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97)화 (297/348)

#297

몇 년 만에 만난 휘림과 수향은 여전했다.

자선원에서는 벗으로서 허물없이 지냈으나 장성한 모습으로 재회한 탓인지 셋은 자연스럽게 존칭을 쓰고, 상호 간에 격식을 차리게 되었다. 게다가 묘정은 방상시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다른 관원들과 마찬가지로 상명하복의 관계를 따랐다.

수향과 휘림은 묘정이 방상시의 후계였다는 사실에 몹시 놀라면서도 자선원에서 머물게 되었던 지난날의 사정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묘정이 할 수 있는 일은 미리 말하지 못했음을 사과하는 일뿐이었다. 그에 무언가 짐작했는지, 이후로 두 사람이 묘정에게 직접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나례청으로 막 넘어왔을 때 휘림과 수향은 묘정을 매우 어려워했다. 앳된 티를 벗고 완전히 장성하여 성인남녀의 모습으로 다시 재회한 데다, 무엇보다도 나례청의 주인인 묘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묘정은 셋이 있을 때만큼은 공과 사를 구분하여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달라 하였다. 휘림과 수향은 그럴 수 없노라 거절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허나 내가 임금은 아니잖습니까.”

“크게 다를 바 없지요. 아니, 더 전능하시지요.”

예법에 엄격한 수향이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인간과 귀신을 아우르는, 나자들의 주군 아니십니까.”

그럼에도 묘정은 물러서지 않았다. 나례청의 주인으로 있는다는 것은 아주 외로운 일이었다. 묘정의 고집에 못 이겨 결국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던 두 사람이었으나 차츰 시간이 흐르며 제법 편하게 말을 섞게 되었고, 자연스레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도 많아지면서 나중에는 예의범절을 지키면서도 기탄없이 대하는 사이가 되었다. 휘림, 수향과 있을 때만큼은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휘림은 변함없이 짧은 머리를 하였으며 높은 수준의 검술을 구가하였다. 내기 삼아 휘림과 검을 겨루어보기도 하였는데 결과는 묘정의 참패였다. 묘정도 단련에 게으르지 않았으나 휘림의 자질은 남달랐다. 휘림의 검술에 떠밀린 묘정은 검을 놓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천하제일검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묘정이 일으켜 달라는 듯이 손을 뻗었다. 휘림이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두 사람의 거리가 훅 가까워졌다. 묘정이 코끝에서 빙그레 웃자, 휘림은 서둘러 손을 털고 등을 돌렸다.

묘정은 멀어져 가는 휘림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셋이 있을 때는 괜찮지만, 휘림과 단둘이 있을 때는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동생 대하듯이 편하게 대해주었던 휘림은 묘정을 상당히 껄끄러워했다. 묘정도 어느 순간 눈치챘다. 아무래도 떨어져 있는 시간이 오래되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서먹하고 소원한 기류를 떨쳐 보고자 묘정은 빙그레 웃으면서 장난을 쳤다.

“요즘도 머리를 직접 자릅니까?”

묘정은 손을 들어 휘림의 귀밑에 닿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에 휘림은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예? 아, 뭐. 그렇지요.” 하더니 이내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손을 다치진 않았습니까? 예전보다 손에 상처가…….”

이번에는 휘림의 손을 가져갔다. 굳은살이 잡힌 손가락을 구경할 때였다. 휘림이 손을 슬그머니 빼더니, 눈썹 근처가 간지러운지 긁적거리는 흉내를 내며 자연스럽게 손을 물렸다.

“…….”

예전에는 머리를 만지작거려도 가만히 있었고, 외려 손을 뻗어 묘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높은 곳에 오르거나 어디 갈 일이 있으면 손을 잡아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만난 휘림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듯해도 가끔은 이렇게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말이 없던 묘정은 대놓고 물었다.

“내가 불편하게 했나요?”

“당연히 불편하지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휘림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왜요?”

“그야 묘정은 사내가 아닙니까.”

떨떠름한 대답에 묘정은 멈칫했다.

‘너도 꼴에 사내라 이거냐?’

