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96)화 (296/348)

#296

허공에 탈이 두둥실 떠 있는 광경은 꽤나 기괴하였다.

“말문을 열어주랴?”

묘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묘정이 말을 못하게 된 이유는 자선원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였다. 현신의 후계가 자선원으로 내려간다면 질서를 어지럽히고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원로들의 반대가 있었고, 현신은 그 말이 옳다 싶었는지 묘정을 불러서는 기밀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맹약의 주술을 걸었고, 그날부터 묘정은 말을 못하게 되었다.

입에 붙어 있던 부적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묘정은 신기해하며 자신의 입술과 목을 어루만졌다. 갑갑하던 느낌이 일시에 사라졌다.

묘정은 눈앞에 나타난 황금사목을 응시했다.

“너는 이제 두 번 다시 네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잠시 내 눈을 보겠느냐?”

묘정은 네 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의 나열이 있었다. 황금사목은 묘정이 앞으로 살게 될 생애를 보여 주었다.

묘정은 자신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자신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지켜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묘정은 한 생애를 살았다. 압축된 생애였지만 한 편의 짧은 이야기를 본 것 같았다. 시선을 피해 환상 속에서 벗어났을 때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탈진한 묘정은 뒤로 넘어졌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묘정의 앞으로 탈이 스멀스멀 코앞까지 다가왔다. 묘정이 흠칫하며 고개를 뒤로 물릴 때였다. 네 개의 눈이 한껏 이지러졌다.

“명심하거라. 너는 정작 중요한 단 하나만은 영영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황금사목이 큭큭 웃으며 말했다.

“단 하나 가질 수 없는 것…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묘정은 창백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방상시의 저주에서 ‘단 하나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가질 수 없는 게 무엇인지 미리 알게 된다면, 그것만 욕심내지 않는다면 괴롭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묘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와 약속을 하나 하겠느냐?”

***

묘정은 방 안에 번지는 희미한 빛을 느끼며 눈을 떴다.

베고 누웠던 그의 팔은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었고,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 묘정은 홀린 듯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건드려 보았다. 그의 살가죽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질겼으며 딱딱하였다. 생명이 사라진 인간의 육체는 놀랍도록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묘정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를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어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묘정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지.”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렸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영면에 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묘정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어젯밤만 해도 분명히 살아 숨 쉬던 그는 죽어 있었다.

그는 잠이 든 채로 세상을 떠났다. 앓고 있는 병도 없었고, 특별한 사고 같은 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으나 그저 다음날 눈을 뜨지 못했을 뿐이다. 별다른 고통 없이 평온하게 잠들듯이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게 그나마 복이라면 복일 것이다.

그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의 죽음이 슬픈 건 아니었다. 묘정의 삶에서 그는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다. 하나뿐인 가족을 잃었다는 상실감이나 비애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왜인지 뱃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현신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묘정을 불러들였다. 언제나 시선 한 톨 제대로 주지 않고 냉담하게 굴던 그는 생애 마지막 밤 제 아이를 품에 안고서 잠들었다. 묘정은 차게 식은 품에서 지난 밤의 온기를 떠올리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그 느낌은 꿈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를 안고 잠자리에 들었는지 궁금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결국은 물어보지 못했다. 어젯밤 현신은 몹시 피곤해 보였고, 또 한편으로는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묘정은 불현듯 생각했다. 이별이란 이런 거구나.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 말을 걸어도 나를 봐주지 않는 것, 나는 이곳에 있으나 당신은 이곳에 없는 것, 뒤늦게서야 어쩌면 당신이 아주 조금쯤은 나를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고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어젯밤 잠결에 그가 뭐라 속삭였던 것 같기도 했다.

‘얘야, 너는 절대로 인간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소중한 사람과 가족이 되는 일은 너무나 평범한 삶이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비범한 삶을 살게 된 대신, 누구나 얻을 수 있는 평범한 삶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몹시도 괴로워했다. 나처럼 살지 말라는 말은 자식을 사랑한 부모로서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던 셈이다. 그는 자식에게 빚을 물려주었다는 사실에 가책을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마음일지도 몰랐다.

