 자락을 덥석 움켜쥐었다.
“너, 이… 이거 어디서 났어?”
윤태희가 멈칫하며 재겸을 내려다볼 때였다.
“이 옷, 이거 어디서 났느냐고!”
“…뭐?”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윤태희가 물었다.
“네가 이 옷을 어떻게…….”
두루마기를 움켜쥐고 있던 재겸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이건 묘정이 입던 옷이야…….”
재겸은 윤태희가 걸친 두루마기의 옷고름을 움켜쥐었다.
틀림없었다. 옷고름에는 바느질로 만든 잎사귀 모양의 자수가 붙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 관노의 도움을 받아서 묘정의 옷에 자신이 직접 새겨 주었던 삐뚤빼뚤한 잎사귀였다.
“…….”
윤태희가 멈칫하며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이건 내가 묘정한테 바느질해서 준 옷이라고.”
재겸이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
난데없는 말에, 윤태희가 설핏 눈매를 구겼다.
“대답해! 이 옷 어디서 났느냐고!”
옷고름을 움켜쥐고 있던 재겸이 흥분하여 고함을 쳤다. 윤태희가 어째서 묘정의 옷을 입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눈에 띄지 않았기에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그 잎사귀가 맞다. 이 옷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옷이었다.
“이 옷은 새로가 가지고 있던 옷이야.”
윤태희의 말에, 재겸이 흔들리는 눈으로 물었다.
“…새로?”
“그래, 영귀 중 하나야.”
잔뜩 흥분해 있던 재겸은 흐트러진 호흡을 몰아쉬었다.
“…….”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낯을 굳히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더는 너한테 안 속아.”
“뭐?”
“거짓말이잖아.”
어느새 재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사, 사실대로 말해.”
재겸은 갑자기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너… 대, 대체 뭐야…?”
그렇게 말하며, 재겸은 윤태희로부터 뒷걸음질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