생각해 보니 휘림은 자선원에서도 사내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한때 묘정에게도 불쾌한 기색을 비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사내아이들은 휘림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건 휘림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몸집이 작아서 괜찮았지만 이제는 장성하여 괴리감을 느낀 듯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으면 머리통 하나만큼 차이가 났다. 이제는 애구(愛狗)라고 부르는 게 망측할 정도로 묘정은 장신이었다. 손도 크고 어깨도 넓었다.

“내가 혹시 사내여서 싫습니까?”

묘정은 서둘러 덧붙였다.

“나는 사내가 아닙니다.”

괴상한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휘림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

“…….”

휘림이 묘정을 위아래로 훑어보자, 그제야 묘정이 한 박자 늦게 말을 주워 담았다.

“아아, 아, 그게… 그… 사내는 맞는데, 나는 휘림이 생각하는 그런 부류의 사내가 아닙니다. 나는 휘림과 이렇게 다시 만나서 벗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이 아주 좋습니다…….”

말을 뱉고 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그저 벗으로서만 좋은 게 아니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묘정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연정이었다. 휘림과 단둘이 있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휘림과 이어지고 싶다거나 이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해본 적 없었다.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 이 저주가 대물림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이상 바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묘정은 욕심이 없었다.

‘단 하나 가질 수 없는 것,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더 욕심을 내지만 않는다면, 이 행복과 평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뭐,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휘림이 묘정을 피하는 일은 없었다.

***

때는 깊은 밤이었다.

작년부터 휘림은 지방 관아를 순시하는 감찰관 일을 맡게 되었다. 두어 달에 한 번 도성에 올라와 며칠간 머무르곤 하였는데, 묘정은 휘림이 돌아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밤하늘에는 맑은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오랜만에 셋이 한자리에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지방을 떠돌던 휘림은 도성에 올 적이면 이번 여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노라 하며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차근차근 늘어놓고는 하였는데, 묘정은 이 순간이 제일 즐겁고 행복했다. 그의 모험담을 듣는 일도, 휘림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무언가 달랐다.

휘림은 왜인지 말수가 줄어들었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간간이 생각에 잠기고는 했다.

“저는 이만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

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독이 쌓였으니 피곤할 만하지요.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그런데, 휘림이 아랫사람의 예를 갖추더니 고개를 숙였다.

“사직을 청합니다.”

묘정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묘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수향을 쳐다보았다. 수향도 믿기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사직하고 관원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묘정이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했다.

“나자를 그만두겠다는 겁니까?”

“예.”

“…….”

수향은 낯을 굳혔다. 나자가 되기 위해서 휘림이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수향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다고 하였으니 모든 일에는 고충이 있기 마련이지만 휘림은 힘든 내색 한 번 비친 적이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이 길은 저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년 전부터 나례청은 격변기에 있었다.

최근 나례청 내부에서는 귀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나자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고, 귀신은 해악을 끼치니 엄중하게 퇴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일각에서는 구천을 떠나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니 그 인과부터 보아야 한다고 반기를 들었다.

이에 따라 나자들의 입장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갈리게 되었는데, 양쪽의 입장이 팽팽하여 연일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이러한 논쟁이 점화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요인은 나례청의 입지가 예전만 하지 못하고 위태로워졌다는 점에 있었다. 언제부턴가 조정에서는 허황된 일에 공역을 낭비하고 백성을 곤궁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었다.

평범한 이들의 눈에는 벽사 의례나 주술과도 같은 무속적인 의식이 요사스러울 따름이니, 미풍양속을 어지럽히는 미신처럼 보일 뿐이다. 궁궐 안팎으로 갈수록 나례의 폐단을 엄중히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나례청의 위상은 이전에 비해 많이 격하되었고, 실제로도 규모가 축소되어 입지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강경파는 나례와 무업은 다르다 주장하며 더욱 철저히 선을 그었고, 나례청 안팎으로 편가르기가 심해지고 있었다.

휘림 또한 귀신을 적대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작년부터 바깥을 돌아다니게 되면서 여러 굿판을 전전했다. 보고 듣고, 함께 소통하며 울고 우는 무당이 백성의 삶과 훨씬 맞닿아 있었다. 씨앗처럼 솟아난 의구심은 어느샌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감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나례청은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휘림의 말에, 수향의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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