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91)화 (291/348)

#291

휘림은 묘정보다 두 살 위였다.

휘림은 자선원 내에서도 별종으로 취급받았다. 성격이 워낙 자유분방한 데다 평범한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선머슴처럼 사내애가 입는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휘림은 또래 사이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눈에 띄었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능력이 출중하고 귀기가 강했던 탓에 시기와 질투를 받는 일도 왕왕 있었다. 안 그래도 어린 나이에는 한두 살 차이가 큰 격차였다. 휘림은 또래 중에서도 키가 컸다.

반면에 묘정은 또래에 비해 작아서, 둘이 나란히 서면 머리통 하나만큼 키 차이가 났다.

휘림은 다른 녀석들과 달리 저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묘정을 처음엔 의아하게 여기는 듯했으나, 묘정의 성정이 워낙 순하고 체구도 작았던 탓에, 머지않아 묘정을 어린 남동생을 대하듯이 제법 귀엽게 여기게 되었다. 그렇게 둘은 금세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휘림은 어린 나이치고 성격이 독한 면모가 있어서, 받은 만큼 반드시 갚아준다는 철칙이 있었다. 때문에 ‘휘림의 작은 개’라는 별명을 얻고 나서부터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네게도 소개해 줄게. 내 벗이야.”

휘림은 묘정에게 자신의 단짝을 소개해주었다.

“안녕, 네가 그 애구(愛狗)구나.”

선머슴 같은 휘림과는 달리, 곱게 머리를 땋고 치마를 입은 또래였다.

“나는 수향이라고 한다.”

그것이 묘정과 수향과의 첫 만남이었다.

수향은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이었다.

따라서 어린 나이임에도 엄격한 예법이 몸에 배어 있었고, 행동과 말투에서도 격식이 묻어났다. 그래서인지 수향은 휘림과 같은 동갑이었음에도 훨씬 의젓하고 어른스러웠다. 수향은 천덕꾸러기 같은 휘림과, 그런 휘림을 졸졸 따라다니는 묘정을 보며 “채신머리없게!”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으나, 종국에는 함께 깔깔 웃으며 즐겁게 어울리고는 했다.

셋은 한배에서 나온 남매처럼 잘 지냈다. 휘림과 수향은 묘정을 어린 동생을 대하듯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살뜰히 살펴 주었고, 묘정도 두 사람을 곧잘 따랐다. 의젓한 수향이 큰 누이라면 휘림은 작은 누이, 묘정은 막내였다. 말을 하지 못하는 묘정은 나무 작대기를 들고 다니며 땅바닥에 글을 쓰거나, 손바닥을 뺏어와 글을 써서 필담으로 대화를 했다.

셋은 강론이나 수업이 없는 날에는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소풍을 다녔다.

서로 부족한 수련을 도와주기도 하고, 봄이면 함께 나물이나 약초를 뜯으러 다니고, 진달래를 따서 꿀을 빨아 먹고, 여름이 찾아오면 냇가에 가서 멱을 감거나 물고기를 잡았다.

채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향은 늘 바위에 앉아서 구경했다. 물속에 뛰어드는 건 휘림과 묘정뿐이었다. 묘정은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탓에 물속에 들어가서 허우적거리기 일쑤였지만, 휘림은 성격이 대범하여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나오고는 했다. 오늘도 물속 깊은 곳까지 헤엄쳤다가 땅 위로 돌아온 휘림의 손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퍼덕이고 있었다.

“이거 봐, 잉어를 잡았어.”

물에 푹 젖은 몰골로 걸어 나온 휘림이 묘정과 수향에게 손짓했다.

“잉어가 보양에 좋대. 불에 익혀서 먹자.”

묘정은 그러자는 듯이 방긋 웃어 보였으나,

“나는 잉어를 안 먹어.”

반면에 수향은 손사래를 쳤다.

“우리 집은 잉어를 먹으면 안 되거든.”

“어째서?”

“시조 때부터 내려온 전설이 있었대.”

휘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실히 그런 얘기를 들어 본 적도 있는 것 같다. 제법 유명한 이야기였다. 잉어를 먹지 않는 집안이 있다고. 휘림은 손안에서 퍼덕이는 잉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잉어를 풀어주었다.

“하지 말라는 게 참 많은 세상이네.”

휘림은 철퍼덕 뒤로 누우며 불만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

휘림이 제 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수향이 말했다.

“손을 꽤 험하게 썼구나.”

타고나기는 곱고 예쁜 손이었으나, 거듭된 수련으로 인해 곳곳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어려서부터 검을 잡았으니까.”

“검은 누구한테 배웠어?”

“아버지가 알려 주셨어.”

휘림의 집안은 대대로 무반을 거쳤으나 지금에 와서는 쇠락한 양반 가문이었다. 휘림의 부친은 한때 작은 고을에서 무관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일대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그런데 관리들은 백성을 구휼하기는커녕 힘없는 이들을 수탈하고, 부패를 일삼았다. 부친은 그에 큰 회의를 느끼고 재야에 묻혀 살아가기로 했다고 한다.

휘림의 부친은 먼 지방으로 자리를 옮겨 산속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휘림의 모친은 그 산 인근에 노모를 모시고 살던 무녀(巫女)였다. 둘은 서로 왕래를 하고 지내다가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바로 휘림이었다. 풍족하지는 못해도 제법 단란한 가정이었으나 휘림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후로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집은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만석 곳간을 가진 분이셨거든.”

부친은 휘림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어렸을 적부터 스스로 몸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며 검을 가르쳐 주셨어.”

