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휘림이 던진 질문은 호수와도 같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묘정은 하루종일 마음이 복잡했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휘림과 헤어져 자선원의 처소로 돌아온 묘정은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오지를 않았다. 계속 뒤척이던 묘정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누워 있기가 지루하여 잠시 들여다 볼 요량으로 서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묘정이 고른 책은 나례청의 유래와 역사를 전승하기 위하여 쓰여진 기록서로, 자선원에서 교본으로 쓰이는 책이었다.
묘정은 바닥에 턱을 괸 채 책을 읽어나갔다.
방상시가 이 땅에 온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방상시는 본향의 사자요, 본향의 종이며, 본향의 수레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방상씨, 방상제라고도 불렸으며 악귀와 역병이 들끓던 난세에 좌정하였다고 전해진다. 얼굴에 황금사목을 쓰고,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 방상시는 성명자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정을 파破하고 산散하여 악귀를 격퇴했다. 또한 미약한 인간에게 귀신과 물리적으로 통通하는 원력原力을 전하여 주었는데 이를 귀기라고 한다. 이에 귀기를 전해 받은 인간은 몇 대에 걸쳐 민들레 홀씨처럼 세상에 퍼져 나가게 되었고 ‘귀한 재주를 받았다’고 하여 귀재貴材라고 한다.
방상시는 이 땅에 좌정하여 나례의 근간을 세우고 인간과 한데 어울려 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승의 섭리가 평안케 되자 소임을 다하였다 여기고는 하늘로 돌아가겠노라 하였다.
곁에서 그를 모시던 인간들은 한없이 슬퍼하며 “신주께서 떠나시니 두렵나이다.” 하고 손을 빌었다. 이를 긍휼히 여긴 방상시는 인간 하나를 택하여 황금사목을 물려주며 말하였다.
이 탈이 나의 일체一切이니 네가 나의 현신現身이로구나.
탈을 받든 인간이 고개를 숙이니 비로소 방상시가 귀천하였다.
책을 들여다보던 묘정은 눈을 깜빡였다.
역사는 누군가를 거쳐서 전해 내려오는 기록이므로 믿을 것이 못 된다. 기록에는 의도가 있기 마련이다. 그 의도에 따라서 어떤 내용은 교묘하게 왜곡되기도 하며 어떻게든 불순물이 섞이기 마련이다. 후대의 손에 쥐어진 역사는 여러 차례 깎여 나가고 걸러진 기록이다.
이 서책 곳곳에는 거짓이 섞여 있다. 그리고 묘정은 어디까지가 참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 알고 있었다. 책에는 방상시가 탈을 물려줌으로써 인간을 자신의 현신으로 삼고 하늘로 떠났다고 적혀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방상시는 아직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다.
방상시는 하늘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인간은 하늘로 돌아가려는 방상시를 붙잡아 탈 속에 가두었다. 방상시가 있음으로 하여금 인간이 누릴 수 있었던 가호를 상실함에 두려웠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순수한 탐욕이 만들어 낸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탈 속에 갇히게 된 방상시는 그 자체로 물신(物神)이 되었다.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존재이자 만물의 경외자이던 방상시가 어째서 하찮은 인간에게 사로잡혀 탈 속에 갇히게 된 것인지, 한낱 인간 주제에 어떻게 감히 신을 도구 삼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는가? 어떤 술수였든 간에 인간의 위대함이라고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으리라.
방상시의 탈을 얻은 인간은 그 탈을 씀으로 말미암아 성명자의 힘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신의 권능이었다. 방상시의 탈을 쓰면 그 누구라도 신이 될 수 있었고, 인간에게 배신 당한 방상시는 한순간에 인간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탈 속에 갇힌 방상시는 크게 탄복하였고 크게 웃었으며, 다음과도 같은 말을 남겼다.
아! 염원은 갸륵하고 탐욕은 추악하구나!
