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대야에 담긴 핏물을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말했다.
“피에 담긴 내력을 읽어 내.”
그러자 새로가 멈칫하며 시선을 주었다.
“…….”
단주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새로의 낯이 대번에 진지해졌다.
이 두루마기는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애초에 새로가 이 두루마기에 이끌렸던 이유도, 옷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기운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 옷에 깊은 원한과 강렬한 원념이 깃들어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바로 피 때문이었던 것이다. 재겸의 말대로 이 옷이 묘정의 옷이라면, 이 옷에는 두 사람의 피가 흠뻑 스며들어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일전에도 새로는 재겸이 흘린 코피를 통해서 과거를 읽어 낸 적이 있었다.
“할 수 있겠니?”
그때는 피의 양이 워낙 적었던 탓에 과거의 단면을 스쳐 지나가듯이 들여다본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번 단주의 두루마기는 꽤 방대한 양의 피를 머금고 있었다. 이 정도 양이면 재겸과 묘정, 두 사람의 과거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었다.
“예, 해 보겠슴다.”
새로는 대야에 담긴 핏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나절 정도만 시간을 주시겠슴까?”
그렇게 하라는 듯이, 윤태희가 눈짓을 했다.
재겸은 저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윤태희와 새로에게 번갈아 시선을 던졌다. 피의 내력을 읽어 내라니, 그 의미를 종잡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재겸으로서는 이것이 무슨 대화인가 싶었다. 그러자 윤태희가 재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새로는 피를 통해서 과거를 볼 수 있어.”
과거를 볼 수 있다고?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응시했다.
“…….”
확실히, 언젠가 윤태희에게 이와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제 봤던 귀신 둘, 기억나? 내가 아끼는 영귀들인데 그중 한 녀석한텐 과거를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이름은 새로라고 하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정식으로 소개해 줄게. 아무튼, 그래서 널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거든.’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과거를?”
“그래, 네가 모르던 과거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고개를 끄덕이던 윤태희가 망설이듯 덧붙였다.
“그리고 네 스승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을 테니까. 아마도.”
애써 냉연함을 유지했지만, 혼란스럽긴 윤태희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 스승이 선대 방상시인 걸 알고 있었어?”
“…뭐?”
“네 스승은 선대 나례청의 주인이었어.”
한계 허용치를 넘어선 이야기에, 머릿속이 정지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방상시는 선대 나례청을 세운 주인이자 신(神)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묘정은 분명히 인간이었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홍수처럼 범람하는 진실에, 재겸이 황망한 얼굴을 할 때였다.
“과거를 들여다보면, 네 스승에 대해서도 알게 되겠지.”
놀라운 것도 잠시, 재겸은 문득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아.”
가슴이 갑갑하고,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냥 모르는 채로 있어도 돼.”
생각해보면 재겸은 묘정이 어떤 인간인가에 대하여 언제나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케케묵은 과거를 들추어내야 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정체불명의 상자를 여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재겸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니, 너는 알아야 해.”
그때, 윤태희가 말했다.
“너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어.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연관도 없어. 하지만 너는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내가 그 사람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닌지, 새로가 읽어낸 과거로 네가 직접 판단하도록 해.”
“싫어, 그딴 거 필요 없어.”
재겸이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말했다.
“나 좀 그냥 내버려 둬.”
무엇보다 상상이 현실이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알고 싶으면서도 영영 모르고 싶었다. 알고 지낸 세월에 비하면, 확실히 묘정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묘정과의 연은 끊어졌고,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과거라고 생각하여 묻어 두었는데, 묘정은 아직도 저의 주위를 맴돌면서 그림자처럼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과거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는 마음보다도,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과 마주해야 한다는 막연한 공포가 훨씬 더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재겸의 정신은 많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 상황이 버겁고 괴롭기만 했다.
진실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불행을 자초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재겸은 자꾸만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었다. 공황 상태에 사로잡힌 재겸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컥컥거렸다. “재겸아.” 그에 윤태희가 재겸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을 때였다.
“건드리지 마!”
날카롭고 병적인 반응에, 재겸에게 닿으려던 윤태희의 손이 멈칫 굳었다.
“…….”
재겸의 목을 조르고 있던 것은 과거의 올가미였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도, 어느 순간부터 극단적인 방향으로만 생각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 달아나면 달아나려고 할수록 외려 늪에 빠지듯이, 재겸은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는 손을 거두었다. 고슴도치처럼 몸을 옹송그린 재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윤태희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더니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잘못했어.”
마침내 윤태희는 알아차렸다. 재겸을 이렇게 사지로 내모는 데 단초를 제공한 것은 묘정의 옷이다. 그러나 그 불씨의 먹이가 되어 불을 당긴 것은, 자신이 심어 둔 불신 때문이었다.
“네 스승이 시킨 일이라거나 사주를 받고 그런 일은 없었어.”
이대로 도망친다면, 재겸은 영영 묘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
“내가 여태 너를 속이고 거짓말을 했던 건, 네가 내 옆에 있어 주길 바라서 그런 거였어. 오로지 그 이유 하나뿐이야. 이제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말을 멈춘 윤태희가 손을 뻗어 재겸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진정해.”
재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잔뜩 흐트러져 있던 호흡이 가라앉으며, 몸의 떨림이 멎었다. 재겸은 생각했다. 결국은 어떻게든 윤태희를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고.
***
새로가 과거를 읽어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윤태희는 흑제에게 재겸이 잠시 잠이 들 수 있도록 의식을 매만져 줄 것을 부탁했다. 잠을 자는 건 현실에서 벗어나 평정을 되찾는 데 훌륭한 방법이었다. 홀로 방 안에 들어온 윤태희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정의 피를 얻어서 과거를 보게 된다면 재겸의 안에 든 것에 대해서도, 선대 나례청과 수향에 대해서도 무언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답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깊은 밤, 사방이 고요했다. 누각은 언제 소란이 있었느냐는 듯이 침묵에 빠져 있었다. 이 찰나의 적요와 평화에, 윤태희는 뒷골이 서늘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예전에 산에 가지를 치러 갔었지. 근데 어디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서,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찾아다녔는데, 가만 보니 신기하게도 땅속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땅을 파 보니 웬 비석이 있었는데, 거기에 기다릴 혜(徯)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지. 그래서 참으로 이상타 싶어서 비석을 치워 보았지. 그랬더니 웬 관이 있었어. 그래서 또 열어 보았지. 그런데 우리 선오가 그 안에서 자고 있지 뭐냐! 우리 선오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단다.’
문득, 윤태희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던 집에서 도망쳐 낙선암에 갔을 때, 선오는 주지승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털어놓았다. 주지승은 선오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다가, 속세와의 인연을 잘라내야 한다며 그대로 잊어버리라고 했다.
그때 선오는 주지승에게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고 물었는데, 주지승이 해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어느 날 누군가 절 앞에 갓난아이를 놓고 갔는데, 때마침 왕래하고 지내던 윤원중이 그 사정을 전해 듣고, 저를 데려다 키웠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쪽이 현실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자신이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윤태희는 묘정과 자신이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재겸의 생각이 비약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왜인지 마음 한구석으로 희미한 불안감을 느꼈다. 윤태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출처가 불명이었던 이 옷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출처 불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윤태희는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도르륵, 굴리는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 내가 정말로 네 원수와 연관이 있다면?
윤태희는 열어 놓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중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스스스, 바람이 불었다. 윤태희는 이지러진 달을 올려다보았다.
불길한 달빛이 눈동자처럼 윤태희를 직사하고 있었다.
“패현.”
밤을 노려보던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