림아,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고는 하나 <논어>에 이르기를 무릇 가르칠 때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 한 번 났다면 소임을 다해야지. 무엇을 할지는 네가 정하는 것이니, 너는 스스로를 갈고 닦는 데 게을러서는 안 된다. 먼 훗날 시간이 흘러 백성이 이 땅의 주인이 되고, 여인도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귀천 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

태초에 길은 없었을 것이다.

길은 날 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지. 우리가 걷는 이 길도 마찬가지란다. 계속 발길에 다져지고, 다져져서 길이 된 것이겠지. 우리네 삶도 이와 같지 않겠느냐?

네가 내딛는 첫걸음이 길을 여는 것이요,

네가 원한다면 너는 어디로도 가지 못할 이유가 없단다.

“…….”

휘림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길은 날 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

한 해가 흘러 다시 제자리, 어느새 여름의 초입이었다.

한 해가 지난 뒤 묘정은 제법 키가 컸다. 휘림과 수향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키가 작았던 묘정은 어느덧 이전보다 한 뼘 정도 높아진 눈높이에서 휘림을 올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날이 무더워졌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묘정은 강론을 마치고 나오는 휘림에게 갔다.

[냇가에 멱 감으러 가자.]

묘정은 빙그레 웃으며 땅에 글자를 썼다. 작년 여름에도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멱을 감고 물고기를 잡았으면 했다. 항상 앞장서서 묘정을 끌고 다니던 휘림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묘정의 필적을 바라보는 휘림의 표정이 오묘했다.

[왜 그래?]

휘림이 대꾸를 하지 않자, 묘정이 다시 작대기를 움직였다.

[냇가에 가기가 싫어?]

“날이 덥긴 해도, 아직은 물이 차가울 거야.”

[그런가?]

“그래, 조금 더 더워지면 그때 가자.”

[응.]

묘정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여름이 되어 뙤약볕이 내리쬐는 계절이 되었음에도 휘림의 거절은 계속되었다. 휘림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딴청을 피우고, 멱을 감으러 가자는 묘정의 말을 번번이 내치기 일쑤였다.

[요즘 왜 저러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묘정은 수향에게 가서 그 이유를 물었다.

“휘림은 아마 더 이상 너랑 냇가에 가지 않을 거야.”

[어째서?]

“이제는 그런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수향은 애매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휘림의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휘림은 달에 하루 이틀쯤 모습을 감췄다. 언제나 열의가 가득했던 휘림답지 않게 수업을 빼먹는 날도 있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묘정은 휘림에게 가서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휘림은 아무렇지 않게 ‘바빴어.’, ‘일이 있었어.’ 하고 어물쩡한 대답으로 넘기곤 했다.

‘내가 싫어졌나?’

묘정은 의기소침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흘이 지나도록 휘림을 보지 못했다. 전전긍긍하던 묘정은 휘림이 묵는 동재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동재로 바삐 걸음을 옮기는데, 외문 근처에서 아이들이 수근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꼴좋다, 어르신께 잔뜩 혼나고 있어.”

“하하, 그 높은 콧대가 콱 찌그러졌겠어.”

묘정은 담장에 등을 붙인 채 귀동냥을 했다.

“부정한 몸으로 부적을 썼대.”

“부정한 몸이라니?”

“너 그거 몰라? 왜애, 계집애들은 말야, 나이가 차면 달에 한 번씩….”

이야기를 훔쳐 듣던 묘정은 까치발을 세우고 슬쩍 안을 훔쳐보았다. 예전에는 까치발을 들어도 안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제법 키가 자라서 담장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청 한쪽에서 휘림은 다리를 걷은 채로 나이 든 여자 어른으로부터 회초리질을 당하고 있었다. 휘림의 흰 종아리에는 붉은 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부적을 쓸 때는 반드시 정결한 몸으로 써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거늘.”

묘정이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이 어쩌자고 거짓말을 했느냐? 왜 달거리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어?”

휘림의 흰 종아리에 가느다란 회초리가 몇 번이고 날아들었다.

“그것이 숨긴다고 숨겨지는 줄 아느냐? 부적뿐만이 아니라 비방을 하거나 의식을 올리는 일에서도 필히 달거리를 하는 여인은 삼가야 한다. 부정을 타게 된단 말이야. 달거리가 시작되면 모든 할 일을 멈추고 근신하라 하였거늘…….”

달거리를 하는 여인은 액막이를 비롯한 축역, 정화 등 여러 의식이나 비방을 행할 때 그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부적을 쓰는 일은 특히나 몸이 정결한 상태여야 하기에 이 금기를 엄격하게 지켜야만 했다.

“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못할까!”

“달거리를 하는 게 죄입니까?”

“뭐?”

“어르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래도…….”

호통과 함께 회초리가 날아들었다. 휘림은 이를 악물고 매를 받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으나 휘림은 지독하게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외려 담장 밖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묘정의 낯이 더 아프게 구겨졌다. 매질이 끝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문밖으로 나온 휘림이 붉어진 눈으로 문간에 모여 있던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뭣들 하고 있어? 구경났어?”

휘림의 싸늘한 일갈에, 아이들이 흠칫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으스대지 말란 말이야! 지금은 네가 우리를 이기지만….”

그때, 무리 중 하나가 휘림의 등에 대고 입을 열었다.

“몇 해만 지나면 너는 우리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휘림은 멈칫하며 몸을 세우더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왜?”

“왜, 왜냐면! 그게 정해진 섭리니까!”

“…….”

그날 밤, 휘림은 자선원을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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