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이건… 이건 묘정이 입던 옷이야…….”
어느새 재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갑자기 극심한 공포가 몰아닥쳤다. 어항 속에 갇힌 것처럼 눈앞이 울렁거리고, 현실감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시야의 모서리가 일그러지는 느낌은 멀미의 체감과 비슷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감각이었다.
“너… 대, 대체 뭐야…?”
그렇게 말하며, 재겸은 윤태희로부터 뒷걸음질을 쳤다. 본능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알 수 없는 오한과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에 있는 건 분명히 윤태희다. 고작 두루마기 하나 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재겸은 윤태희가 낯설고 두려운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 스승이 입던 옷이라니.”
그때, 가만히 재겸을 응시하고 있던 윤태희가 말했다.
“이 옷은 새로가 가지고 있던 옷이야.”
“거짓말이잖아. 더는 너한테 안 속아.”
재겸의 눈에서는 경계와 적대가 묻어나고 있었다.
“…….”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윤태희가 눈가를 구겼다. 대체 뭘 속인다는 건지. 윤태희는 아까부터 재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윤태희는 곁에 서 있던 패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패현 역시 재겸의 행동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재겸은 왜인지 겁을 집어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자초지종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윤태희는 재차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 아니야, 이 옷은 정말로 새로가…….”
“그 옷은 묘정과 함께 묻었어!”
난데없는 고함에, 윤태희가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
사납게 일갈한 재겸은 위태롭게 동요하고 있었다. 재겸은 한눈에 보기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윤태희가 천천히 낯을 굳혔다.
“새로.”
부름을 받고 나타난 새로에게, 윤태희는 곧장 질문을 던졌다.
“이 옷, 어디서 났어?”
“예?”
갑자기 불려 나온 새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상황을 살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두루마기 말이야.”
옷에 관심이 많은 새로는 주인 없는 헌 옷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단주가 입고 있는 두루마기도 그중 하나였다.
벽사단을 꾸릴 당시 벽사단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바깥에 알려지지 않도록 정체를 숨겨야 했다. 그에 단주는 오래 묵은 영귀로 위장하기로 하였는데, 새로는 단주가 오래 산 영귀처럼 보일 수 있도록 가지고 있던 옷 중에 제일 낡은 옷을 골라서 단주에게 주었다.
“워, 워낙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옷이라 잘 모르겠슴다.”
출처가 불분명한 옷이었다. 새로에게 이 옷의 가치는 길가에서 주운 돌멩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저 손길이 닿는 대로 수집한 옷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이 옷이 정말로 네 스승이 입던 옷인지 어떻게 알아?”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고개를 돌려 재겸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말 확신할 수 있어?”
옷고름에 직접 바느질한 잎사귀가 그 증거였다.
‘내 무덤에 들어가는 날, 이 옷을 입고 하직하리라.’
재겸은 언젠가 묘정이 해주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래전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가 눈을 떴을 때,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재겸은 흑색 장포를 덮고 있었다. 이 옷은 묘정이 남겨놓고 간 유일한 흔적이었다.
재겸은 그 길로 묘정을 찾아 헤맸다.
‘묘정, 옷을 돌려주려고 왔어.’
묘정이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재겸도 똑같이 되돌려 주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묘정에게 두루마기를 덮어주었다. 이후에는 약속대로 이 옷과 함께 묘정을 땅에 묻었다. 따라서 이 두루마기는 묘정이 눈을 감는 순간에 입고 있었던 옷이다.
“이 흑색 장포는 묘정이 아끼던 옷이야.”
재겸이 떨면서 뱉은 말에, 윤태희가 설핏 눈매를 좁혔다.
“하지만 이건 적색이야.”
“그… 그건….”
윤태희의 지적에, 재겸이 흔들리는 눈을 했다.
“묘정과 내 피가 섞였으니 색이 변한 걸지도 몰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윤태희는 몹시 괴상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기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을 제일 납득하기 힘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재겸이었다.
그럼에도 이 옷은 묘정의 옷이라고, 재겸은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말,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 너잖아.”
그래서 최후에 남는 의문은 이것이었다.
“사실대로 말해, 이 옷 어디서 났어?”
