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95)화 (295/348)

#295

지금껏 묘정은 한 번도 열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 묘정의 눈에 휘림과 수향은 꽤 신기해 보였다. 두 사람은 나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휘림과 수향은 가치관도 사고방식도 완전히 다른 인간이었지만, 그럼에도 절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열망이 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나자가 된다는 건 한 인간으로서 제 몫을 온전히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신분과 출신, 성별을 비롯해 현실적인 한계가 명백한 조건 속에서 그 가치는 더욱 빛나 보였고, 타고난 본바탕을 딛고 설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장차 나자가 된다는 것에 막중한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백성과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이 땅의 안위를 지키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삶에 임하는 태도는 다를지언정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사실만으로도 둘은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되었다.

삶을 관통하는 교집합이 있는 한, 둘은 언제까지고 절친한 벗이자 평생의 동지일 수 있었다. 따라서 한때나마 언쟁이 있었더라도 둘의 사이가 멀어지거나 소원해지는 일은 없었다.

“셋이 함께 나례청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거야.]

“어떻게 알아?”

묘정은 별다른 대답 없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현신이 귀천하여 그 뒤를 이어 방상시가 되면, 휘림과 수향을 나자로서 관청에 불러들이는 일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

묘정은 제 부모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저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는 저와 마찬가지로 선대의 뒤를 이어 방상시의 현신이 되었다는 것, 이것이 묘정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현신은 인간이되 신이었고 여간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례를 베풀거나 방상시로서 나서야 할 때를 제외하면 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걸을 때는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고 입을 열지도 않았으며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원로들은 그런 그를 진정한 방상시의 현신이시다, 하며 입을 모아 칭송했다. 분명히 인간일진대 그는 때로 진정 신(神) 같았다.

그에 대하여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은 저를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현신은 묘정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아예 관심이 없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준 적도, 품에 안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적도 없었다. 그는 묘정에게 냉담하였고 늘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어쩌다 가끔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그는 흡사 길가의 돌멩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금세 무시하고는 했다.

그런 사이였으니 가족 간의 정이나 유대감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혈연이라고 해도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묘정을 키우고 보살핀 사람은 유모와 원로들이었다. 둘의 관계는 부자지간이기 이전에 방상시의 현신 그리고 그의 대를 이어 후대가 될 존재, 그뿐이었다.

그런데, 묘정은 딱 한 번 그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본 적이 있었다.

어느 깊은 밤 본당 안을 돌아다니다가 술에 취한 그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평소처럼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묘정을 발견하고는 웬일로 비틀비틀 가까이 다가왔다. 묘정이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리자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너는 왜 태어났느냐?”

영 생뚱맞은 질문이었으나, 묘정은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저는 장차 방상시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묘정의 대답에 현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이 이어지자 묘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현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을 본 순간 묘정은 알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증오하고 있음을. 그건 그냥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속에는 명백한 공허가 깃들어 있었다.

현신이 물었다.

“너는 좋으냐?”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묘정은 고개를 들고 제 아비를 보았다. 묘정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재차 물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좋으냔 말이다.”

“좋지도 싫지도 않습니다.”

“허면 너는 왜 사느냐?”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묘정은 잠시 망설였다.

“그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허면 너는 태어나고 싶었느냐?”

그건 아주 이상한 질문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예,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태어나 있었습니다.”

“과연….”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헌데 나는 너를 낳고 싶지 않았단다.”

“…….”

“그런데 너는 왜 태어났느냐?”

“…….”

질문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저는 장차 방상시가 되기 위하여….”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현신이 작게 웃은 것 같았다. 그 웃음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묘정은 고개를 들었으나, 그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허면, 너는 나처럼 살겠구나.”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묘정은 자선원으로 오게 되었다. 현신이 그렇게 하라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자선원은 관원을 양성하기 위한 사학(私學)으로 묘정의 또래가 많았다. 본래대로라면 묘정은 도성의 관청 안에서 기거하며 현신의 대를 잇는 후계로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이에 원로는 도리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였으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내쫓기듯이 자선원으로 온 묘정은 당혹스럽기만 했다.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알처럼 자선원에 내쫓긴 셈이었다. 이곳에서 묘정은 인간이었다. 현신이 저를 자선원으로 내친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었다. 꼴도 보기 싫은 나머지 눈앞에서 치워 버린 것인가, 내심 그렇게 짐작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이 생활이 혼란스럽기만 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점점 이곳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인간의 마음을 알고 새로운 세상을 배우는 과정이 즐거웠다. 가장 좋은 것은 휘림과 수향이라는 벗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자선원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만약 현신이 태어난 것이 좋으냐고 다시 한번 묻는다면, 서슴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

그러던 어느 날, 현신은 묘정을 불러들였다.

때는 깊은 밤이었다. 현신이 머무는 곳으로 들어서자 등불 한 촉으로 밝혀 놓은 방 안은 어둡고 아늑해 보였다. 침의로 갈아입고 있던 현신은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묘정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리 오거라.”

그가 손짓했다.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뜻밖에도 그는 묘정을 향해 천천히 양팔을 벌려 보였다. 묘정은 자신도 모르게 그 품에 안겼다.

“몹시 곤하구나. 이만 자자꾸나.”

묘정이 품에 안기자 그는 묘정을 꼭 끌어안으며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어 묘정은 눈만 데록데록 굴렸다. 그는 묘정을 품에 꼭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현신 품에 안기는 것도, 그와 함께 자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의 온기로 데워져 있던 이부자리는 포근하고 따스했다. 그는 한쪽 팔을 묘정에게 내어주고는,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 주었다. 혹시나 찬기라도 스밀까 꼼꼼히 여며 주었다.

현신의 너른 품 안에 안겨 있던 묘정이 고개를 들었다. 묘정은 말없이 현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고르게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은 평온했고, 왜인지 아주 지쳐 보였다.

그의 낯을 보고 있으려니 덩달아 잠이 왔다.

묘정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언제나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였고 묘정에게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주지 않았다. 비록 그런 아버지였으나, 어째선지 이렇게 품에 안겨 있으니 그에게 있어 아주 소중한 것이 된 것만 같았다. 그 품만은 몹시 편안했고 따뜻했다.

깊은 잠에 빠진 묘정은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여긴 어디지?

묘정은 어느샌가 너른 초원에 서 있었다. 발에 와 닿는 풀잎의 감촉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느껴졌다. 들판 위에 멍하니 서 있던 묘정은 문득 제 입에 전에 없던 부적 같은 것이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갑갑한 느낌이 들어서 부적을 떼어내 보려고 했으나 아교풀로 딱 붙인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끙끙대던 묘정은 결국 떼어내기를 포기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묘정은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나무로 된 작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세간살이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 내부를 찬찬히 살펴볼 때였다.

어느 순간,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에 묘정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검은색 연기가 한곳에 모여들고 있었다.

검은색 연기는 한데 뭉쳐서 타원의 형태가 되어 허공에 둥실둥실 떠오르더니, 이내 어떠한 형상으로 변했다. 네 개의 눈과 커다란 주먹코, 뻥 뚫린 입술과 깎아 만든 얼굴. 방상시의 탈이었다. 네 개의 눈에서 금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묘정에게 말을 건넸다.

“말문을 열어주랴?”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