묘정은 생애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겨우 저를 품에 안았던 현신의 삶이 어리석고 가엾게만 느껴졌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어미를 만났고, 자식을 낳으면 이 삶이 대물림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식을 두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끝내 주어진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묘정은 결심했다.

나는 당신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이 업보를 끊고 이 고통의 연쇄를 없앨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곁에 두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겠다. 그를 탐내고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지만 않는다면 그를 잃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내 죄를 대물리지 않을 것이다. 이 고통의 삶을 다른 누군가에게 남겨 주지 않을 것이다. 신으로서 살다가 신으로서 죽을 것이다.

묘정은 차게 식은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

현신께서 귀천하셨다.

며칠간 퇴송식이 있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으므로, 장사를 지내는 대신에 퇴송식의 일환으로 그의 귀천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 서른세 해를 산 육신은 화장하여 산과 바다에 흩뿌려졌다. 비석을 세우거나 묘를 올리는 일도 없었다. 그가 생전에 입던 옷과 그의 손길이 닿았던 물품들도 전부 모아서 불태워졌다.

묘정은 현신의 지위를 넘겨받았다. 묘정은 제 수중에 들어온 황금사목을 내려다보았다. 나무로 된 탈은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꿈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저에게 말을 걸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묘정은 경대(거울) 앞에 앉아 얼굴에 탈을 썼다.

퇴송식이 끝난 이후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본래대로라면 승계를 위하여 교육을 받았어야 했으나 묘정은 몇 년간 자선원에서 유년을 보냈기 때문에 할 일이 산더미였다. 방상시로서 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계절마다 귀신을 모아 여제(厲祭)하고, 부묘를 다녀오는 임금의 행차에 관여해야 했으며, 궁궐의 잡귀를 몰아내고, 민간의 귀신을 단속하며 금란(禁亂)을 위해서도 힘써야 했다.

방상시의 탈을 쓴 순간부터 묘정은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인간과 똑같이 밥을 먹으며 인간과 똑같이 잠을 잤으나 사람들은 그를 인간이 아니라 방상시의 일체로서 대우했다. 그는 인간이기 이전에 방상시의 현신이었다.

나례청의 원로들은 묘정을 신처럼 경외하며 예우를 갖췄고, 묘정이 하늘이 내린 천자(天子)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에 둘도 없는 윗전으로 대했다.

묘정은 강물 위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흘러가는 대로 그 모든 것을 따랐다. 책임감과 부담이 막중한 자리였다. 고작 나무를 깎아서 만든 탈의 무게는 태산처럼 무거웠다.

모든 일이 버겁게 느껴질 때면 휘림과 수향 생각이 났다.

도성에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수향과 휘림은 저를 걱정할 것이다. 묘정은 휘림과 수향에게 편지를 썼다. 어디서부터 말을 전해야 할까 고민이 되어 쉽사리 서두를 떼지 못했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적어 내린 내용은 시시콜콜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도성에 와서 잘 지내고 있으며 때가 되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몇 년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나무가 헐벗은 추운 겨울이 물러갔다. 새싹이 돋는 봄이 찾아왔다. 오늘은 관청에 새로운 나자들이 임관하는 날이었다.

“이번에 임관한 휘림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임관한 수향이라고 합니다.”

휘장 속에 앉아 있던 묘정은 성큼성큼 내려가 얼굴에 쓰고 있던 탈을 벗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두 사람이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묘정이 베시시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휘림과 수향이 흠칫하며 토끼 눈을 떴다.

“묘정?!”

어느덧 약관을 앞둔 묘정은 키가 훌쩍 컸으며 완전히 장성해 있었다. 처음 들어 보는 중저음의 목소리였으나 수향과 휘림은 눈앞의 인물이 묘정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몇 년만의 만난 묘정이 방상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수향과 휘림은 당혹스러워했다.

“어, 어째서….”

두 사람은 말문이 막혀 어리벙벙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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