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90)화 (290/348)

#290

새로가 피에 담긴 내력을 전부 읽어 냈다는 소식을 전해 온 것은 반나절 만의 일이었다. 일전에 재겸이 흘린 코피로 과거를 읽어 냈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속도였다.

당시 도서실 휴지통에서 얻어낸 피는 그 양이 워낙 적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깊이도 한정적이었고, 내용도 흐릿했다. 스치듯 짧은 과거의 단편이었음에도 쉽게 판별하기가 어려웠던 터라 밤낮없이 며칠을 꼬박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루마기에서 나온 피의 양이 대야 몇 개를 채울 만큼 넘쳐났던 덕분에, 제법 빠른 시간 안에 읽어 내는 것이 가능했다.

잠에서 깨어난 재겸은 흑제의 안내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나무로 된 복도를 걸으며 열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지자, 어두운 밤하늘이 보였다. 모두가 숨죽인 야심한 밤이었다.

흑제가 이끄는 대로 복도를 걸어 방 안에 들어서자, 반닫이 함 위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윤태희가 고개를 돌려 재겸을 바라보았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잘 잤니?”

재겸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폭풍전야와도 같은 기이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몇 시간 전, 패닉에 빠져 이성을 잃고 마구 날뛰던 재겸은 다행히도 평정심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두려움이 여진처럼 남아 눈동자가 진동하고 있었다.

곧이어 새로가 들어왔다.

반나절 만에 방대한 양의 과거를 읽어 낸 새로는 잔뜩 지쳐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힘을 쓴 탓에 기력을 전부 소진한 모양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비단 피곤하다는 이유에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새로의 표정에는 몹시 유감스러운 일을 겪은 사람처럼, 어딘지 묘한 낭패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윤태희가 내력의 주인이 재겸과 묘정이 맞느냐 물었다.

“예, 두 분의 피가 맞았슴다.”

새로의 긍정에, 윤태희와 재겸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윤태희는 새로에게 곧장 눈짓을 했다. 피를 통해 본 것을 말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새로는 곤란하다는 기색을 비쳤다.

“그게, 문제가 있슴다.”

“뭔데?”

“과거의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말로 전하기는 힘들 것 같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어?”

윤태희의 질문에, 새로가 잠시 고민하는 눈을 했다.

“흑제의 힘을 빌리면 어떻겠슴까?”

이론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흑제는 잠든 이에게 꿈을 심을 수 있었다. 새로는 자신이 읽어낸 내력을 그 자체로 흑제에게 전해주고, 흑제를 경유하여 재겸과 윤태희에게 꿈의 형식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있겠어?”

새로의 말에 윤태희는 흑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윤태희와 재겸은 머리를 반대 방향에 두고 나란히 누웠다. 꿈을 통해서 과거를 보게 되는 것이니 몸은 잠자는 상태가 된다. 재겸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심호흡을 했다. 마치 처형대에 눕는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재겸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어느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본디 천지의 조화는 신묘한 것이라 인간의 머리로는 알 수 없고, 인간의 눈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원(願)은 없던 것도 만들어낼 수 있다.

귀신은 기(氣)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평범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귀신은 육신도 없고 실체도 없고 기(氣)로서 존재할 뿐이니,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행할 수 없는 나머지 자신을 대리할 수 있는 누군가의 힘을 빌리고 싶어라 하는 것이다.

귀신이 행사하는 영향력은 누군가에게는 통하고, 누군가에게는 통하지 않는데, 이는 날 때부터 그러한 팔자와 체질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귀신이 똑같이 산 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면, 누군가는 멀쩡할 것이나 누군가는 추위를 느낀다. 이는 타고나기를 남들보다 민감하게 느끼는 인간이기 때문이니, 귀문이 있거나 신의 그릇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한다.

이로 인하여 귀신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고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싶어 하며 산 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 과정에서 온갖 괴이한 일이 발생하게 되었으니…….

따스한 봄날, 자선원(自善院)에서는 강론이 한창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경상(경전을 올려놓는 좌식 책상) 앞에 앉아, 같은 또래 아이들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사방이 탁 트인 전각에 늙은 노인의 음성이 적당한 울림으로 퍼져나갔다.

녹음이 우거지고 새가 지지배배 울었다.

신록의 계절이었다.

강론이 끝나고, 모두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그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나온 소년이 있었다. 이 무리 가운데 가장 최근에 들어온 소년은 다른 또래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같은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체구가 작았다.

