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잠시 잠이 들었던 재겸은 익숙한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재겸은 눈을 꿈뻑거리며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무로 대들보를 세우고 황토를 바른 방 안 풍경은 어딘지 익숙했다. 멍하니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재겸은 이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한때 묘정과 함께 살았던 초가집이다.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꿈이라고 하기엔 이상할 정도로 생생한 현실감이 느껴졌다. 또한,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었고, 기억도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 거여도에서 가슴을 관통당하여 크게 다쳤을 때, 재겸은 제 속의 깊은 심연에 뚝 떨어졌다가 당시 봉인되어 있던 재앙신을 만났었다.
왜 또 여기에 온 거지?
이번에는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도 아닌데 어째서 또다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녀석이 먼저 저를 이곳으로 부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다. 안 그래도 녀석을 만나서 할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하여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이후로는 아무리 불러도 녀석이 반응하지 않아 말을 섞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눈을 굴리던 재겸은 몸을 일으켰다.
재겸은 창호지를 덧바른 문에 손을 갖다 댔다. 그때는 암만 문고리를 잡아당겨도 문에 아교풀을 발라놓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왜인지 평범하게 문이 열렸다. 덜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햇살이 내리쬐는 마당 한쪽으로 익숙한 등짝이 보였다.
‘소년’은 마당에 앉아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재겸은 소년의 등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야.”
그러나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소년은 묵묵부답이었다. 재겸은 마루에서 내려와 소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뭘 하고 있나 빼꼼 들여다보았더니, 소년은 손에 돌멩이를 들고 땅바닥을 긁으며 뭔가 낙서를 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글자이거나 진(陣) 같기도 했다.
“뭐 해?”
이번에도 소년은 재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돌만 끄적거렸다.
“…….”
무시로 일관하는 태도에, 재겸은 손으로 낙서를 휘휘 뭉갰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싸가지 없게 들은 척도 안 하냐?”
그제야 소년이 눈에 불을 켜고 고개를 들었다.
“썅, 뭐 하는 거야?”
소년이 씩씩거리며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내던졌다.
“너 진짜 뒤지구 싶냐? 조용히 자빠져 자다가 돌아갈 것이지, 왜 시비야?”
소년이 반응을 보이자, 재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 시비?”
소년은 일전에 재겸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몸을 달라는 둥 윤태희가 그렇게 좋냐는 둥 강짜를 부렸었다. 그런데 재겸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그 분풀이로 환상에 빠트려 윤태희를 다치게 했다. 그랬던 소년이 뻔뻔하게 성질을 부리니, 재겸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얹혀사는 주제에 얻다 대고… 어? 적반하장이 따로 없네? 야, 네가 했던 짓을 생각해. 너 지금 나한테 먼지 나게 쥐어 터져도 모자랄 판이야. 근데 뭘 잘했다고 눈을 부라려?”
재겸이 정색을 하자, 소년은 움찔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훽, 돌렸다.
“왜 왔어?”
소년이 팔짱을 낀 채 불퉁한 낯으로 꿍얼거렸다. 소년은 저번과는 다르게 재겸을 반기지 않았다. 왜인지 한껏 토라져 있는 것 같았다. 그에 재겸은 멈칫하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왜 왔냐니…….
“네가 부른 거 아니었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부른 것도 아니고, 저번처럼 의식이 가라앉은 것도 아닌데, 그럼 어째서? 왜인지 심연의 문턱이 이전보다 훨씬 낮아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 창호지 문을 열고 나올 때도 이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수월했으니까.
“그럼 나 이번에도 여기서 못 나가는 거야?”
“아니, 이제 너는 마음대로 들어오고 나갈 수 있어.”
“어째서?”
잠시 말이 없던 소년이 재겸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긴, 네가 저번에 금줄을 깼으니까 그렇지.”
소년이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어쨌거나 저번에는 한 번 들어오면 나갈 수 없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혼자서도 나갈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재겸은 소년을 다시 만나면 하고 싶은 얘기도, 묻고 싶은 얘기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제일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당장은 묘정에 관한 것이었다. 지난번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녀석은 묘정에 대하여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묘정이 선대 방상시였다는 거, 너도 알고 있었어?”
“그래.”
“근데 왜 말 안 했어?”
“안 물어봤잖어.”
소년의 뻔뻔한 태도에 재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럼… 묘정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던 거야?”
“묘정은 본향의 표식을 가진 인간이었어.”
“본향?”
“응.”
본향에서 왔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본향은… 내가 나고 자란 고향 땅을 말하는 거잖어.”