나는 너의 힘이자 낙인이 될 것이다. 나를 가지는 대가로 한철의 번영과 일생의 쇠락을 주마. 나는 너의 피를 타고 뱀의 독처럼 번져 내려갈 것이다. 너의 피가 섞인 모든 역사를 효시(梟市)할 것이니 네 피에 속한 자는 그 누구라도 이 죄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너와 네 후손은 누구도 누리지 못할 명예와 위업과 경외와 영광을 얻을 것이나 정작 중요한 단 하나만은 영영 가질 수 없으리라. 나를 가졌다 한들 나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황금사목을 얻음으로써 신의 권능을 손에 쥐게 된 그는 현신(現身)으로 추대되었고, 나례청의 주인이 되었다. 그는 인간인 동시에 신이었다. 방상시의 현신으로서 탈을 쓰고 나례를 베풀었으며, 귀신과 인간 앞에 군림하였고, 탈을 쓰고 있을 때는 만물이 그를 경외하였다. 방상시가 남긴 말처럼 그는 일평생 인간으로서 누릴 수 없는 위엄과 복록을 얻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모든 것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현신이 살다 간 일생은 한 인간으로서의 삶으로 보면 오히려 불행한 편에 속했다. 방상시의 현신이라 할지라도 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그는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으나, 그의 반려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그는 서른세 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제법 아까운 나이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어린 자식이 후계가 되어 탈을 물려받았고, 다음 대의 현신을 계승하였다. 그런데 그는 제 아비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삶을 살고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고, 서른세 살이 되는 해에 죽었다.
처음에는 어디까지나 기묘한 우연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흐름은 그다음 대에도 반복되었고, 그다음의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몇 대째 똑같이 이어지자, 대대손손 현신을 모시며 곁을 지키던 이들은 뒤늦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중 제일 오래 곁을 지켰던 원로 하나가 지나간 현신들의 생년월일시를 받아 사주를 살펴보았다. 방상시의 현신이라 할지라도 태생은 인간이기에 혹시나 해서였다.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제각기 다른 궤적으로 삶을 살아야 했음에도 그들은 전부 같은 삶을 살았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 현신이 되었던 자의 일생은 본보기가 되었고, 이후 그의 후손은 반드시 그 전철을 밟았다. 방상시의 현신으로서 어떠한 내력이 세습되고 있음을 눈치챈 나례청 원로들은 이 진실을 엄폐하고 기밀에 부쳤다. 오직 그 내력의 당사자와 원로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예정된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전부 허사였다. 실패의 내력은 끝없이 대물림되었고, 이 업보에서 벗어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살殺이자 벌罰이었고, 혈연을 타고 내려오는 저주에 가까웠다.
물론, 이것을 저주라고 한다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꺼이 감내할 만한 무게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고,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경험도 살면서 한 번쯤은 겪는 것이므로. 허나, 진정한 고통은 ‘자신의 죽는 날을 알고 있다’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세월이 흘러 자신이 처한 운명을 알고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올가미에 걸린 짐승이 한없이 발버둥 치다가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축 늘어트리게 되듯이, 나중에 가서는 그 누구도 이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지 않게 되었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은 위태롭고 막막할지언정 일상의 순간마다 희로애락이 가득 차 있으며, 때로는 모험이고 여정이 된다. 그러나 자신의 끝을 알고서 살아가는 삶은 체념이고 추락이며 말 그대로 죽어가는 일이 되었다. 생일이 되면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뻐하기보다는 남은 생을 헤아리며 슬퍼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어디 비할 데 없는 뼈저린 불구였다.
묘정은 이러한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이지가 있을 때부터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때문에 묘정에게는 어린 나이임에도 죽음을 통달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초연함 같은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자신이 죽는 날을 아는 줄 알았지만, 나중에는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왜?’라는 의문을 품기는 했으나 이내 그러한 태생임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묘정은 이런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해서 딱히 비관하거나 한탄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원로들로부터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원로들은 현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며 이것이 대물림 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었다. 방상시를 물신으로 만들어 도구로 삼았듯이, 현신 또한 누군가에겐 도구가 되었다.
생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맞닥뜨린 인간이라면 부정하거나 좌절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슬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묘정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깨달은 인간이기에 절망하지 않았다. 다만, 산다는 것은 지루하고 시시한 일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