그뿐만 아니라 왜소한 체격의 소년은 모든 게 느렸다. 걸음도 느리고, 행동거지가 묘하게 굼떠서 항상 마지막이 되어서야 미적미적 자리를 뜨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소년은 이곳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음에도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처럼 혼자 동떨어져 지내고 있었다. 언제나 무리에서 겉도는 소년이었기에 제대로 된 벗이라고는 아직 한 명도 없었다.

느리게 걷는 소년 앞으로, 어디선가 돌멩이가 툭 날아들었다.

“야, 맹추야.”

소년은 고개를 돌려 돌멩이가 날아든 방향에 시선을 주었다. 목검을 들고 선 아이들이 한데 모여서 저를 바라보고 킥킥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 느린 소년에게는 눈에 띄는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

바로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문제인지 소년은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치 새끼줄을 칭칭 감아서 자루를 꽉 묶어 맨 것처럼 무엇을 해도 아무런 소리를 낼 수 없었으나 소년은 성격이 매우 지순하여 아이들이 장난을 치거나 놀리는 일이 있어도 그저 웃기만 할 뿐, 화를 내지 않았다.

“저래 가지고 귀신 앞에서 경문은 어떻게 읊겠어.”

“그러니까 말야.”

“왜 진작에 안 쫓아내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아이들이 들으라는 듯이 구박을 주기 시작했다.

“근데 쟤, 진짜 말 못 하는 거 맞나?”

“누가 저번에 말하는 거 들었다던데.”

“에이, 설마.”

옥신각신하며 수군거리던 아이들이 소년에게 다가왔다.

“야, 맹추야.”

한 아이가 무딘 검 끝으로 소년의 가슴을 쿡 찌르며 말했다.

“아— 하고 소리 내봐.”

“…….”

“응? 해 봐, 해 보라니까?”

“…….”

멀뚱멀뚱 서 있던 소년이 잠시 눈을 굴리는가 싶더니 입술을 벌렸다. 그런데 소년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것은, 겨울날 추위에 언 손을 녹일 때처럼 허한 숨소리뿐이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소곤소곤 말을 나눴다,

“진짜 말 못 하는 건가?”

“답답해 죽겠네.”

“맨날 저러고 웃기만 하잖아.”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목검으로 한 대 때려 보자.”

“그래! 때리면 아프니까 뭐라도 말을 하겠지.”

작당 모의를 끝낸 아이들이 은밀히 눈짓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 아이가 보란 듯이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대로 소년을 때리려 할 때였다.

휙—

그때, 나뭇가지가 훅 끼어들더니 순식간에 목검을 뎅겅 베어버렸다. 모두가 흠칫하며 몸을 물렸다. 웬 방해꾼이 갑자기 나타나 훼방을 놓았음에도 아이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방해꾼은 어린 신출내기임에도 귀기를 잘 다루기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해꾼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소년의 앞을 가로막고 선 방해꾼은 눈앞의 무리를 노려보았다. 나뭇가지에는 귀기가 실려 있었다. 무리 중 대부분은 아직 귀기를 제대로 꺼내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는데, 아이는 고작 나뭇가지로 목검을 베어버린 것이다. 놀란 아이들이 우물쭈물하면서 시선을 피할 때였다.

방해꾼이 말했다.

“너, 왜 그러고 서 있어?”

“…….”

“얻어맞기 싫으면 피하든가, 덤벼야지.”

“…….”

그건 소년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눈앞에 선 녀석들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했다.

덤빌 자신이 있으면 덤비라는 것이었다.

“너, 너도 궁금하지 않아?”

잠시 주춤했던 아이 중 하나가 울컥하며 쏘아붙였다.

“뭐가?”

“쟤가 진짜로 말을 하는지, 못하는지!”

소년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자선원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

그에 방해꾼은 고개를 뒤로 젖혀 소년을 힐끗, 보았다.

“나는 쟤가 너네 앞에서 왜 말을 안 하는지 알 것 같은데.”

“뭐? 왜, 왜인데?”

방해꾼이 입가 한쪽에 삐죽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네가 말 섞을 가치도 놈들이라 말을 안 하는 거겠지.”

말을 마친 방해꾼은 그대로 휘적휘적 자리를 떴다.

멀뚱멀뚱 서 있던 소년은 강아지처럼 방해꾼 뒤를 졸졸 쫓아갔다. 느릿느릿하던 걸음은 온데간데없이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평범했다.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랐다.

그날부로 소년에게는 다른 별명이 생겼다.

애구(愛狗)

휘림의 작은 개.

어린 시절, 묘정이 달고 다녔던 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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