“응, 맞아. 본향은 모든 인과의 시작점이니까.”
“그러니까 본향이 정확히 뭔데?”
심드렁하게 하품을 하던 소년이 먼 곳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재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유리알을 박아 넣은 듯한 안광과 총기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신(神)의 눈을 한 소년이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더니, 마치 노크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이 딛고 있는 땅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본향은 네가 나고 자란 땅.
네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이자 앞으로 걸어야 할 길.
네가 여태껏 이뤄낸 일들과 장차 이룩해야 할 모든 것들.
네 삶을 둘러싼 그 자체이자 이 세계를 이루는 총체.
성의 없이 설명을 마친 소년이 무심히 말했다.
“이게 본향이야.”
재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년이 말한 본향의 개념은 너무나도 거대했고, 난해했으며, 추상적이었다.
“네가 말한 본향 말이야. 인간들은 본향을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
“뭐라고 하는데?”
얼마간 묵묵히 개미 떼를 내려다보던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인간은 그걸 <운명>이라고 불러.”
시선이 격돌하는 그 순간, 소년은 문득 기이한 전율을 느꼈다.
“…….”
소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소년은 매우 신기한 물건을 보는 것처럼 재겸의 이목구비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재겸의 말을 천천히 소리 내어 곱씹어 보았다.
“…운명?”
묘한 낯을 하고 있던 소년이 불현듯 잇새로 웃음을 흘렸다. 실소처럼 흘러나온 웃음은 점점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어느샌가 크게 웃고 있었다.
“그래, 맞네! 맞아, 네 말이 맞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박장대소를 하던 소년은 이젠 숫제 발까지 동동 구르고 있었다. 소년은 왜인지 신난 기색이었다.
“너희 인간들에게 본향이란 <운명>인 거구나.”
소년은 재겸의 뺨을 감싸 쥐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럼 네 말대로라면, 묘정은 ‘운명을 배신한 인간’이 되는 거네.”
“그게 무슨 말이야?”
“묘정은 본향의 표식이 있는 인간이었으니까.”
“…본향의 표식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인데?”
“본향이 특히 아낀다는 뜻이지.”
재겸이 묘한 표정을 짓자, 소년이 부연했다.
“쉽게 얘기하면 세상이 편애하는 ‘귀한’ 인간인 거야.”
“편애?”
“그래. 말하자면 이 세상은 본향의 장기판이야. 모든 게 본향의 소관이고, 본향이 만들어낸 흐름 속에 있지. 본향 혼자 양쪽을 번갈아 가면서 장기를 두고 있는 셈이야.”
그 양쪽은 이승과 저승, 생과 사, 빛과 어둠, 선과 악, 인간과 귀신일 때도 있었다.
“신령, 영물, 인간, 귀신, 짐승, 모든 것이 본향의 장기 말이 될 수 있어. 하지만 장기 말이라고 다 같은 장기 말은 아니야. 인간의 역사를 늘어놓고 보면 훨씬 위력적이고 활약을 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패들이 있었지. 그게 바로 본향의 표식이 있다는 거야.”
부차적인 설명을 마친 소년이 재겸에게 시선을 주었다.
“알겠냐?”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재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먼 곳을 바라보던 소년이 심드렁한 투로 말을 덧붙였다.
“묘정도 그중에 하나였어. …마지막에 가서는 버려졌지만.”
뒤이어 흘러나온 이야기에 재겸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뭐? 버려졌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말했다시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본향이 꾸며낸 인과거든.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소수의 인간뿐이지. 그리고 묘정은 난 놈이라 그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어.”
재겸은 소년을 응시한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결국 본향을 배신하게 된 거지.”
“묘정이 본향을 배신했다고?”
“응.”
대번에 알아듣기 힘든 난해한 이야기에 재겸이 설핏 눈가를 구겼다.
“대체 왜, 뭘, 어떻게 배신했다는 거야?”
“묘정은 본향이 쥐여 준 금기를 발로 걷어차고 엇나갔거든.”
소년이 뺨을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중얼거렸다.
“뭐, 아무래도 묘정에게 주어진 금기는 인간이 짊어지기에 제법 가혹하긴 했어.”
“…그게 뭐였는데?”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그 누구의 편에도 서지 말라.”
“…뭐?”
“그 어느 쪽에도 마음을 기울이지 말라.”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묘정을 회상하던 소년이 한참 만에, 곧은 눈으로 재겸을 돌아보았다.
“묘정은 그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었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