윤태희는 이 옷을 새로를 통해 얻었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기만 했다. 문제는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섬뜩할 정도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휘림에게 검을 배웠던 패현. 묘정의 옷을 가지고 있던 새로. 그리고 영귀를 부리는 윤태희. 각각 별개로 존재하는 일처럼 보여도 사실은 전부 다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다.
재겸은 어느덧 공포감에 사로잡혀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묻잖아, 너 대체 뭐 하는 놈이냐고…….”
재겸이 이마를 감싸 쥔 채 끙끙거리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뭐가 뭔지 하나하나 헷갈리고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윤태희는 부모가 없고, 청장의 손에 가족을 잃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거짓말이 아닐까 불신이 들었다.
어쩌면 모두가 나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추위를 겪는 것처럼 정신없이 몸을 떨던 재겸이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눈동자는 크게 팽창해 있었다. 불현듯 섬광처럼 머리를 스친 생각이 있었다.
설마, 그렇게 된 거였나?
윤태희의 눈을 들여다보며, 재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묘정이 살아 있구나…?”
“…뭐?”
재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묘, 묘정이 안 죽고 살아 있는 거지?”
이제 알겠다는 듯이, 재겸이 실소를 흘렸다.
“묘정이 안 죽고 살아 있었어… 사실은 전부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나례청을 부순다는 것도, 가족을 잃었다는 것도, 부모가 없다는 것도, 처음부터 나를 속이려고 꾸며낸 거짓말이었던 거야… 묘정이 너한테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거지, 묘정이 너를 사주한 거야! 그렇지?”
윤태희는 말을 잃고, 재겸을 바라보았다.
“…….”
재겸은 양팔로 제 상체를 끌어안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너희끼리 짜고, 나를 속인 거야…….”
묘정은 죽지 않았다. 그리고 윤태희가 내게 접근한 건 묘정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나를 망가트리기 위한 계략이었던 거다. 묘정은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윤태희에게 마음을 빼앗겨 속아 넘어갔다가, 결국은 배신당하는 결말이다.
재겸은 윤태희의 배후에 묘정이 있다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어떻게든 연관이 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묘정은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자, 더 커다란 절망과 고통을 주고자 이런 일을 벌인 거다.
“재겸아.”
“사실은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복수도, 전부다…….”
결국, 윤태희가 참다못해 재겸의 양어깨를 콱 잡았다.
“김재겸!”
윤태희가 큰 소리를 내자, 재겸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재겸이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윤태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눈동자에서 불안과 공포, 두려움을 읽었다. 윤태희가 묘정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깨닫자마자 이성을 잃은 것이다.
“나는 네 스승이랑 아무런 연관도 없어.”
“…….”
“정신 차려.”
“…….”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윤태희의 낯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묘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재겸이 상상하는 내막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재겸은 뭐에 씐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옷을 한 번 담가 보시지요.”
그때, 패현이 말했다.
“뭐?”
“이 자는, 단주님의 옷이 제 스승의 옷이라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경황이 없는 와중에, 윤태희가 멈칫하며 패현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스승의 옷이 정말 맞다면, 핏물이 번질 것입니다.”
패현의 손에는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대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재겸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윤태희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대야에는 투명한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패현의 말대로였다. 지금의 상황은 이 두루마기로 인해서 시작된 일이었다. 정말 이 옷이 묘정의 옷이라면, 직접 눈앞에서 확인시켜 주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윤태희는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벗어, 대야에 푹 담갔다.
“…….”
윤태희의 낯이 서서히 굳기 시작했다. 정말로, 대야에 핏물이 번졌다. 물감을 푼 것처럼 투명하던 물의 색이 점차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윤태희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했다.
정녕 이 옷은 묘정의 옷인가?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내 말이 맞잖아…….”
그때, 거보라는 듯 재겸이 하얗게 질린 낯으로 말했다.
“이, 이상해. 이상하잖아… 이상하잖아, 이상하잖아—!!!”
재겸이 양쪽 귀를 덥석 움켜쥐더니 고래고래 악을 썼다.
“…….”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어쩌다 제 수중에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다. 재겸이 놀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재겸이 우려하는 것처럼 묘정의 사주를 받았다거나,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것은 윤태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너의 스승과 관계가 없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새로.”
대야에 가득 찬 핏물을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이 피에 담긴 내력을 읽어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